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아이덴티티> 메인 예고편

M. 나이트 샤말란이 돌아왔다. <식스 센스>로 일약 반전의 기수로 우뚝 서며 전 세계를 강타했던 바로 그가! <언브레이커블><싸인>, <빌리지>까지는 나쁘지 않았다. <레이디 인 더 워터>부터 비평적, 흥행적 타격을 입고 삐걱거리기 시작하더니, <해프닝>의 그럭저럭 선방을 거쳐 1억불이 넘어가는 두 편의 블록버스터 <라스트 에어벤더><애프터 어스>의 실패로 대차게 말아먹고 샤말란은 장렬히 산화하고 말았다. 평론가들과 틀어지며 구설수에 오른 것도 독이 되었다. TV로 쫓기듯 무대를 옮겨 SF 미스터리 시리즈 <웨이워드 파인즈>를 성공적으로 런칭시켰지만, 그에게 극영화 복귀는 시기상조처럼 느껴졌다.
 

샤말란의 역공,
<더 비지트>와 <23 아이덴티티>

그런 위기 상황에서 샤말란이 들고 나온 건 5백만 불짜리 저예산 파운드 푸티지 형식의 '깜찍한' 호러 <더 비지트>였다. 스타라곤 눈 씻고 찾아보려야 볼 수 없고, 예전의 큰 예산과 고급진 프로덕션도 사라진 - 날것의 파닥거리는 신선한 아이디어와 그의 주특기인 반전 그리고 좋은 연출력으로 중무장한 - 그 나름의 승부수인 셈이었다. 샤말란의 도박은 적중했다. <더 비지트>는 북미에서만 제작비의 13배가 넘는 65백만 달러의 흥행 수익을 올렸고, 전 세계적으론 1억불에 육박하는 슬리퍼 히트를 기록하며 샤말란의 화려한 재기를 알렸다. 욕심을 내려놓고 초심으로 돌아온 게 신의 한수였다.
 

이 기세를 몰아 쉬지 않고 샤말란이 새롭게 선보이는 2017년 신작 <23 아이덴티티>9백만불의 저예산 장르 영화다. 젊은 '프로페서 X' 제임스 맥어보이를 앞세웠지만 그 외 출연진은 신예와 무명들로 채워진 이 작품은 무려 3주간 박스오피스 1위를 질주하며 북미에서만 12000만불에 육박하며 대성공을 기록 중이다. 위기의 순간,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이야기와 장르로 돌아와 관객들을 흥분시키고 짜릿하게 만드는 그의 각본 솜씨는 여전히 녹슬지 않았다. <식스 센스>의 놀랄만한 성공으로 차기작인 <언브레이커블>에서 웬만한 스타 몸값에 해당하는 500만 달러의 각본료를 챙겼던 샤말란의 글발은 과연 허명이 아니었다.
 

바꿔, 바꿔, 모든 걸 다 바꿔, 음악까지도.
웨스트 딜런 서드슨

절치부심한 샤말란이 바뀐 건 예산이나 규모뿐만이 아니었다. 바로 음악에서도 <식스 센스> 이후 자신의 분신처럼 등용하고 서명처럼 명징하게 남았던 할리우드 1급 작곡가 제임스 뉴턴 하워드(이하 JNH)의 존재도 바람처럼 사라졌다. 파운드 푸티지 형식의 <더 비지트>는 영화 장르적 특성상 음악이 전면으로 드러날 수 없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이번 <23 아이덴티티>에서도 샤말란은 경력이 그리 많지 않은 작곡가 웨스트 딜런 서드슨을 전격적으로 등용했다. 그는 어둡고 고독한 사운드를 바탕으로 실험적인 곡들을 펼쳐 보인 독특한 감성의 밴드 '어 위스퍼 인 더 노이즈'의 리더로, 최근 영화음악에도 손을 대기 시작한 신예 작곡가다.

