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 조직을 둘러싼 한바탕 잔혹 소동극을 풀어놓는 <독전>은, 누적 관객수 350만을 돌파하는 흥행을 만끽하고 있다. 적재적소에 실력 있는 배우들이 알알이 배치된 영화 속에서 박선창 역의 박해준은 단연 돋보인다. 지난 6년간 박해준이 선보인 영화 속 캐릭터들을 하나하나 곱씹어봤다.
화차
박해준은 대학로 연극계에서 10년간 활동한 뒤, 36세에 처음 영화에 출연했다. 변영주 감독의 <화차>가 영화 데뷔작이다. 주인공 경선(김민희)이 어린 시절 아버지가 쓴 빚을 세월이 한참 지난 후에도 받으러 온 사채업자로 나왔다. 그녀를 벼랑 끝으로 내몬 사람들 중 하나인 것.
명왕성
미스테리로 남겨진 우등생 살인사건을 통해 한국 입시지옥을 펼쳐보였던 <명왕성>. 고교생, 그들의 학부모와 교사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영화 속에서 박해준은 사건을 담당하는 최형사로 나온다. 형사 특유의 피곤하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사건을 추적하다가 박반장(조성하)가 전면에 나서자 뒤로 물러난다.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
화이(여진구)의 다섯 아버지 중 하나. 그들은 각자 다른 분야의 범죄자다. 박해준이 연기한 범수는 총기전문 저격수. 다른 아버지들이 화이를 아주 살갑게 대하는 것과 달리, 범수는 가끔 만나는 삼촌처럼 껄렁하게 화이에게 친근함을 드러낸다.
무명인
김효진과 니시지마 히데토시 주연의 한일 합작영화. 영화 중간, 이시가미(니시지마 히데토시)의 뒤를 밟다가 덜미잡히는 불륜 조사 전문가 쿠로사키로 나온다. 사투리 섞인 서울말과 일본어를 동시에 구사하는 그는 이시가미에게 사건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씨, 베토벤
극단 '차이무'는 연극 <씨, 베토벤>을 영화로 제작했다. 차이무의 스타 배우 김소진, 공상아, 오유진이 카페에서 모여앉아 사소한 개인사를 털어놓는 세 친구로 나오는 가운데, 수많은 연극배우들이 카페 손님으로 등장한다. 영화 데뷔 전에 차이무에서 활동하던 박해준도 짤막하게 출연했다. 캐릭터명은 '불량남'.
미생
사무직 회사원들의 리얼하게 담아내 많은 사랑을 받은 드라마 <미생>. 박해준은 도중에 영업3팀에 합류하는 천관웅 과장 역을 맡았다. 많은 영화 속에서 부스스한 몰골로 나왔던 것과 달리, 천과장은 가장 멀끔한 박해준을 보여줬다. 지극히 평범해서, 가장 색다른 박해준의 캐릭터가 남았달까.
탐정: 더 비기닝
<명왕성>에 이어 다시 형사 역을 맡았다. 처지는 조금 다르다. 미제살인사건 카페 운영자 대만(권상우)의 친구인 이준수 형사 역을 맡아 돌연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체포된다. 그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대만과 태수(성동일) 비공식 합동추리작전을 착수하며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순정
<순정>은 1991년 여름방학의 추억을 그린다. 도경수, 김소현, 이다윗, 연준석 등 20대 초반의 배우들이 보여주는 순박한 추억담이 영화의 주축을 이룬다. 박해준은 어른이 된 산돌을 연기한다. 인상을 구기지 않은 채 눈물을 흘리는 박해준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영화가 아닐지.
4등
<4등>은 폭력의 되물림에 관한 영화다. 고등부 최고의 수영선수였던 광수(정가람)는 어느 날 심한 체벌을 받고 경찰에 신고한 뒤, 지지부진한 경력으로 수영강사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당당하던 광수는 16년 뒤 퀭한 몰골로 학생들을 때리며 성과를 내는 어른이 된다. 박해준이 잘 지어보이는 심드렁하거나 성난 표정이 광수의 망가진 인격을 제대로 수식한다.
미씽: 사라진 여자
폭력적인 태도의 인물을 자주 연기했음에도 불구하고, 박해준의 캐릭터는 어쨌든 정의에 서는 편이 많았다. <미씽: 사라진 여자> 속 믿어야 할지 말지 애매한 태도를 일관하는 현익은 박해준이 보여주는 선악의 경계로 더욱 빛을 발한 케이스다.
대립군
'민초들의 삶을 향한 뜨거운 열망과 애국심'이라는 테마에 끌려 악역인 왜군 타로베 역을 맡게 됐다고 한다. 박해준의 일본어 연기를 더 오래 만날 수 있는 작품. 그는 일본 장군을 소화하기 위해 승마, 무술을 연마했을 뿐만 아니라 옛 일본어까지 공부하는 열의를 보였다.
침묵
박해준이라는 배우에 눈길이 쏠리는 이유 중 하나는, 한 사람에게서 '권태'와 '의지'가 피어나는 풍경이 참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침묵>은 그런 박해준의 얼굴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영화였다.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의 곧은 의지와 그걸 붙들기 위해 제 안의 폭력성을 표출해낼 수밖에 없는 나약함. 그 복잡한 심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독전
<독전>의 박선창은, 박해준이 지난 6년간 연기한 군상들 가운데 제일 단순한 사람이다. 저마다 목표를 위해 몇 가지 가능성을 고민하는 여타 캐릭터와 달리, 박선창은 오로지 거래 성사와 회사 안위를 향해 내달린다. 껄렁껄렁 경고나 할 뿐 대단히 잔인한 행동을 했던 것도 아닌데, 영화를 본 직후 박선창 하면 떠오르는 건 다름 아닌 '위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