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엄 벨이 전화기를 발명해 특허를 낸 건 1876년이다. 모든 인류의 발명품이 그랬듯 전화기는 풍속과 삶의 방식을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다. 전화기는 고정된 장소에서 또 다른 장소에 있는 사람과 직접 목소리를 주고받으며 소통하는 걸 가능케 했다. 그 이전까지는 전달하는 데 수 주 또는 몇 달이 걸릴 수도 있는 편지가 주요 소통 매체였다. 전화기를 통해 시간과 공간의 거리가 좁혀진 것이다. 그로부터 백이십여 년 후, 장소가 어디든 원할 때면 언제든 소통할 수 있는 휴대전화가 발명되었다. 질 미무니 감독의 <라빠르망>(1996)은 휴대전화가 일반화되기 직전 만들어진 영화다.
휴대전화가 손에 들리기 직전의 영화
어느덧 사반세기가 흐른 지금, 이 영화에서 드러나는 소통 방식은 언뜻 고루해 보인다. 주인공들은 전화기를 이용한 다양한 방식으로 연인 혹은 친구와 소통한다. 장소도 시간도 속이기 일쑤다. 속이는 이유는 다름 아닌 사랑 때문이다. 사랑을 이루기 위해, 또는 사랑에 방해가 되는 요소를 차단하기 위해, 또 때로는 그 사랑을 기만하고 이용하기 위해 그들은 거짓말을 꾸며낸다. 이 영화에서 오로지 진실만을 말하는 인물은 없다. 그들의 거짓말엔 악의도 선의도 없다. 오로지 사랑을 지키거나, 잃어버린 사랑을 되찾으려 서로를 기만할 뿐이다.
일본 출장을 앞둔 막스(뱅상 카셀)는 잘나가는 사업가다. 그에겐 결혼을 약속한 애인 뮤리엘(상드린 키베를랭)이 있다. 출장 직전 한 카페에서 비즈니스 미팅 중 막스는 카페 안 공중전화 부스에 들른다. 안에는 한 여인이 전화를 사용 중이다. 부스의 반투명 유리 바깥으로 여인의 실루엣이 비치고 목소리가 들린다. 막스는 흠칫 놀란다. 2년 전 사귀다가 갑자기 사라진 여배우 리자(모니카 벨루치)였던 거다. 이후, 과거의 기억이 현재의 막스를 순식간에 지워버리다시피 한다.
막스는 부스를 박차고 나가는 리자를 쫓아간다. 리자는 황급히 뛰쳐나가다가 자신의 아파트 열쇠를 흘린다. 그리고 힐 뒷굽이 부러져 잠시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 카페 밖으로 달려나간다. 막스의 추적 실패. 이후 막스와 리자가 사귀던 시절의 기억들이 줄곧 인서트된다. 공연을 위해 이탈리아로 떠난 후 소식이 끊긴 리자. 그렇게 막스를 낙담케했던 리자가 불현듯 막스의 새로운 현재가 되어 버린다.
막스에겐 뤼시앵(장 필리프 에코피)이란 친구가 있다. 리자를 좇다가 우연히 둘은 조우한다. 뤼시앵은 알리스(로만느 보링거)라는 여배우와 사귀는 중이다. 2년 전 뤼시앵은 리자에게 빠진 막스를 도운 적 있다. 막스는 일본 출장을 포기하고 뤼시앵의 집에 잠시 기거한다. 애인 뮤리엘에겐 이미 일본에 도착했다는 전화를 하다가 시차를 혼동하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막스는 리자가 흘린 열쇠를 들고 리자의 집에 잠입한다. 그러다가 한 여인을 알게 된다. 리자의 집에 리자가 아닌 다른 여인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막스는 혼란에 빠진다. 그러다가 결국 그 여인과 사랑을 나누게 된다.
청춘의 밀어가 폭탄이 되던 화약고
언뜻 굉장히 혼란스러워 보이는 관계라 할 수 있다. 막스가 뮤리엘을 속인 건 일단 명백하게 드러난다. 뤼시앵과 알리스의 관계도 어딘지 불신이 가득해 보인다. 둘의 통화 내용은 한 번의 거짓말이 또 다른 거짓말을 불러들이는 일반적 패턴을 그대로 따른다. 역시 사랑을 지키기 위해, 그리하여 그 사랑이 진심임을 상대에게,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에게 설득시키기 위해 그들은 거짓말을 한다. 리자의 집인 줄 알고 숨어들어간 집에 리자가 아닌 여성이 살고 있는 걸 확인한 막스 역시 미로에 갇힌 꼴이 된다. 리자는 정말 리자가 아니었던 건가. 리자의 집에 살고 있는 이 여성과 나는 또 무슨 새로운 관계를 맺으려 하는 걸까. 뮤리엘에겐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뭐, 그런 갈등에 시달리게 되는 거다.
