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바다, 부산에서 다시 한번 축제가 열린다. 올해로 28번째를 맞이한 부산국제영화제(BIFF)가 오는 10월 4일부터 13일까지 개최된다. 지난 9월 22일 일반 예매를 시작했는데, 대부분 작품이 매진될 정도로 심상치 않은 열기를 보여주는 중이다. 영화제 시작 전부터 이사장과 집행위원장이 사임하는 위기가 있었지만, 적어도 BIFF를 기다리는 영화팬들의 애정은 변치 않은 듯하다. BIFF에서는 이점을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더 나은 영화제를 위한 반성과 혁신의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어쨌든 부산국제영화제의 최대 덕목은 국내외 영화들을 한자리에서 만나는 점이다. 이 중에는 해외 유수영화제에서 화제를 낳은 기대작부터 거장들의 신작 등 유명 작품들도 있지만,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해도 탄탄한 내공을 지닌 작품도 숨어있다. 영화제의 매력은 이 같은 보물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실제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된 후 입소문을 불러일으키며 비평과 흥행 모두를 잡은 영화도 꽤 많다. 9년 전 영화의전당 야외상영관에서 공개한 '그 영화'도 이랬다. 지금은 이름만으로도 영화팬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데미이언 셔젤의 장편 데뷔작 <위플래쉬>다.
당시에는 무명, 하지만 프로그래머가 강추했던 ‘위플래쉬’
<위플래쉬>는 일류 드러머를 꿈꾸며 명문 음악학교에 들어간 앤드류(마일스 텔러)가 최고의 지휘자이지만 최악의 폭군인 플래처 교수(J. K. 시몬스)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멘토-멘티의 흔한 이야기를 다룬 듯 보였지만, 실제 영화는 웬만한 스릴러 못지않은 긴장감으로 전쟁 같은 연주를 보여준다. 마치 악마를 만나 진화한 괴물의 성장담 같다.
이 작품은 2014년 19회 부산국제영화제 오픈시네마에서 공개되었다. 오픈시네마는 영화제 영화는 어렵다는 진입장벽을 낮추고자, 대중적인 재미를 갖춘 작품을 영화의전당 야외극장에서 상영하는 프로그램이다. 그야말로 영화제의 낭만과 즐거움을 동시에 느끼게 해준다. 하지만 <위플래쉬>는 부산국제영화제 상영 당시 많은 사람들이 주목한 영화는 아니었다. 부산에 오기 전 선댄스와 칸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당시 무명이었던 신인 감독 작품에 관심은 둔 이들은 적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을 보고 싶게 한 당시 영화제 소개가 아직도 기억난다. “지금은 그리 유명한 작품은 아니지만 상영 후 분명 엄청난 반응을 일으킬 것이다.” 결국 그 말을 믿고 간 많은 이들은 당시 영화제를 영원히 기억할 보물을 발굴했을 것이다.
<위플래쉬>의 이후 행보는 모두가 알다시피 대단했다. 연말 북미 현지에서 개봉해 의미 있는 성적을 기록했다. 비평가들의 찬사는 끊이지 않았고, 여러 시상식에서 갖가지 트로피를 석권했다. 하이라이트는 이듬해 열린 오스카 시상식. 작품상, 남우조연상, 편집상, 음향상, 각색상 등 오스카의 메인 부문에 노미네이트되며 전설을 계속 써 내려갔다. 극중 플래처 교수를 맡은 J. K. 시몬스는 자신의 연기 인생 최초로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쥔다.
흥행도 대박을 터트렸다. <위플래쉬>는 전 세계적으로 약 5,000만 달러를 벌었는데, 제작비 대비 10배 이상의 수익이다. 국내에서도 그 열기를 계속 이어갔다. 2015년 3월에 개봉한 영화는 상당한 입소문을 거두며 개봉 2주 차에 주말 박스오피스 1위를 석권한다. 이 작품은 당시 다양성 영화로 등록되었는데, 전국 관객 158만 관객을 기록하며 외화 독립영화로는 이례적인 성공을 거뒀다.
<위플래쉬>가 영화의전당을 떠들썩하게 한 이유는?
