그 여름, 사랑은 사고처럼 찾아왔다. 수이(송하림)의 축구공에 맞은 이경(윤아영)은 집에 돌아가 그 아이의 얼굴을 떠올린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물론이다. 수이는 매일 딸기우유를 사 들고 이경을 찾아와 안부를 묻고, 이경은 운동장을 누비는 축구부원 수이를 먼발치에서 눈으로 바삐 좇는다. 혹시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일까? 조심스러운 기대는 금세 햇살 같은 희망이 된다. “우리는 마시고 내쉬는 숨 그 자체였다.” 열여덟 두 소녀는 서로의 든든하고 사랑스러운 연인이 되어 한여름을 난다. 상대를 끌어안고 만지며 아늑함을 처음 만난 사람들처럼 행복해한다. 미래도 약속한다. 졸업하면 다른 곳으로 가자고, 돈 많이 벌어 집을 사자고 한다. 그들은 정말로 여러 계절을 함께 보낸다. 스무 살엔 같이 서울로 이사해 새로운 생활을 꾸린다. <그 여름>은 머뭇거리지 않는 퀴어 로맨스물이자 극장에서 흔히 만나기 어려운 국내 장편 애니메이션이다. 수채화를 연상케 하는 부드럽고 세밀한 배경 속에 이제 막 더 큰 세상과 만나기 시작한 젊은 두 여성의 사랑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러나 이들의 일상은 그 여름의 빛처럼 마냥 화사하지만은 않다. 현실의 무게와 서로의 간극을 체감하며 이경과 수이는 곧 또 다른 여름으로 향한다.

<그 여름>은 <생각보다 맑은>(2014)으로 일찌감치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데뷔를 치른 한지원 감독의 신작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재학 중에 첫 단편 <코피루왁>(2010)으로 서울인디애니페스트 대상을 받으며 이름을 알린 한지원 감독은 이후 꾸준히 개성적 화풍에 섬세한 감정을 담는 작업을 해왔다. 단편 애니메이션뿐 아니라 훨씬 짧은 호흡의 광고와 웹 애니메이션까지 그의 활동 반경은 제법 넓은 편. 지난해 공개된 <마법이 돌아오는 날의 바다>(2022)의 영화제 상영을 놓쳐 아쉬워하는 관객이라면 인터넷에서 시리즈물 <딸에게 주는 레시피>나 캠페인 영상 <뭐든 될 수 있을 거야>를 찾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다. 현실과 욕망의 틈 사이에서 고군분투하고 서로 용기가 되어주는 인물들에게 주목해왔던 감독은 <그 여름>에서 서툴고도 강렬한 사랑 이야기에 이르렀다. 영화는 감독의 지난 작업과 규모 면에서 차이를 보이는 프로젝트의 산물이기도 하다. 본래 애니메이션 OTT 플랫폼 ‘라프텔’의 기획으로 출발한 <그 여름>은 다양한 팀 간 협업으로 완성돼 7개의 에피소드로 플랫폼에서 미리 공개된 바 있다. 그러니 <그 여름>은 현재 국내 애니메이션 프로덕션의 다양한 형태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사례이기도 한 셈이다.

