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캐릭터의 옷 소재만 봐도 픽사의 아름다운 집착이 보인다

한국계 감독이 만드는 K-장녀스러운 이야기라 하여 한국 개봉 당시부터 주목받았던 <엘리멘탈>(2023)은 물과 불의 러브스토리다. 뜨거움과 차가움의 이질적 요소가 어떻게 만나는지가 관전 포인트며, 각자의 특성을 극복하고 만남을 이룬다는 측면에서 보수적인 동양 사회와 그들이 드림을 이루기 위해 건너가는 미국에 관한 우화 또한 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 애니메이션은 비단 미국뿐만이 아니라 오늘날의 이민자 및 균열의 소재를 이야기의 테이블에 올리지 않을 수 없다.

감독인 피터 손은 <몬스터 대학교>(2013) 스퀴시, <버즈 라이트이어>(2022) 삭스의 성우를 하기도 했다.


미국 이민의 역사

미국에 첫 이민법이 제정된 것은 18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데, 이민자로 받아주는 요건이 어설펐다. 백인이며 2년 동안 미국에 거주했으며 성품이 좋아야 한다는 것. 초기에는 자유를 찾아 떠나는 영국과 네덜란드의 사람들이 주를 이뤘다.

그런데 19세기 중반에 유럽의 아일랜드에서 대기근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는 일이 일어났다. 이들은 죽을 바엔 기회를 잡으려고 신대륙으로 대거 이주했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갱스 오브 뉴욕>(2002)에 등장하는 암스테르담(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이 아일랜드 이민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빌(다니엘 데이 루이스)은 이미 자리를 잡은 영국 이민자였다.

독일 사람들은 중서부의 밀워키에 자리를 많이 잡았다. 그래서 미국에서 양조장이 가장 많은 곳이 밀워키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런데 양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독일인들은 스파이며 악마라는 취급을 받기도 했다. 심지어 닥스훈트는 독일쪽 견종이라며 처단하기도 했다

이탈리아의 이민자들은 가톨릭이 많은 탓에 종교적인 충돌도 많았다고 전해진다(일찌감치 자리 잡은 영국인들은 성공회가 주요 종교였다). 연상되는 코드가 마피아라서 많은 고생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피자를 발명해서 들고 왔고, 뉴욕에 장착하며 완성시켰다. 게다가 금주법 시절(1920~1933)의 유일한 예외는 가톨릭 행사에 쓰이는 와인이었다. 그래서 당시에 가톨릭 인구가 폭증했다는 통계도 있다.

이렇게 이민사회에서 핍박과 차별은 끊이지 않고 발생해왔다. 인간은 다른 것에 매력과 동시에 배격을 느끼기 때문일까? 이렇게 상이한 것들의 조합하는 데는 대체 무엇이 필요할까?

MLB의 밀워키를 왜 브루어(양조장)라고 하는지 알겠죠?


반대와의 만남

생명의 근원이 물이라면, 엘리멘탈 시티를 물이라는 원소가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이 도시를 미국이라는 나라에 비유한다면 물 종족은 영국에서 건너온 백인의 앵글로 색슨(WASP)이 될지, 혹은 원래 살았던 원주인이 맞는지 생각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요즘은 '인디언'(Indian)이 아니라 '아메리카 원주민'(Native American)이라고 한다

이 도시의 혈관이 되는 대중교통의 바탕은 물로 이루어져있다. 높은 곳에 위치한 물의 도로는 지나갈 때마다 지상에 물을 퍼붓는다. 이는 다른 원소들에겐 도움이 되지만, 불에 직접적으로 떨어진다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는 위험한 것이 된다. 엘리멘탈 시티에 처음 들어온 아빠인 버니와 엄마인 신더를 생각해보자. 자신이 이름을 엘리멘탈어(그래봐야 영어)로 표현할 수 없자, 입국처의 직원은 그냥 버니와 신더로 하라면서 일방적으로 정해버린다. 기본적으로 이민해온 그룹에게 친절한 곳은 아닌 것이다.

