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펜하이머> 개봉을 맞아, 크리스토퍼 놀란과 IMAX 그 세번째 이야기.
<인터스텔라>(2014)에서 <테넷>(2020)까지
– 호이트 반 호이테마, 합류하다
“큰 포맷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요컨대 전 언제나 중형 카메라로 촬영하는 걸 선호했어요. 해상도뿐만 아니라 색상 표현도 아름답고, 또한 매우 근사한 얕은 피사계 심도를 만들어냅니다. 이것은 당신이 접할 수 있는 가장 깨끗하면서 질감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포맷입니다. 렌즈가 거대한 네거티브 판형에 이미지를 담는 방식 덕분이지요. IMAX 카메라를 다루는 경험은 정말이지 근사했습니다.”
- 호이트 반 호이테마(촬영감독)
“그(놀란)와 함께 영화를 만드는 것은 저에겐 진정한 의미에서의 영화 만들기를 실천할 기회입니다. 그와의 작업은 매우 실질적이며 언제나 많은 공학적인 요소를 필요로 합니다. 그것은 정말로 여러분의 마음을 무척 고전적이고 본능적인 영화 제작 방식으로 이끕니다. 그처럼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없습니다.”
- 호이트 반 호이테마(촬영감독)
<인터스텔라>(2014)를 만들 즈음에 이르면 크리스토퍼 놀란은 IMAX 촬영에 딱히 이렇다 할 원칙이나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이전 작들을 통해 IMAX 카메라의 장단점을 모두 파악하고 촬영 프로세스에 익숙해진 그는 가능한 모든 상황에서 활용방법을 찾아 그때마다 장면에 맞게 찍어보자는 생각으로 작품에 임하고자 했다. 그러던 중 난관에 부딪친 건 새로운 촬영감독의 선임이었다. <메멘토>(2000)부터 <다크 나이트 라이즈>(2012)까지 필모그래피의 모든 작품을 함께 해온 든든한 동료이자 전속 촬영감독이었던 월리 피스터가 감독 데뷔를 준비하느라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인셉션>(2010)으로 아카데미 촬영상의 영광을 안은 피스터는 연출로 진로를 틀어 <트랜센던스>(2014)의 메가폰을 쥐고 그의 곁을 떠나게 된 것이다.
이때 놀란의 탐색망에 들어온 인재가 바로 호이트 반 호이테마였다. 토마스 알프레드슨의 <렛 미 인>(2008)과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2011) 촬영 등으로 이미 다수의 영화제에서 촬영부문상을 수상하며 실력을 입증했고, 데이비드 O. 러셀의 <파이터>(2010)로 헐리우드 진출에 성공한 그는 다분히 고전적이고 품격 있는 아날로그 촬영을 선호한다는 점에서 놀란의 작품 기조에 부합하는 최적의 촬영감독 후보 중 하나였다. 피스터의 빈 자리를 대신해 평소부터 눈여겨봐두었던 그를 기용하기로 한 놀란의 결정은 발탁된 호이테마 본인에게도 큰 기회이자 자극이었다. 다수의 영화로 적잖은 관록을 쌓았지만 <인터스텔라>와 같이 규모가 크면서, 동시에 예술적인 비전을 요구하는 작품을 해보는 건 그로서도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물로 가득한 밀러의 행성을 배경으로 우주선의 내부를 찍을 때의 일. 밀실공포증이 느껴질 정도로 좁은 세트 공간 내부에서 묵직하고 거대한 IMAX 카메라를 운용할 공간을 확보하긴 어려울 것이 자명해보였다. 그러나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라는 캐치프레이즈처럼 방법은 의도치 않은 데서 나오기 마련이다. 호이테마가 나서서 직접 IMAX 카메라를 핸드헬드로 운용하자는 제안을 한 것이다. 놀란은 이전에도 IMAX 카메라의 핸드헬드를 억지로 시도하려다 실패한 경험이 있어 망설였지만, 호이테마는 무게는 걱정말고 무조건 들고 찍을 수 있다고 장담했고 실제로 거뜬히 해냈다. 달리와 크레인, 차량 부착과 스테디캠 정도로 제약되어 있던 IMAX 카메라의 활용 범위가 호이테마를 영입하면서부터 극적으로 넓어지게 되었고, 때문에 <인터스텔라>는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55분을 상회하는, 66분가량의 IMAX 촬영분을 담을 수 있게 됐다.
