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스틸러(scene stealer). 장면을 훔친 사람. 즉, 강렬한 연기로 관객들의 시선을 훔쳐버린 조연급 배우를 일컫는 말이다. 요즘 신 스틸러 의미에 가장 잘 부합하는 배우는 누굴까. 최근 화제작마다 등장해 연기 스펙트럼의 양극단을 거침없이 넘나드는 배우 '황정민'이 퍼뜩 떠오른다. 잠깐, 당신이 생각하는 그 유명 남자 배우가 아니다. 대학로 등지에서 "배우 황정민"이라고 하면 "남자 황정민? 아니면 여자 황정민?"이라는 반문이 돌아올 정도로 상당한 인지도 자랑하는 그 황정민(女)이다.
황정민은 작년과 올해 <천원짜리 변호사>, <D.P. 시즌 2>, <무빙> 등 무려 10편에 달하는 드라마에 출연해 뇌리에 박히는 에피소드를 만들어내더니, 영화 <다음 소희>, <비닐하우스>에서는 각각 '장학사', '치료모임 사회자'로 분해 짧지만 임팩트 있는 연기를 보여줬다. 등장만으로 극에 긴장감과 생생함을 부여하는 황정민의 얼굴들. 다양한 작품 속 그녀의 '신 스틸' 역할을 모아봤다.
<지구를 지켜라!>(2003) '순이'역
사실상의 영화 데뷔작인 <지구를 지켜라!>에서 병구(신하균)의 여자친구 순이를 연기했을 당시 황정민은 대학로 연기생활 10년 차 베테랑 배우였다. 1998년에는 백상예술대상과 동아연극상에서 신인상을, 2000년에는 백상 연기상을 수상했던, 연출자 오태석이 각별히 아끼는 극단 목화의 간판스타였던 황정민의 성공적 영화 데뷔는 필연이었다.
시대 고발과 코미디의 절묘한 조합, 치밀한 시나리오,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까지. '시대를 앞서간 명작' <지구를 지켜라!>에서 황정민은 병구(신하균)를 남몰래 좋아하는 서커스단 출신의 순이를 연기한다. 처음 황정민의 순이를 만났을 때 순이의 어눌한 말투와 순수한 눈빛이 엉뚱해 피식 웃음이 났다. 영화를 두 번 봤을 땐, 순이가 병구의 유일한 인간관계라 울컥했고, 병구를 구하기 위해 총든 형사의 목을 다리로 조르는 그녀의 텀블링이 왠지 모르게 처연했다. 만식(백윤식)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는 순이의 최후는 허무해서 잊히지 않는다. 황정민은 <지구를 지켜라!>로 춘사영화제 신인여우상과 부에노스아이레스 국제독립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돈의 맛>(2012) '노비서'역
재벌가의 비서로 들어간 한 남자가 재벌들의 추악한 행태를 목격하면서 돈에 물들어 가는 과정을 그린 <돈의 맛>에서 황정민은 재벌가 백 씨 집안의 실세 백금옥(윤여정) 여사의 부친 왕회장의 비서 '노비서'로 분한다. 철저하게 가진 자에게 기생하고 스스럼없이 "이 맛(돈맛)에 이 짓 하는 거야."라고 이죽대는 황정민의 연기는 우리 안의 '하녀·하인 본능'을 제대로 표현해 냈다. 특히 수영장에 떠 있는 왕회장을 보필하는 그의 모습은 그로테스크한 감흥을 전해주는 영화 속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 <돈의 맛>의 전작인 임상수 감독의 <하녀>에서 황정민은 전도연의 친구 '은이'로 얼굴을 비추기도 했다.
<카트>(2014) '옥순'역
어느 날 갑자기 계약 해지 통보를 받은 대형할인점 더마트(The Mart)의 비정규직 계산원들. 노동조합을 만들고 회사와 협상을 시도하지만 실패하자 파업을 벌여 복직 투쟁을 벌인다.
2007년 이랜드그룹의 홈에버 비정규직 노동자 대량 해고 사태가 배경인 영화 <카트>에서 황정민은 '옥순'으로 분한다. 염정아, 문정희, 도경수, 천우희, 이정은 등 지금 보니 미친 캐스팅 자랑하는 영화에서 황정민은 법이나 권리에는 조금 무지하지만 사람 좋은 옥순으로 분해 영화의 중심을 잡는다. 카트를 밀어 물 대포에 맞서는 처절함이 몽글하고 연대의 팔짱이 뭉클하다. 주류영화계에서 처음으로 '비정규직 노동자' 이야기를 다룬 작품.
<사바하>(2019) '심권사' 역
신흥 종교 비리를 찾아내는 종교문제연구소 ‘박목사’(이정재)는 사슴동산이라는 새로운 종교 단체를 조사 중이다. 영월 터널에서 여중생이 사체로 발견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를 쫓던 경찰과 우연히 사슴동산에서 마주친 박목사는 이번 건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다.
오컬트 영화의 음산한 분위기와 미스터리한 존재의 비밀, 그리고 인간의 추악한 욕심이 얽힌 이야기가 무겁지만은 않은 건 황정민 덕이다. ‘박목사’가 운영하는 종교문제연구소의 ‘심권사’ 역을 맡은 황정민은 사무소의 난방비를 걱정하는 생활 연기, 스님에게 수줍게 사심을 전달하는 연기 등으로 극의 활기를 더했다.
<신성한, 이혼> (2023) '애란' 역
지난 4월 종영한 드라마 <신성한, 이혼>은 변호사 성한(조승우)이 다양한 이혼 의뢰를 맡게 되면서 매 회 새로운 캐릭터가 등장했는데, 그중 3, 4회를 장식한 황정민의 연기는 단연 눈에 띈다. 시어머니의 모진 멸시와 폭언을 견뎌가며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시어머니의 폭력이 자식들에게까지 이어지자 이혼을 결심한 애란. 황정민은 피로에 찌든 표정, 말린 어깨, 소심한 목소리로 이혼을 결심한 캐릭터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남편에게 쌓인 감정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원망과 울분을 쏟아내는 장면, 가족과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고 눈물을 쏟아 내는 신 또한 그녀의 연기 내공을 보여준다.
<D.P.2>(2023) '루리 엄마' 역
황정민은 <D.P.2>에서 군대 내 가혹행위를 견디지 못해 총기를 난사하고 무장 탈영한 김루리(문상훈)의 엄마로 분해 놀라운 연기를 선보였다. 피의자와 피해자가 모호한 상황에서 자신의 아들이 죽인 이의 부모와 대면해 '루리를 그렇게 만든 게 누구냐'라고 절규하는 모습, 삶을 포기하려는 아들의 손을 잡으며 '루리야 괜찮아'라고 토닥이는 장면은 절대적인 선과 악은 없다는, <D.P.2>가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를 100% 연기로 풀어낸 최고의 장면!
<무빙>(2023) '정육점 사장' 역
황정민은 최근 드라마 <무빙>에서 정육점 사장으로 등장하며 잔잔한 울림을 줬다. 아들의 비행 능력이 발각됐을 때 겪을 상황이 두려워 전전긍긍하는 미현(한효주)에게 건네는 그녀만의 투박한 위로는 보는 이들의 마음까지 울린다. 남들과 다른 특별한 자식을 기른다는 공통점을 지녔지만 미현과는 다르게 쾌활하고 거침없는 정육점의 그녀. 잠깐의 등장으로 장면을 훔쳐버렸다!
문화기획자 하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