이야기 뼈대는 「쇼코의 미소」로 널리 알려진 작가 최은영의 단편소설 「그 여름」에서 고스란히 가져왔다. 한지원 감독은 “맑은 정서 안에 어딘가 뼈저린 솔직함이 애달프게” 느껴졌고 “청춘과 첫사랑의 결 이상의 절절함”이 와 닿았다며 원작에 대한 소감을 전한다. 그런데 이는 감독의 전작 <생각보다 맑은>에 그대로 해당하는 말이기도 하다. 졸업을 앞둔 애니메이션과 학생부터 집을 뛰쳐나간 강아지에 이르기까지 등장하는 캐릭터의 면면은 다양하지만 <생각보다 맑은>이 근본적으로 다루는 건 나와 세상 사이의 마찰이다. 현실에 기반을 둔 에피소드들은 우중충함과 맑음 사이를 오가며 꾸밈없이 절절한 정서를 전한다. 수이와 이경의 이야기도 밝은 동시에 어둡다. 찬란한 햇빛, 휘날리는 머리칼, 깊은 숨소리가 어우러지는 애정의 순간들은 더없이 눈부신 시간을 만들어 내지만 그들의 사랑은 세상 한가운데서 괴로움을 피하지 못한다. 먼저 타격을 입고도 제대로 아파하지 못하는 건 수이 쪽이다. 축구를 계속하고 싶었던 수이는 무릎 부상과 경제적 문제에 부딪혀 일찌감치 꿈을 접는다. 이경이 대학 기숙사에서 지내는 동안 수이는 곰팡이가 핀 좁은 고시원에 머물며 직업전문학교에 다니고 아르바이트를 몇 가지씩 해낸다. 수이가 사는 세상을 이경은 알지 못한다.

“내가 너를 끝내 알 수 없는 건 아닐까.” 우리의 연애를 숨겨야 한다고 말하던 수이를, 그렇게 아픈데도 축구에 미련을 두던 수이를, 힘든 일을 연인에게조차 내색하지 않던 수이를 이경은 이해할 수 없다. 차이를 자각해 나가면서 관계도 변한다. 사랑은 분명 그대로인데 마음은 널을 뛴다. 어느 날은 차갑게 등을 보이다가도 또 어느 날은 세상에 둘밖에 없다는 듯 서로를 끌어안는다. 그 사이 이경의 마음엔 다른 이를 향한 사랑도 자리를 잡는다. 이경의 1인칭 내레이션은 영화가 원작과 가장 큰 차이를 갖는 지점이다. 원작 역시 이경의 입장을 구체적으로 서술하긴 하지만 또렷이 들려오는 영화 속 이경의 목소리는 관객과 작품의 감정적 거리를 특유의 방식으로 좁힌다. 수이와의 연애에서 이경이 겪는 다양한 감정은 물감이 번지듯 각각의 장면을 물들인다. 이러한 형식적 특성과 이경의 여러 혼란에도 불구하고 수이가 가늠할 수 없는 미지의 대상으로만 남는 건 아니다. 영화는 인물을 알 수 없는 영역에 남겨두기보다 걷잡을 수 없이 변화를 거듭하는 사랑의 풍경을 포착하는 데 더 힘을 쏟는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아주 내밀한 일이 어떻게 세계와 연결되는지 더듬어 보려고 한다. “보증금 500만 원은 우리의 관계를 부드럽고 편하게 해주었다”는 이경의 대사는 사랑의 한 측면을 냉정히 드러낸다.

애니메이션으로서 <그 여름>의 특징은 과감한 표현보다는 서정적이고 세밀한 작화에 있다. 이경과 수이가 고등학교를 다녔던 지방의 자연 풍경, 그와 대조를 이루는 서울의 야경, 인물들이 주로 지나다니는 대로변과 골목길의 모습 등 섬세하게 표현된 영화의 배경 공간은 그대로 포스터로 만들어도 좋을 정도로 예쁘다. 이경이 친구들을 만나고 편히 웃을 수 있는 곳인 레즈비언 클럽 ‘문리버’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장소. 한편 수이가 살던 고시원처럼 핵심적이지만 좁은 공간은 다양한 앵글로 구석구석 살필 수 있게 구성돼 있다. 공간만큼이나 시대도 중요하다. <그 여름>의 시간적 배경은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걸쳐있다. 폴더폰이나 CD플레이어 같은 추억의 아이템부터 세기말 거리의 모습과 2002년 월드컵의 풍경까지 영화 곳곳에 그 시절의 공기를 살아나게 하는 요소가 가득하다. 감독의 말에 따르면 ‘배경이 되는 시간과 공간’을 최대한 잘 표현하는 것은 압축과 각색의 기술이기도 하다. 러닝타임에 영향을 주지 않고 정서를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 여름>은 우리를 유일무이한 사랑의 장소로 데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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