샤말란은 서드슨이 음악을 맡은 TV 다큐 시리즈 <더 징크스: 로버트 더스트의 삶과 죽음>을 보고 그를 기용했다고 밝혔지만, 사실 그들의 인연은 조금 더 오래되었다. 바야흐로 샤말란이 3연속 성공을 거두고 있다가 된통 뒤통수를 맡게 되는 <레이디 인 더 워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밥 딜런의 노래 The Times They are A-changin' 리메이크 한 위스퍼 인 더 노이즈의 버전을 맘에 들어해 작품에 삽입했던 것이다. 당시 서드슨은 아직 영화음악 작곡가로 활동하지 않던 시기였지만, 그때부터 그의 음악을 눈여겨봤던 건지도 모른다. 이런 특별한 인연으로 맺어지긴 했지만 내심 JNH와 해후를 기다렸던 팬들에게 다소 생소한 서드슨의 발탁은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샤말란의 탁월한 음악 동지
'제임스 뉴턴 하워드'(JNH)
제임스 뉴턴 하워드

클래식을 전공했으면서 베트 미들러나 엘튼 존 등과 같은 팝스타들의 키보디스트를 맡으며 오케스트레이터로도 활약했던 JNH80년대 중반 영화음악에 들어서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대규모 오케스트라에 풀 코러스를 대동한 전통적인 방식에서부터 일렉트릭하고 팝적인 접근까지 커버하는 팔색조 같은 변신 능력에, 아름다운 멜로디를 구사할 수 있는 천부적인 감각, 거기에 드라마틱한 구조와 서사를 갖춘 채 다작까지 해내는 JNH의 솜씨는 현재 할리우드 영화음악의 진정한 장인이라 칭송할 만하다. 올해로 85세를 맞은 존 윌리엄스는 너무 늙었고, 그 뒤를 이을 거라 봤던 제임스 호너는 급작스런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JNH는 그들의 계승자이자 대안으로 가장 먼저 언급될 영화음악가로 우뚝 섰다. 그리고 그 정수가 바로 샤말란과의 일련의 협업들이었다.

출처 scoringsessions.com

그들이 함께한 여덟 편의 작품들은 마치 전성기 때의 알프레드 히치콕과 버나드 허만과의 파트너십을 연상케 한다. 샤말란과 JNH가 추구했던 장르도 그렇거니와, 스타일이나 완성도 면에서도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방식의 할리우드 작법을 구사해서 보는 재미 못지않게 듣는 재미도 쏠쏠히 안겨주었다. 그 시발점이었던 <식스 센스>에서부터 고풍적인 풍취를 선사하는 <빌리지>나 여러 군상들의 소동극 느낌이 담긴 <레이디 인 더 워터>, 재난물을 형식을 빌려 온 <해프닝>까지 모두 이런 경향과 색채를 엿볼 수 있으며, <싸인>의 경우 노골적인 허먼에 대한 오마주를 보이며 신경질적이고 강렬한 스트링의 보잉과 질주하는 브라스의 멋진 조화를 자기 스타일로 되살려놓기도 했다.

<라스트 에어벤더>, <애프터 어스> 사운드트랙


물론 허만과 달리 JNH는 바이올리니스트 힐러리 한이나 첼리스트 마야 베이저 등 유명 솔로이스트들을 기용해 탁월한 테마를 부여하고, 그들의 정서와 테크닉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또 블록버스터였던 <라스트 에어벤더><애프터 어스>에선 앞선 초기작들과 달리 JNH 특유의 스타일과 호쾌하고 장엄한 스케일을 펼쳐 보이며 차별점을 주기도 했다. 이 작품들은 모두 참담한 혹평을 면치 못했지만, 샤말란의 영화와 달리 JNH의 음악만큼은 인정받으며 이후 비슷한 색채들의 대작인 <헌츠맨> 시리즈나 <헝거 게임> 시리즈 그리고 해리포터의 외전인 <신비한 동물 사전> 시리즈 등의 음악을 담당하게 되는 밑바탕이 되었다.
 

