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센타>는 배우 조은지가 <달콤, 살벌한 연인> 이후 13년 만에 박용우와 호흡을 맞춘 작품이다. 고의로 타이어 펑크를 내게 해서 돈을 버는 부부의 이야기는 우스꽝스럽게 흘러가지만, 만만치 않은 위기들이 연거푸 들이닥치면서 웃지 못할 상황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아내 순영 역의 조은지는 지난 20여 년의 경력 가운데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조은지가 그동안 선보인 다채로운 캐릭터들을 모아봤다.

<눈물> 란

<눈물>(2000)은 조은지의 데뷔작이다. 모델로 활동하던 당시, 잡지 화보를 본 제작사의 오디션 제의를 받고 <눈물>에 참여하게 됐다. <눈물>은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를 통해 화려하게 데뷔한 임상수 감독의 두 번째 영화로, 가정과 학교의 보호도 받지 못한 채 가리봉동에 모여사는 10대 청소년들의 이야기다. 디지털 카메라의 조약한 이미지 속에서도 전부 신인으로 구성된 배우들의 에너지는 선명했다. 조은지는 술집에서 일하며 기둥서방 노릇을 하는 창(봉태규)에게 물심양면을 다하는 란을 연기했다.

<후 아 유> 보영

수더분한 주인공 곁의 발랄한 친구. 2000년대 초반 조은지가 주로 맡던 캐릭터다. <후 아 유>(2002)의 보영은 그 시작이었다. 채팅 커뮤니티 ‘곱사모’(곱슬머리를 사랑하는 모임) 회원인 보영은 시삽(sysop, 운영자)의 고백을 받을 거란 기대에 부풀어 있다가 정작 꽃다발은 다른 회원에게 돌아가 상처 받는다. 그리고 인주(이나영)가 마음의 문을 열도록 진심으로 응원한다. 물리적인 비중이나 내러티브에 영향을 미치는 바가 큰 캐릭터는 아니지만, 조은지 특유의 쾌활한 에너지는 영화를 한결 밝게 만든다.

<철없는 아내와 파란만장한 남편, 그리고 태권소녀> 은희

철없는 아내와 파란만장 남편 그리고 태권소녀. 이 해괴한 제목의 영화에서 조은지가 연기한 캐릭터는 당연히 철없는 아내다. 매일 놀러다니고 사치하느라 가정엔 안중에도 없는 은희는 고등학교 동창인 태권도 사범 금숙(공효진)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남편에게 세 사람이 동거하는 걸 제안한다. 은희는 조은지가 자신의 유쾌한 이미지를 극단적으로 밀어붙여  만든 캐릭터다. 개봉한 지 17년이 지난 지금도 황당무계한 무리수가 보인다.  그나마 그 세월의 힘 덕분에 지금 다시 보면 말이 되긴 한다.

<그때 그사람들> 여대생 조씨

임상수 감독은 <눈물> 이후 4년 만에, 박정희 전 대통령을 둘러싼 블랙코미디 <그때 그사람들>(2004)에 조은지를 캐스팅 했다. 궁정동 만찬에 불려간 여대생, 정확히는 “그냥 청강생”이다. 이 여대생은 눈앞에서 절대 권력자가 총살 당하는 걸 보고 패닉에 빠졌다가 이내 같이 불려왔던 가수(김윤아)와 함께 농담을 던지며 시간을 죽이기도 하는데, 결국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서럽게 운다. <그때 그사람들>에서 눈물을 흘리는 유일한 사람이다.

<달콤, 살벌한 연인> 백장미

조은지는 다소 어두운 영화에서도 가장 밝아 보이는 캐릭터였다. 화면 속 조은지는 웃고 있는데, 정작 관객은 웃어야 하나 망설였다. 데뷔 6년 만에 만난 첫 코미디 <달콤, 살벌한 연인>(2006)에서는 마음놓고 웃긴다. 정체를 숨기고 있는 미나(최강희)의 룸메이트인 백장미는 싸가지는 있는 대로 부리면서 미나의 비밀을 발설하고, 그의 애인 대우(박용우)를 유혹하려든다. 미나가 죽인 양아치 남자친구(정경호)를 묻으려고 땅을 파면서 내뱉는 대사가 일품이다.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 소옥