그렇다면 <위플래쉬>의 어떤 점이 9년 전 영화의전당을 열광의 도가니에 빠뜨리게 했을까?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 작품은 더 나은 실력자가 되려는 제자와 그를 가르치는 스승의 이야기다. 이미 많은 영화에서 다룬 사제 케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영화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기존의 패턴과 완전히 다르다. 이곳에는 상대의 가르침을 믿고 묵묵히 따라가는 멘티나, 그를 보살피고 위로하는 멘토는 없다. 엄청난 재능을 가졌지만 부족한 자신감 때문에 위축된 괴물과 그 안에 든 야수성을 꺼내기 위해 채찍질만 휘두르는 악마만 있을 뿐이다. 둘이 수업하는 장면은 그 자체로 스릴러고 액션이었다. 무언가 터질 것 같은 그 긴장감이 영화 내내 계속되어 오감을 집중시켰다.
여기에는 마일즈 텔러와 J. K. 시몬스의 열연이 있었기에 가능하다. 플래처를 만나 성장하다 못해 미쳐가는(?) 앤드류의 마음을 마일즈 텔러는 치열하게 표현했다. 후반부로 갈수록 온순한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살기와 집착만 있는 그의 모습은 섬뜩할 정도다. 오스카가 인정한 J. K. 시몬스의 연기는 그 자체로 “앵콜”을 이끌어낸다. 앤드류를 극한까지 내몰리게 하면서도, 아드레날린 가득한 가르침은 이 작품을 온전히 플래처 교수의 손아귀에서 갖고 놀게 만든다.
음악 연주가 메인인 점도 야외상영관의 분위기와 잘 맞았다. 영화 내내 계속되는 강렬한 드럼 사운드는 두 주인공의 관계를 빼고서도 흥미로웠다. 본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위플래쉬’(Whiplash)를 비롯해 후반부의 ‘카라반’(Caravan)의 멜로디 역시 인상적이다. 대부분 연주 관련 영화는 음악의 심미성과 감성에만 몰두한다. 하지만 <위플래쉬>는 하나의 하모니를 위해 얼마나 많은 음악가들이 노력하고, 고생하는지를 생생하게 전한다. 그래서일까? <위플래쉬>의 연주는 스포츠 같은 느낌이 많이 든다. 앤드류와 플래처의 합주는 조화보다 대결에 가까웠고, 연주가 끝날 때 예술적인 감동보다 통쾌함과 뭔가 모를 승리의 기쁨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것을 다 떠나 후반부 클라이맥스는 영화관을 한순간에 콘서트홀로 바꾼다. 앤드류와 플래처의 극한 대립과 갈등에서 빚어지는 연주는 아이러니하게도 완벽하고 황홀했다. <위플래쉬>의 이미지가 이런 식이다. 괴물과 악마, 압박과 성장, 불협 화음 속에 빚어지는 최고의 시너지, 이질감 가득한 분위기에서 눈과 귀는 최상의 예술적 성취를 느낀다.
올해 BIFF에서 또 다른 <위플래쉬>를 만날 수 있을까?
장황하게 리뷰를 적었지만 에디터는 아쉽게도 <위플래쉬>를 영화제 현장에서 보지 못했다. 표까지 다 끊었지만 당일에 피치 못할 사정으로 돌아섰다. 하지만 영화를 상영했던 야외극장 바로 옆에 있었는데, 작품의 엄청난 사운드와 별개로 관객의 함성 소리가 계속해서 들렸다. 특히 모든 상영이 끝난 뒤 울려 퍼진 박수소리는 영화를 관람하지 못했음에도 마음이 벅찰 정도였다. 당일 이 작품을 본 지인들의 카톡 프로필 사진은 모두 <위플래쉬> 포스터로 바뀌었다. 영화제를 해마다 가지만 이 작품을 코앞에서 놓친 것이 아직도 한이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도 제2의 <위플래쉬>를 꿈꾸며 다양한 영화들이 상영된다. 이미 명성이 자자한 인기작들은 매진되었지만, 숨은 보물 같은 작품들은 여전히 관객의 손길을 기다리는 중이다. 큰 기대 없이 극장 문에 들어갔는데 인생작을 만난 환희와 감동의 순간은 어떤 말로도 표현이 안된다. 아마 9년 전 영화의전당 야외극장에서 <위플래쉬>를 본 사람들이 그랬을 듯하다. 그런 두근거림을 안고 부산으로 갈 많은 분들을 응원해본다. 이번 영화의 바다에서 월척하나 제대로 건지시길.
테일러콘텐츠 에디터 홍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