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아나 존스: 운명의 다이얼> 초반부, 디에이징 기술로 마치 과거의 모습을 되찾은 듯한 해리슨 포드

첫 경험은 잊을 수 없다. 아니다. 나는 씨네플레이에다 그 ‘첫 경험'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일반적인 첫 경험 이야기다. 누구에게나 죽는 순간까지 기억에 남을 첫 경험이 있다. 나에게도 있다. 이를테면 처음 망고 주스를 먹었던 순간이 그렇다. 1990년대 중반 나는 캐나다에서 망고 주스를 처음 먹고 얼어붙었다. 망고라는 과일이 있구나. 오렌지와도 다르고 사과와도 다르구나.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맛에 혀가 눈을 뜨는 순간이란 정말이지 굉장하다.

곧 한국에도 망고 주스가 나왔다. 이효리가 “망고 망고 망망고" 노래하는 광고가 나오자 사람들은 망고 주스만 마셔댔다. 세계 어디나 마찬가지겠지만 한국에서도 가장 많이 팔리는 주스는 역시 오렌지 주스다. 딱 한 해 망고 주스 판매량이 오렌지 주스를 넘어선 적이 있다. 이효리가 망고 춤을 추던 2003년이다. 광고계에서 회자하는 ‘이효리 효과'다. 얼마 전 이효리는 다시 광고를 하겠다는 글로 침체기에 접어든 광고 시장을 또 한 번 뒤흔들었다. 이 글에서 이효리 이야기를 하려는 것도 아니니 안심하시라. 다시 첫 경험 이야기로 돌아가자. 한국에서도 망고 주스를 마실 수 있게 됐지만 처음 마신 순간의 미각적 황홀함은 되살아나지 않았다. 원통하지만 그게 바로 첫 경험의 특성이다. 두 번째 경험은 절대 첫 경험을 뛰어넘을 수 없다.

인디아나 존스를 알린 1편은 <레이더스>, 그 2편인 <인디아나 존스: 마궁의 사원>은 <인디아나 존스>로 개봉했다. 2편의 해리슨 포드와 키 호이 콴(오른쪽).

내 인생 가장 황홀한 첫 경험은 모두가 생각하는 그 첫 경험과 망고 주스를 제외하자면, 극장에서 처음 영화를 본 순간일 것이다. 1985년 여름이었다. 어머니 손을 잡고 마산의 작은 극장에 <인디아나 존스>(1984)를 보러 갔다. 어머니에 따르면 내가 극장에서 처음 본 영화는 강아지가 주인공인 <벤지>(1974)다. 두뇌란 10년 전 구매한 구형 맥북과 비슷하다. 용량이 차면 옛 자료를 지우면서 버텨야 한다. <벤지>의 기억은 사라졌다. 그래서 내 기억 속 첫 영화적 경험은 <인디아나 존스>다. 나는 그 영화를 딱딱한 목제 의자에 앉아서 봤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특히 나는 인디아나 존스(해리슨 포드)라는 사내의 멋에 완전히 홀렸다. 외항선 선장이던 아버지의 잦은 부재로 인한 대체 아버지 찾기에 그가 걸려든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다. 프로이트 이론도 낡아버린 마당에 아버지 콤플렉스 같은 철학적 헛소리는 그만하는 게 낫겠다. 중요한 건 나에게 인디아나 존스라는 남자가 영화 캐릭터 이상의 거대한 존재가 됐다는 사실이다.

나는 인디아나 존스라는 사내의 멋에 완전히 홀렸다.