스코어가 거의 없던 <더 비지트>의 도전

단순한 스케줄상의 충돌 문제인지, 아님 저예산이란 규모에 JNH의 몸값이 맞질 않아 포기한 건지, JNH가 샤말란의 신작에 합류하지 않았는지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이런 원인들을 차치하더라도 샤말란의 재기작들에서 음악이 구사되는 방식은 이전에 비해 확연하게 달라졌다. 그건 아마도 철저한 실패 후 샤말란이 겪고 느낀 변화처럼 다가온다. 그가 만든 작품들 중 유일하게 오리지널 스코어가 거의 쓰이지 않은 <더 비지트>의 경우, 다양한 삽입곡들과 남동생의 어설프면서도 유쾌한 래핑으로 적재적소에 기발한 유머와 탁월한 효과를 이끌어내고 있는데, ‘웃기고 무서운영화의 이중적인 특징을 잘 캐치해낸 영리한 선곡들이 눈에 띈다.

먼저 엔드 크레딧에 흐르는 해리 리벨의 포제션은 최초의 전자악기 테레민으로 연주한 라운지 음악으로, 테레민의 섬뜩하면서 기묘한 음색이 아름답고 낭만적인 스타일과 어우러지며 독특한 질감을 선사한다. 영화의 느낌을 찬찬히 곱씹기에 좋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모킹 버드 요들이나 더 쓰리 와이즈맨그리고 엔리코 카루소가 부른 나는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남몰래 흐르는 눈물도 아주 의미심장하게 배치된 노래들이다. 웃기면서도 무서운 영화의 컨셉에 딱 맞게 흘러나와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에필로그의 엄마 인터뷰에선 딱 한번 오리지널 큐가 쓰였는데, 중견 작곡가 폴 칸텔론이 만든 유일무이한 <더 비지트>의 테마곡이다. 피아노 솔로로 잔잔하게 흐르는 곡이라 사실 눈치 채긴 쉽진 않다.
 

그리고 <23 아이덴티티>...

웨스트 딜런 서드슨의 <23 아이덴티티>는 그간 샤말란 영화에서는 보기 드물게 - <언브레이커블> 이후로는 거의 처음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일렉 사운드의 비중 큰 스코어를 들려준다. 마침 이 작품은 흥미롭게도 <언브레이커블>의 세계관과 공유된다고 밝혀졌고, 샤말란도 공공연하게 차기작으로 <언브레이커블>의 속편을 원하는 터라, 여러모로 비교할 부분들이 눈에 띈다. 히어로의 탄생에 대한 샤말란 식의 도시 설화에 맞춰 JNH가 작곡한 스코어는 기본의 영웅찬가들의 팡파레와 달리, 인간적인 두려움과 고요한 흥분을 동시에 간직한 안티히어로익한 사운드를 들려주고 있다. 반면 <23 아이덴티티>의 스코어는 그 반대 지점을 포착한다.

주로 다큐멘터리와 인디 영화의 작곡가로 경력을 쌓아온 서드슨의 음악은 특정 멜로디나 좋은 테마에 집착하지 않고, 분위기로 상황을 묘사해가며 감정과 드라마를 과장되지 않게 그려나간다. 피아노와 스트링 위주의 단출한 편성에다 노이즈나 앰비언트를 결합해 시종일관 우중충하고 우울한 잿빛의 소리들을 들려준다. 그 사이를 뚫고 살짝살짝 어쿠스틱 사운드들이 드러나며 다중 인격 속에 남은 일말의 인간성과 온기를 표출하지만 아주 잠깐이고, 대체적으로 공격적이고 투박하며 거칠고 강렬한 사운드 디자인이 먼저 청각을 자극한다. 불쾌하고 듣기 힘든, 영화에 최적화된 소리들이고, 아주 기능적인 스코어다.
 

샤말란의 차기작 음악은 과연 누가?

샤말란은 차기작으로 과연 <언브레이커블> 속편을 제작할 수 있을까. 아니면 화려한 재기의 신호를 알린 블룸하우스에서 또 이런 류의 저예산 작품들로 성공의 신화를 이어나갈까. 무엇이 되었건 샤말란은 그간의 방식에서 벗어나 이번 작품들로 더 다양하고 새로운 방식과 시도에 대해 눈을 떴다. 자신의 인장과도 같았던 제임스 뉴턴 하워드의 음악 너머, 그 이상의 소리들을 품을 준비가 된 듯하다. 차기작은 그래서 누가 작곡가로 결정되어도 더 이상 놀라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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