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평등하지 않은 세상을 꿈꾸는 당신에게 바칩니다”
바야흐로 2023년, 대한민국에서는 언제나 평등하지 않은 세상을 바란다는 말을 공공연하게 내뱉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최소 100억 원부터 최대 400억 원에 이르는 고급 아파트의 분양가를 낼 재력이 있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말이겠지만.
서울 서초구 반포동에 들어서는 ‘더 팰리스(THE PALACE) 73’이라는 주상복합 아파트는 위와 같은 광고 문구를 내걸었다. 더 이상 불평등을 바라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게 된 셈이다.
핵심은 “언제나 평등하지 않은 세상을 꿈꾸는 당신에게 바칩니다”라는 문구의 ‘언제나’라는 말에 있다. 그 말인즉슨, 지금까지 세상은 불공평해왔으니, 앞으로도 이렇게 쭉 불평등하기를 바란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
△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계속 웃길 영화”
고급 아파트의 광고 문구에서 영화 <슬픔의 삼각형>을 떠올렸다. 영화 <슬픔의 삼각형> 포스터에 적힌 "포브스 선정 올해 가장 웃긴 영화,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라는 문구는 참 묘하다.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의 영화 <슬픔의 삼각형>은 불평등을 다룬 블랙 코미디다. 제목에서 느껴지는 뉘앙스와는 다르게, 이 영화는 난해한 예술 영화라거나, 해석을 찾아보지 않고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영화와는 거리가 멀다. <슬픔의 삼각형>이 불평등을 풍자하는 방식은 오히려 쉽고, 웃기고, 직관적이다. 풍자는 극 내내 꽤나 원초적으로, 직설적으로, 애써 다듬지 않고 야만적으로, 부러 덜 세련된 방식으로 진행된다. 설령 구토와 똥물이 가득할지언정.
제목의 원래 뜻과는 별개로, <슬픔의 삼각형>은 삼각형을 딱 120도 돌린 영화다. 모든 각이 60도인 정삼각형을 120도 돌리면 그대로 정삼각형이 되듯이, 계급의 피라미드를 전복해도, 또 다른 계급의 피라미드가 나타난다.
불평등은 계속될 것이기에, 삼각형이 뒤집혀도 계속될 것이기에, 그래서 <슬픔의 삼각형>은 앞으로도 영원히 계속 웃길 영화일지도 모른다. <슬픔의 삼각형> 포스터의 ‘앞으로, 영원히’, 그리고 100억 원 아파트 광고에서의 ‘언제나’. 둘은 어쩌면 같은 의미다.
△ 크루즈 탑승객 vs 크루즈 직원, 선장 vs 부하직원, 일반 승무원 vs 청소노동자 등… 수많은 삼각형이 존재하는 크루즈 안
영화는 돈 많은 사람들이 탑승하는 '호화 크루즈'를 주요한 배경으로 삼는다. 그러나 <슬픔의 삼각형> 속 계급 구도는 비단 크루즈의 부자 탑승객과 크루즈 직원 사이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는 1부, 2부, 3부에 이르기까지 극 내내 끊임없이 수많은 삼각형의 존재를 상기시킨다.
부자 탑승객들과의 대척점(그리고 그 아래)에 놓인 크루즈 직원들 간에도 또 다른 삼각형이 존재한다. 영화는 2부에 이르러 ‘선장’을 전면에 내세우며 삼각형이 다층적으로 실재함을 드러낸다. 크루즈 직원 선장부터 크루즈 청소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부자들을 위해 일하는’ 존재라는 점은 동일하지만, 그 안에서도 피라미드는 촘촘히 나뉜다.
선장 ‘토마스’(우디 해럴슨)가 꼭대기에, 그 아래에는 지배인 ‘폴라’(비키 베를린)와 일등 항해사, 그리고 일반 승무원, 그리고 가장 아래에는 ‘애비게일’(돌리 드 레온) 등의 선박을 청소하는 노동자들. 물론 이들의 프로필은 크루즈 밖의 인종, 젠더 피라미드와 유사하게 구성되어 있다.