앰버가 여러 원소 사이에 섞였을 때를 생각해보면 군중들 사이에 불은 거의 앰버만 보인다. 그렇다면 불이라는 원소(민족, 인종)은 정말 소수라는 의미이며 이들이 여러 곳에 퍼져서 살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앰버를 비롯한 불 원소가 거주하는 곳은 차이나타운, 혹은 한인 타운 정도로 비유가 가능하다.

불은 도시의 대부분인 물을 증발시키고, 혹은 가연성 물질에 해롭다는 이유로 배척받는다. (물론 이 이유는 이성적 관점에서 합리적인 판단일 수 있다. 그러나 연출자의 시선은 합리보다는 다양성에 중심을 뒀기에 그에 포커스를 맞춘다) 이에 인종의 용광로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차별이 존재하는 미국을 연상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러다 보니 반사작용으로 버니 또한 배타적 민족주의적 성향을 가지게 된다. 물은 단지 우리를 해롭게 하는 존재라는 편견으로 규정 박아 버리는 것이다.

엘리멘탈 시티에서 서로의 과실을 따는 것은 음란행위로 간주되는 느낌적 느낌이다.

이러한 상호 배격의 태도가 아마도 <엘리멘탈>이 제시하는 사유의 소재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관한 나아갈 길에 대하여 융화라는 솔루션을 던진다. 그리고 그것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한 쪽의 노력이나 각성이 아닌 모든 무리의 힘이 필요하다고 피력한다. (엘리멘탈 시티에 물과 불이 아닌 원소들도 가득한데, 두 종족만의 화합이라는 측면에서 아쉬움은 남는다)

생각해보면 물은 불과 닿으면 꺼지고 불은 물에 가까워지면 증발한다. 하지만 변화란 본디 이질과 갈등에서 시작한다. 그래서 제작진이 제시하는 변화의 첫걸음은 앰버와 웨이드가 만나 증기가 만들어지는 것일지 모르겠다. 앰버는 날 때부터 불이라는 이유로 비비스테리아를 관람하지 못한 상처를 가지고 있다. 이를 알게 된 웨이드는 불과 물의 습성을 조화하여 거대한 공기방울을 만들어 낸다. 이 공기방울에 들어간 앰버는 비로소 물속을 지나가 비비스테리아를 직관할 수 있게 된다. 상이한 두 요체가 동화하는 첫걸음은 이런 식의 접근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모래를 변환시켜 유리로 만드는 장면도 나온다. 불만 있다고, 혹은 모래만 있다고 해서 유리라고 하는 화학적 변화의 결과가 나타나진 않는다. 즉, 단일한 원소의 특성이 아닌 요소 간의 케미가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연출자인 피터 손 감독은 한국에서 미국 뉴욕으로 떠나온 부모의 손에 컸다. 그리고 LA로 떠나오며 여러 가지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대립과 마찰은 없앨 수 없는 것이지만, 활용에 따라 제3의 방법이 예상치 못한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에 대한 나름의 숙고인 셈이다.

앰버는 깨진 유리병 조각을 모아 다시 유리병을 만들고, 그 안에는 물이 담긴다. 화합은 위협도 안전하게 만든다.

엘리멘탈 시티의 건물은 대부분 유리로 되어있다. 거기엔 물이 살고 있다. 모래는 불로 만든다. 그리고 유리에 담긴 물은 불에게도 위협이 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유리는 공존을 의미한다는 면에서 화합을 상징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다른 것이 서로를 경계하던 차에 만들어졌다. 모두가 같은 세상은 끔찍할 것이다, 하지만 다른 존재들이 그 이유 때문에 서로를 혐오한다면 더 끔찍할 것이다. 언제나 차이를 인정하며 더 좋은 방법을 찾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프리랜서 막노동꾼 이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