중요한 건 영화 캐릭터 이상의 거대한 존재가 됐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당신은 내가 얼마 전 개봉한 <인디아나 존스 : 운명의 다이얼>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5년 만의 속편이다. 이건 디즈니가 나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의 선물이었다. 40년간 사랑해 온 캐릭터를 다시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좌심실 우심방이 벌컥거렸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이쯤에서 내가 <인디아나 존스 : 운명의 다이얼>에 얼마나 실망했는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영화는 재앙이었다. 나에게만 재앙이었던 것도 아니다.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흥행에 실패해 역사상 가장 손해를 본 영화 중 한 편으로 기록될 예정이니 세계적 대재앙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오랜 팬과 새로운 팬을 극장으로 끌어들이지 못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가장 큰 문제는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이다. 영화 속 인디아나 존스는 은퇴해서 늙고 지친 꼰대다. 아들은 2차대전에서 죽었다. 1편부터 등장한 연인 마리온(카렌 알렌)은 그를 떠났다. 그를 모험에 뛰어들게 만드는 건 새로운 젊은 여성이다. 요즘 할리우드가 사력을 다해 공장 제조식으로 찍어내고 있는 ‘걸 보스’(Girl Boss) 캐릭터다. 나는 걸 보스 캐릭터를 비판할 생각은 없다. 보이 보스로 가득한 영화계에서 걸 보스 캐릭터는 더 필요하다. 문제는 이 영화가 걸 보스 캐릭터를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 인디아나 존스를 구 세대를 상징하는 뒷방 영감처럼 묘사한다는 것이다.

<인디아나 존스: 운명의 다이얼>

인디아나 존스는 할리우드가 창조한 가장 멋진 캐릭터였다. 할리우드가 꿈을 창조하는 공장이라면 그는 꿈의 가장 큰 지분을 담당하는 캐릭터 중 하나였다. <인디아나 존스: 운명의 다이얼>은 그를 완벽하게 죽여버린다. 아니다. 그가 극 중에서 죽는 건 아니다. 낡은 아파트에 혼자 사는 지나치게 현실적으로 늙고 지친 남자가 되었을 뿐이다. 사실 그건 죽음이나 다름없다. 영화적 살해다. 디즈니가 되살린 <스타워즈> 속편 주인공들도 그랬다. 한 솔로와 루크 스카이워커는 중년의 위기를 맞아 어디론가 도망친 늙고 지치고 비루한 남자들이 됐다. 새로운 <스타워즈>는 젊은 여성과 흑인 캐릭터를 내밀며 호통을 친다. 니들 영웅은 늙은 꼰대가 되었으니 새 시대의 영웅을 맞이하라고 뺨을 갈긴다. 늙은 꼰대가 된 나는 뺨을 내어줄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다. 하지만 유년기 영웅들을 이런 방식으로 처형하는 것이 즐겁지도 않다. 그들은 가상의 세계에서나마 영웅으로 남을 자격이 있다. 젊은 영웅에게 더 나은 방식으로 왕관을 물려줄 수도 있다. 요즘 할리우드는 1966년부터 1976년 사이 아시아의 어느 나라가 행했던 방식의 문화적 세대교체를 더 선호하는 모양이다.

늙은 꼰대가 된 나는 뺨을 내어줄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지만,

유년기 영웅들을 이런 방식으로 처형하는 것이 즐겁지는 않다.

맞다. 이것은 마침내 내가 누가 봐도 분명한 ‘늙은 남자'가 되었기 때문에 하는 소리일 것이다. 조만간 나는 좀 다른 늙은 남자가 되기 위해 왼쪽 팔에 문신을 하나 할 생각이다. 이 나이에 무슨 문신이냐고? 이 나이를 넘어서면 더는 못할 것 같아서다. 구체적으로는 해리슨 포드가 연기한 인디아나 존스나 한 솔로 얼굴을 새길까 한다. 내 유년기 영웅들은 스크린 위에서 초라하게 퇴장했지만 적어도 내 팔뚝에서만은 40년 전의 어느 순간에 머무르게 할 생각이다. 이 글을 읽는 어머니는 안 그래도 영화나 보느라 철들지 못한 채 늙어버린 큰아들의 등짝을 후려칠 준비를 하고 계실 것이다. 어쩌겠는가. 그건 다 아홉 살짜리 애를 데리고 <인디아나 존스>를 보러 간 어머니의 죄다. 첫 경험이 이래서 무섭다.


김도훈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