마르크스주의자 선장은 부자 탑승객과 대척점에 놓인 인물이지만, 그가 업무를 태만하게 하고, 방으로 도피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크루즈 직원 중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임을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하다. 크루즈의 지배인과 일등 항해사는 선장이 만찬에 나타나지 않을까 안절부절못하지만, 선장은 부자들에 대한 반감 때문인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본인의 업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다. 선장은 크루즈 직원의 삼각형 꼭대기에 있기 때문에 비로소 그의 신념을 소극적으로나마 내비칠 수 있던 것. 마치 돈이 많기에 이 크루즈에 올라타 수많은 서비스를 받으면서도, “우리 모두는 평등하잖아!”라고 외칠 수 있던 러시아 부인처럼.
그러나 영화에서 ‘선장’의 행동이 과연 옳냐, 그르냐 등의 가치판단은 주요한 쟁점이 아니다. <슬픔의 삼각형>은 수많은 아이러니들을 겹치며 관람객들이 개인이 아닌 구조에 초점을 맞추도록 유도한다. 영화는 삼각형을 피해 도피하는 행위조차 또 다른 삼각형 구조에 순응하는 일이라는 듯, 선장을 우스꽝스럽게 그리고 있다.
△ 1부에서 그려진 개인 간의 전복은 절대 구조의 전복이 아니라는 듯 비웃는 2부
1부 ‘칼 & 야야’는 남성 모델 ‘칼’(해리스 딕킨슨)과 여성 모델 ‘야야’(찰비 딘) 사이의 갈등을 그린다. 영화에서 그려지는 모델 업계는 일반적인 젠더의 위계가 전복된 산업이다. 남성 모델은 여성 모델의 3분의 1밖에는 벌지 못한다. 무대에 선 여성 모델 야야를 그저 바라보는 칼, 그리고 야야의 ‘조종’에 당하는 칼. 적어도 이 커플 사이에서는 더욱 많이 벌고, 더욱 유명하다는 이유로 여성이 남성보다 더욱 우월한 지위를 지녔다.
그러나 영화의 이야기는 2부에서 새로운 국면을 마주한다. 이 커플이 크루즈에 탑승하면, 영화의 초점은 더 이상 둘의 갈등이 아니게 된다. 1부에서 칼, 야야 두 개인에게 초점을 맞추던 카메라 렌즈는 2부에서 더 넓은 세상, 크루즈 안을 응시하도록 유도한다. 마치 1부의 전복은 단지 개인(혹은 일부 산업)의 전복에 지나지 않는다는 듯, 영화는 더 큰 삼각형의 존재를 일깨운다. 개인 간의 전복은 절대 구조를 뒤집을 수 없고, 구조의 삼각형은 너무나 공고하다는 듯, 2부는 노골적으로 계급 피라미드를 드러낸다.
※아래 문단에는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 꼭대기에 오르자 ‘언제나 평등하지 않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
<슬픔의 삼각형>은 말 그대로 크루즈를 뒤집어 계급의 삼각형을 전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3부에서 확인할 수 있듯, 삼각형을 기울여서 나타난 것은 또 다른 삼각형이었다. 크루즈 내 계급의 삼각형에서 가장 아래에 위치했던 청소 노동자 ‘애비게일’은 무인도에서는 삼각형의 가장 위 꼭짓점에 도달한다. 더 이상 사회에서의 재화가 유효하지 않은 무인도에서 러시아 부자 ‘드미트리’(즐라트코 버릭)는 가장 약한 존재로 전락한다.
무인도에서의 탈출 가능성이 엿보이는 순간, 계급의 최상단에 군림한 애비게일이 야야를 죽이려고 하는 영화의 결말은 “언제나 평등하지 않은 사회를 꿈꾼다”라던 최소 100억 원짜리 아파트의 광고 문구를 떠오르게 한다. 애비게일은 자신이 다시 최하층이 될 무인도 밖의 세상이 아닌, 계급의 가장 꼭대기에서 영원히 살고 싶었으리라.
사실은, 이 풍경들이 그저 웃기니 함께 깔깔거리기 위해 다들 보았으면 싶을 뿐이다.
씨네플레이 김지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