(해당 장면은 IMAX 촬영분임에도 예외적으로 배우들의 목소리에 대해 동시 녹음을 진행할 수 있었던 몇 안되는 장면이었다. 호이테마의 표현을 빌리자면 IMAX 카메라의 “대형 커피 그라인더를 가는 듯한 소리”를 배우들이 입은 두꺼운 우주선 의상이 적절히 차단해줘 복장 내부에 설치한 마이크에 지장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보다 뒷날의 일이지만 <테넷>(2020)의 주인공을 맡은 배우 존 데이비드 워싱턴은 인터뷰에서 헌신적으로 촬영에 임하는 호이테마의 태도에 감명받았음과 동시에, 여러 명이 들어도 버거운 IMAX 카메라를 혼자서 번쩍번쩍 들어 올릴 뿐 아니라 그 상태로 뛰어다니기까지 하는, 심지어 격렬한 격투 장면 촬영 중 꽤 힘이 실린 발차기를 맞았음에도 전혀 밀리거나 넘어지지 않고 태연히 촬영을 이어가는 호이테마의 괴력(?)을 두고 “운동선수 같다”며 감탄했다. <덩케르크>(2017)의 79분, <테넷>의 76분으로 첫 IMAX 도입작인 <다크 나이트>(2008)의 30분에 비해 비중이 확연히 늘어난 IMAX 촬영분의 비결은 곰 같은 덩치로 IMAX 카메라의 무게를 너끈히 감당하고 들쳐업은 호이테마의 황소 같은 체력이었던 셈이다.
한술 더 떠서 호이테마는 <덩케르크>에 와서는 카메라의 무게에 짓눌리면서 파도를 맞아가며, 수중에 들어가 물에 빠진 병사와 침수되는 배 내부를 찍는 위험천만한 짓을 자처했다. <인터스텔라>부터 놀란 작품에서 핸드헬드로 찍은 부분은 100% 호이테마가 손수 카메라를 잡은 분량이라 보면 정확하다. 현장에서 그 말고는 촬영 스탭 중 누구 하나 혼자 힘으로 괴물 같은 IMAX 카메라의 중량를 어깨에 짊어질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호이테마는 이러한 IMAX 카메라의 헨드헬드를 두고 ‘굉장히 직관적이고 충동적인 방법’이라 말한다. 비록 피스터는 떠났지만 대신 호이테마를 얻으면서 놀란은 경력에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된 셈이다.
“<덩케르크>는 거대한 스토리죠. 막대한 캔버스가 필요했습니다. 아주 주관적인 관점으로 이야기를 담아내서 극 중 인물의 입장에 몰입하게 만드는 것. 그게 제가 이야기를 전달하는 핵심적인 방법이 되었습니다.”
- 크리스토퍼 놀란(영화감독)
<인터스텔라>까지 성공시키면서 ‘대중적 작가’이자 흥행 보증수표인 놀란의 위상은 확고부동한 것이 되었다. 대작의 예산을 쓰면서 산업 내에서 창작의 자유를 보장받는 축복받은 감독은 그를 제외하고 꼽자면 헐리우드의 고금을 통틀어 스탠리 큐브릭이나 스티븐 스필버그 말고는 존재하지 않다시피 했다. 워너브라더스로부터 제작비에 관한 백지수표를 위임받은 것이나 진배없게 된 놀란은 <덩케르크>에 와서는 <다크 나이트> 때부터 그를 괴롭혔던 문제의 해결에 나선다. IMAX를 도입한 것 자체는 좋았지만, 큰 판형의 IMAX 65mm 필름릴을 돌리는 데서 일어나는 과도한 소음은 대사 전달이 중요한 드라마 파트까지 IMAX 포맷으로 찍을 수 없다는 기술적 제약으로 작용했고, 따라서 나머지 분량은 기존의 35mm 촬영으로 대체하는 걸로 대응해왔다.
그러다보니 IMAX 촬영분과 35mm 촬영분 간에 벌어지는 체감 해상력의 격렬한 차이로 인해 영화를 보는 도중 몰입감이 깨지는 경험을 호소하는 관객도 있던 게 사실이었다. <덩케르크>를 기점으로 놀란과 호이테마가 내놓은 대안은 35mm 대신 65mm 카메라로 이를 대체한다는 것이었다. 표준 65mm 필름이 IMAX 65mm 필름과는 3.4배의 체급 차이가 있긴 하지만, 35mm 필름과 IMAX 65mm 간의 격차는 무려 8.3배에 달한다. 본격적으로 65mm를 채택하면서 완전하지는 않지만 두 포맷 간에 변환 시 벌어진 화질의 편차를 상당히 좁히고 균일한 퀄리티를 유지함으로서 포맷 변환에 수반되는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이러한 기조는 <테넷>에 이어 근작인 <오펜하이머>(2023)에도 이어져 이 영화 또한 IMAX 65mm와 표준 65mm를 혼용해 촬영하게 된다.
놀란과 제작진의 입장에서 <덩케르크>는 IMAX 운용에 새로운 도전장이었다. 이 작품 이전에는 어느 누구도 비행기에 IMAX 카메라를 달고 찍는 건 시도해본 적이 없었다. 물론 <탑건>(1986)이나 오래전 한국영화 <빨간 마후라>(1964)처럼 35mm 카메라를 비행기 동체에 부착하고 항공전을 촬영한 사례는 널리고 널렸다. 그러나 누차 강조되었듯 IMAX 포맷은 필름부터 카메라 본체까지 기본적인 체급이 달랐고, 그것도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였던 만큼 제트기에 비해 출력이 모자란 구식 프로펠러 전투기에 기체 결함이나 비행의 불안정을 유발하지 않고 안전하게 카메라를 달아야 했다. 놀란이 끝까지 고집한 건 항공촬영에 덩케르크 철수작전 당시의 긴박한 현장감을 담겠다는 의지와 열정이었다. 고프로(GoPro)와 같은 액션캠의 1인칭 시점이 주는 현장감에 익숙한 현대 관객에게 1940년대 전투기들의 근접전인 도그파이트에 감각적으로 반응하게 하려면 파일럿과 비행기 기체의 위치에서 바라보는 시점의 숏은 반드시 필요했다.