복잡미묘한 심리가 작용하는 애정 영화지만, 이 지점에서 영화는 기묘한 추리극 형태를 띤다. 열쇠와 구두, 자신의 장소와 행동을 숨기려 드는 통화와 스스로도 짚을 수 없는 특정 상대에 대한 마음 등이 미로의 복선으로 작용하게 되는데, 얽히고설킨 넷의 관계가 드러나는 순간이 이 영화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네 명 중 이 모든 뒤엉킨 상황을 다 파악하고 있고, 난맥상을 조장하였으며, 그로 인해 가장 큰 고통을 받게 되는 인물은 단 한 명이다. 그는 어떤 이에 대한 특별한 연심을 견딜 수 없어 다른 이를 기만하고, 기어이 자신마저 속일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거기에 동원된 물건이 바로 공중전화다.
공중전화는 이제 거의 과거의 유물로나 남은 물건이다. 길거리에서 가끔 보게 되는 공중전화 부스는 일상 필수품이 아닌, 그저 거리를 꾸미는 작은 장식품처럼 여겨질 정도다. <라빠르망>이 개봉할 당시만 해도 이렇지 않았다. 공중전화는 밤늦은 시각, 사랑에 빠져 비틀거리는 청춘들의 은밀한 속삭임이 깃든 거처였다. 때로 슬픔과 분노가 치밀어 부스를 주먹으로 내리치거나 발로 걷어차는 때도 있었다. 번화가 새벽녘의 공중전화 부스는 유리에 금이 가거나 깨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소통과 밀어를 위한 작은 공간이 외려 소통되지 않고 오해와 불신으로 폭발하는 화약고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요즘은 어떤가.
기만은 사랑의 알리바이?
휴대전화의 기능은 나날이, 상전벽해로 발전해 왔다. 거기에 SNS 및 각종 메신저 서비스가 소통의 방식을 다종다양하게 변화시켰다. 문자나 톡으로 자신의 위치와 행동을 숨기거나 거짓으로 꾸며내는 정도는 이제 일도 아니다. 사람은 악의에 가득 차 상대를 기만하기 위해서만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다. 상대를 보호하거나 알려주고 싶지 않은 사실을 감추기 위해 거짓말을 하게 되는 때도 있다. 휴대전화는 발신자 확인을 통해 언제 어떻게든 원하지 않는 얘기를 미리 걸러낼 수도 있다. 그런 식으로 상대에 대한 입장과 태도가 침묵으로 전달되기도 한다. 때론 고유한 뉘앙스와 진심의 전체적인 맥락이 누락된 문자로 오해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공중전화가 상대를 기만하는 방식은 또 다르다.
상대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연락하는 건지 공중전화는 미리 알려주지 않는다. 그렇기에 마음만 먹으면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상대가 움직이게끔 조장할 수 있다. <라빠르망>에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 주변 인물을 이용하고 상황을 조작해내는 건 모두 공중전화를 통해서이다. ‘가짜 리자’는 그렇게 탄생했다. 막스와 헤어진 ‘진짜 리자’는 어느 유명한 재력가의 정부가 되어 있는 상태. 그러다가 ‘가짜 리자’를 통해 막스가 자신을 다시 만나고자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2년 전의 마음이 리자에게 되살아난다. 뤼시앵과 알리사가 그 중간 매개 역할을 한다. 마음을 고쳐먹고 일본 출장을 떠나려던 막스에게 그 메시지가 전달된다.
막스는 갈등한다. ‘진짜 리자’는 설레는 마음으로 예전에 자주 같이 거닐던 뤽상부르 공원에 도착해 있다. 모든 기만과 엇갈림과 오해와 착각 끝에 드디어 아름다운 재회를 하게 되나 보다 싶은 기대가 보는 이마저 설레게 한다. 그렇지만 결국 막스의 선택은?
사랑, 그 엇갈림의 판타지
종국엔 생각지도 못한, 충격적인(?) 반전이 일어난다. 내용상 처음엔 납득이 잘 안 갈 수도 있다. 그러나 어쩐지 저게 맞는 행동이겠구나 싶은 설득력도 만만치 않다. 그래서 수긍하려던 찰나, 또 한 번 모든 상황을 뒤엎는 반전이 일어난다. 이때는 정말 확 뒤통수가 아려오는 느낌이다. 막스가 결국 끌어안게 되는 한 여인. 과연 막스는 그 여인을 정말 사랑하는 걸까. 아니면 사랑하려고 애쓰는 것일까. 죽도록 사랑한다고, 그렇기에 끝끝내 붙들고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 곁에 있게 된 상대가 막상 알고 보니 정작 내 사랑이 아니었다는 뜻일까. 반대로, 결코 사랑하지 않았다고 발악하듯 상대에게도 자신에게도 우기던 것이 결국엔 더 큰 사랑의 행위였다는 걸 스스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한 여인을 끌어안은 채 클로즈업된 막스의 눈빛이 여전히 뇌리에 떠도는 건 그 까닭일 거다. 그는 누군가를 사랑했지만, 누군가를 사랑하는 그 자신의 감정만이 중요했을 뿐, 상대가 누구였든 처음부터 그게 중요하진 않았던 걸 거다. 공중전화를 걸고 있는 반투명 유리막 속의 여인. 막스가 사랑한 건 바로 그 불분명한 자신의 판타지였을 지도 모를 일이다. 사랑도 결국 불완전한 사람의 일이기에, 결국 스스로를 가두는 미로 속에서 엄한 곳으로 주파수를 날리는 엇갈린 기대와 그로 인한 환멸의 내막 아니겠나.
강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