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은 흉폭했던 1980년대 한국 사회상을 담은 영화들의 마무리처럼 보입니다. 무수한 고통을 딛고 끝내 민주화를 이룩한 시민들의 외침은 불과 얼마 전의 일과도 겹칩니다. <1987>에 이르기까지 영화로 만들어진 1980년대의 주요 사건들과 그를 소재 삼은 한국영화들의 면면을 살폈습니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피격 당해 사망하고, 1979년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나 신군부 세력이 국정을 장악합니다. 12.12 군사반란을 주도한 군부 내 사조직 하나회의 중심엔 전두환과 노태우가 있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2005)은 박정희 살해 당일의 24시간을 긴박한 무드의 블랙코미디로 묘사합니다. 10.26 사건의 현장을 여과 없이 그리되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를 모델로 한 '주 과장'(한석규), 안가에 불려 다녔던 대학생 신재순을 모델로 한 '여대생 조씨'(조은지) 등 사건과 연관된 인물들의 상황과 심리를 상세히 그렸습니다.

그때 그사람들

감독 임상수

출연 한석규, 백윤식

개봉 2004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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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18일엔 신군부의 정권 장악에 반대하는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고 전두환 정권은 시민들을 폭도로 취급하며 무장 군인을 투입해 무자비한 진압을 시도했습니다. 열흘째인 5월27일 계엄군의 기습 무력 진압으로 민주화 운동은 끝이 납니다.

<꽃잎>(1996)은 미쳐버린 소녀(이정현)의 자취를 빌려 1980 5월 광주의 끔찍한 기억을 소환합니다. 영화는 소녀를 "무서워하지도 말고, 무섭게 하지도 말자"고, "그저 관심 있게 봐주기만 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안쓰럽고 가련한, 우리 곁에 숨죽이고 있는 소녀는 곧 광주의 기억입니다.

꽃잎

감독 장선우

출연 이정현, 문성근, 이영란, 추상미, 설경구

개봉 1996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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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사탕>(2000)20년을 역으로 거슬러 오르며 영호(설경구)의 삶과 선택의 순간을 보여줍니다. 불행한 현재가 있기까지 과거의 영호가 어떤 삶을 밟아왔는지 되짚습니다. 과거를 돌이키는가 싶더니 채 아물지 않은 광주의 상처를 헤집고, 그것이 개인사에 어떤 영향으로 자리했는가를 묻습니다.

박하사탕

감독 이창동

출연 설경구, 문소리, 김여진

개봉 1999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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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의 소설을 원작 삼은 <오래된 정원>(2007)은 군부 독재에 맞서다 17년을 교도소에서 보낸 한 남자의 사랑의 기억을 통해 우회적으로 1980년 그날의 트라우마에 관해 성찰합니다. 세련된 멜로드라마의 형식을 따랐지만 광주민주화운동의 그림자는 묵직하게 한 사람의 인생을 짓누릅니다. 영화는 해묵은 상처를 딛고 현재의 삶을 회복할 것을 권하며 그날의 무게를 견뎌온 자들을 위로합니다.

오래된 정원

감독 임상수

출연 염정아, 지진희

개봉 2007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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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휴가>(2007)는 광주에 사는 택시기사 민우(김상경)와 간호사 신애(이요원)의 일상을 파고든 계엄군의 무자비한 폭행에 주목했습니다. 민우와 신애를 비롯해 평범히 살아가던 광주의 시민들은 작전명 '화려한 휴가'로 촉발된 무참한 학살에 휘말려 생존과 존엄을 부르짖게 됩니다. 소재를 적극 활용하려 했으나 결국 전형적인 캐릭터 구성, 회피적인 결말에 머무른 점이 아쉽기도 했습니다.

화려한 휴가

감독 김지훈

출연 김상경, 안성기, 이요원, 이준기

개봉 2007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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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012)은 광주민주화운동으로부터 26년 뒤인 2006년을 배경으로 합니다. 고통스러운 과거가 화사한 애니메이션으로 소개되고, 영화는 2006년의 현재에 집중합니다.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의 2세들이 모여 학살의 주범인 '그 사람'(장광)의 살해를 모의합니다. 학살의 간접 희생자들이 구체적인 사적 복수를 도모했다는 이야기가 독특합니다. 실화와 강풀 작가의 원작 웹툰에 힘입은 바가 큽니다.

26년

감독 조근현

출연 진구, 한혜진, 임슬옹

개봉 2012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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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운전사>(2017)는 빈궁한 자신의 삶 외에 어떤 것도 돌아보지 않던 소심한 택시기사 만섭(송강호)이 외신기자 힌츠페터(토마스 크레취만)를 광주에 데려다주면서 광주의 참상을 목도하고는 목숨을 걸고 함께 그곳을 빠져나오는 과정을 그립니다. 현실을 알지 못했던 수많은 국민을 대신하는 인물인 만섭은 기꺼이 광주에 연대의 손길을 내밉니다.