항공업계의 자문을 받은 제작진은 협찬받은 6대의 스핏파이어 전투기 대신 야크 52 기체를 동원해, 얼핏 보면 스핏파이어처럼 보이도록 외관을 개조하고는 기체 곳곳에 마운트를 설치하기 위한 구멍을 뚫어, 거기에 IMAX 카메라를 고정한 후 날려서 찍었다. 그러나 카메라 헤드가 설치된 위치에 따라 고정된 한 방향만을 향한다는 점은 얻을 수 있는 촬영분의 다양성을 제한했다. 이에 호이테마는 손재주를 발휘해 아예 ‘미러-개그 렌즈’라는 신형 IMAX용 렌즈를 고안해냈다. 이 특수 제작 렌즈는 축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렌즈로 카메라 몸체에 부착하면 앞만을 찍는 게 아니라 회전해서 전 반경을 찍을 수 있게 한 혁신적인 장비였다. IMAX 카메라가 들어가기 어려운 협소한 비행기 공간에서도 유연한 기동과 앵글의 다양성으로 배우의 얼굴과 눈을 수월하게 찍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놀란은 호이테마를 두고 ‘공학자의 두뇌를 가진 사람’이라 평했다.
<테넷>에 와서 다시 제작진에게 떨어진 숙제는 시간의 역전과 반전을 어떻게 실사로 구현하는가였다. 엔트로피의 작용에 의해 시간이 역행한다는 설정을 시각적으로 묘사하기 위해선 벽에 박힌 총알이 다시 날아온 방향으로 돌아가는 장면의 경우처럼 피사체가 거꾸로 움직이는 장면이 필수적이었다. 인위적인 컴퓨터그래픽 없이 이를 사실적으로 구현하려면 필름을 역방향으로 돌리는, 즉 카메라를 거꾸로 작동시켜야만 했는데, 애초에 IMAX 촬영 자체가 극히 드물다 보니 영화 역사를 통틀어 이 카메라를 역방향으로 작동시켜본 전례가 아예 없었다. 이에 호이테마는 IMAX사에 기술 지원을 요청, 필름통과 카메라를 개조해 역방향 촬영 기능을 구현 가능하게 만들었고, 역방향 촬영이 끝나면 반대로 재생되는 장면을 위해 바로 정방향 촬영에 들어가는 식으로 작업을 진행했다. 상반된 촬영을 번갈아 오가다 보니 혼동이 없도록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는데, 때문에 인터뷰에서 호이테마는 “지금까지 참여한 영화 중 <테넷>이 가장 복잡했다”고 혀를 내둘렀다.
(여담이지만 <테넷>의 촬영은 본의 아니게 다른 영화에 민폐를 끼치게 되었는데, 캐리 후쿠나가의 <007 노 타임 투 다이>(2021)가 바로 그 피해의 대상이었다. 전 세계에 운용 가능한 IMAX 필름 카메라가 단 6대 뿐인데 마침 두 영화의 촬영 기간 상당수가 겹친 상황에서 IMAX사는 <테넷>의 촬영에 카메라를 집중적으로 몰아주었다. 때문에 <007 노 타임 투 다이>의 IMAX 촬영분은 도입부 포함해 표준 65mm 촬영분과 혼용된 채 초반부에 집중되어있다. 그도 그럴 법한 것이 IMAX사의 입장에서는 다큐멘터리나 어트랙션 영상용로만 쓰이던 IMAX 포맷에 영화 제작이라는 새로운 시장성을 열어준 장본인인 만큼, IMAX 카메라의 사용에 있어선 항상 놀란이 최우선권을 쥐고 있다고 한다.)
이번 작품인 <오펜하이머>에서도 IMAX 시네마의 가능성을 개척하고 확장하는 놀란의 여정은 계속된다. 이 영화는 사상 처음으로 흑백 IMAX 필름과 흑백 65mm를 새로 개발해서 촬영한 작품이라고 한다. <다크 나이트>(2008)로 포문을 연 이래, 현대 IMAX 시네마의 역사는 곧 놀란의 필모그래피와 고스란히 겹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날로그, 디지털 막론하고 현존 최고의 퀄리티를 자랑하는 이 영상포맷의 주도권을 거머쥔 그가 앞으로 어떠한 미학적 도전으로 새로운 경지를 열어갈지 기대해보게 된다.
현대 IMAX 시네마의 역사는 곧 크리스토퍼 놀란의 필모그래피와 고스란히 겹친다.
조재휘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