택시운전사

감독 장훈

출연 송강호, 토마스 크레취만, 유해진, 류준열

개봉 2017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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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9월, 부산 지역에서 사회과학 독서모임을 하던 학생, 교사, 회사원 등 22명이 영장 없이 체포되어 불법적으로 감금된 뒤 구타와 고문을 당했습니다. 시민들의 모임은 정부 전복을 꾀하는 반국가단체의 이적 행위로 취급돼 국가보안법, 계엄법, 집시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회부된 바 있습니다. 이른바 부림사건. 피해자들은 2014년에 이르러서야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고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모티프를 얻어 극화한 <변호인>(2013)은 세속적인 이유로 변호사가 되어 성실히 일에만 전념하던 송우석(송강호)이 국가보안법과 연관된 시국사건을 맡아 사회의 진보에 관해 각성하는 과정을 다뤘습니다. 이념에 좌우되어서가 아닌, 그저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싸운다는 점이 인상 깊습니다.

변호인

감독 양우석

출연 송강호, 김영애, 오달수, 곽도원, 임시완

개봉 2013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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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9월, 당시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의장이던 고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서울대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으로 체포되었습니다.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22일간 고문기술자 이근안으로부터 물고문, 전기고문 등을 받았고, 고문 후유증으로 파킨슨병, 뇌정맥혈전증을 앓았습니다. 참여정부 시절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임명돼 일했고, 지난 2011년 작고하였습니다.

<남영동1985>(2012)는 고 김근태 의원의 수기 <남영동>을 바탕으로 합니다. 김 의원이 직접 겪은 일을 사실 그대로 전달하고 있지만, "고문이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불행이었다는 점을 상기시키기 위해" 정지영 감독은 김 의원을 김종태(박원상)라는 가상의 인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영화는 고통스러울 만큼 집요하게 고문의 현장을 생생히 극화했습니다.

남영동1985

감독 정지영

출연 박원상, 이경영

개봉 2012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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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추억>(2003) 1986년 첫 발생한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수사하는 두 형사의 버디무비이자 1980년대의 폭압적인 공기와 풍경을 세심하게 담은 기록물입니다.

살인의 추억

감독 봉준호

출연 송강호, 김상경

개봉 2003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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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예로 스릴러의 외피를 두른 <살인의 강>(2010)도 있습니다. 군사독재 시절인 1985년 발생한 여중생 살인사건에서부터 IMF 경제위기 직후인 1998, 동두천 미군부대 업소 여성이 살해되는 사건까지 강줄기처럼 흘러온 살인사건들을 통해 한국 현대사의 그늘진 순간들이 개인의 삶에 어떻게 스며들었는지를 관찰합니다.

살인의 강

감독 김대현

출연 김다현, 신성록, 황인영, 이도형

개봉 2010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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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4월13일, 전두환은 군부 유지를 위해 일체의 개헌 논의를 중단하고 현행 헌법을 유지한다고 기습 선언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국민은 6월10일, 6.10 민주항쟁을 벌였고 당시 민정당 대표였던 노태우가 6.29 선언을 통해 직선제 개헌을 공표했습니다.

<미운 오리 새끼>(2012)의 낙만은 소위 말하는 '육방'(6시에 퇴근하는 6개월 방위)입니다. 전직 사진기자였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을 놓은 아버지를 부양해야 하는 사정으로 방위가 된 겁니다. 얼핏 코미디처럼 보이는 이 영화의 곳곳엔 음울한 1987년의 사회상이 녹아 있습니다.

미운 오리 새끼

감독 곽경택, 유재영, 김성식

출연 김준구, 오달수

개봉 2012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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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사람>(2016)도 가상의 인물을 내세워 1980년대의 공포스러운 사회를 드러냅니다. 호헌 조치 이후 서울올림픽 개최를 준비하며 전두환 정권은 개헌과 민주화 이슈로부터 국민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갖은 모략을 펼칩니다. 안기부 실장 규남(장혁)은 강력반 형사이자 아픈 아이가 있는 가난한 가정의 가장인 성진(손현주)을 협박해 '대한민국 최초의 연쇄살인범' 사건을 조작하려 합니다. 평범히 살고자 했던 성진의 바람은 소용없어집니다.

보통사람

감독 김봉한

출연 손현주, 장혁

개봉 2017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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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은 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은폐하려는 시도를 막아낸 시민들이 6월 항쟁에까지 이르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집단의 공모가 아닌, 각각의 자리에서 성실히 일한 개인들의 작은 의지가 모여 공동의 기운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에 주목한 점이 눈에 띕니다. 어떤 순간들은 지금과도 과히 다르지 않다는 점이 씁쓸하기도 합니다. 6월 항쟁의 시작을 알리는 엔딩은 명백히 촛불집회를 연상케 합니다.

1987

감독 장준환

출연 김윤석, 하정우, 유해진, 김태리, 박희순, 이희준

개봉 2017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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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한국영화는 촛불의 현장에까지 당도했습니다.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문제가 산적해 있지만 영화와 더불어 사회도 시시각각으로 진보하고 있습니다. 수년이 지나면 1990년대, 2000년대 이후에 벌어진 여러 사건들을 조명한 극영화들도 대거 쏟아져 나오리라 짐작해봅니다. 우리가 사는 현재, 격동의 현대사를 다룰 작품들의 앞으로를 더욱 기대해봅니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윤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