태한(박광정)은 아내의 불륜 현장을 덮치려 한다. 우선 아내의 애인(정보석)이 운전하는 택시에 탔다. 둘의 불륜을 목격한 뒤 태한은 택시를 훔쳐 ‘아내의 애인의 아내’ 소옥에게 간다. 그리고 얼떨결에 소심한 복수에 성공하게 된다. 다만 태한과 소옥의 관계는 부정하기보다 쓸쓸해 보인다. 남편의 외도에 지친 여인의 상태를 우습지도 서글프지도 않은 선을 지켜 드러내는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의 조은지는 분명 이전의 조은지들과는 달랐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수희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7)은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명승부를 펼쳤던 국가대표 핸드볼 팀의 이야기를 영화화 한 작품이다. 조은지는 수문장 수희를 연기했다. 3개월 간 하루에 10시간씩 훈련 받는 고된 시간을 거쳤다. 원래 현장의 선배를 아주 깍듯이 대했지만, 거의 전체를 여성 배우들이 이끌어가는 영화를 작업하며 훨씬 편하게 그들과 마음을 나누는 법을 배운 덕분에 국가대표 팀의 끈끈한 호흡이 가능할 수 있었다.

<후궁 : 제왕의 첩> 금옥

첫 사극 <후궁: 제왕의 첩>(2012) 속 금옥은 초창기 조은지 특유의 순수함이 먼저 보인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 중전이 된 화연(조여정)의 시녀인 금옥은 줄곧 화연을 원했던 성원대군(김동욱)과 동침하고 권력에 눈뜨기 시작한다. 후궁이 되리라는 욕망에 휩싸여 점차 변해가고 결국 파멸하는 입체적인 면모를 보여주면서 조은지는 자신의 구현할 수 있는 스펙트럼을 한껏 넓혔다.

<내가 살인범이다> 강숙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 공소시효가 지난 후 범행을 밝힌 에세이를 발표한다는 가정 하에 만든 액션/스릴러 <내가 살인범이다>(2012). 조은지는 범인에게 어머니를 잃고 살아온 강숙 역을 맡았다. 수풀을 헤치고 뱀의 입 한가운데를 석궁으로 명중시키는 첫 등장은 액션을 선보일까 하는 기대를 심는다. 하지만 그 외에 조은지가 액션을 보여주는 건 구급차 카체이싱 신이 전부고, 그마저도 코미디가 더 두드러진다.

<런닝맨> 선영

조은지는 <런닝맨>(2013)에서 기자로 변신했다. 선영은 가만히 펜대를 굴리는 타입이 아니라, 도심 한복판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몰린 종우(신하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발로 뛴다. 실제 기자들이 평소 쓰는 말투와 은어들을 배워서 대화에 녹여내면서 리얼리티를 살리려고 애썼다. 형사반장 역의 김상호와 보여주는 코믹한 앙상블은 조은지의 오랜 장점을 새삼 확인시킨다.

<션샤인 러브> 정숙

<런닝맨>에 이어 오정세와 다시 한번 호흡을 맞춘 <션샤인 러브>는 영화 속 조은지의 로맨스 연기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작품이다. 정숙은 만화책과 무협지에 빠져 사는 만년 공무원 고시생 길호(오정세)와 가난한 사랑을 이어간다. 조은지 하면 떠오르는 만화적인 캐릭터가 아닌, 지극히 현실적인 조은지의 얼굴이 담겨 있다.

<표적> 박수진

강력계 형사로 출연한 <표적>(2014)에선 웃음기를 완전히 거뒀다. 선악 구도의 형사들이 쫓고쫓기는 과정을 풀어낸 영화에서 조은지는 선의 편에 서 있다. 규호(김대명)와 함께 반장 정영주(김성령)를 도와 송기철(유준상)의 무리와 대결한다. 새까만 라이더 재킷까지 올블랙으로 차려 입었지만 사건 현장에 늘 한발 늦어 이렇다 할 공을 세우지 못하는 것 같은데, 클라이맥스에선 염지영과 빡빡한 육탄전을 시전하면서 아쉬움을 날려버린다.

<악녀> 김선

<내가 살인범이다>의 애매했던 비중 때문일까, 정병길 감독은 스턴트맨 출신의 장기를 총망라한 <악녀>(2017)에 다시 한번 조은지를 기용했다. 어려서부터 킬러로 길러진 주인공 숙희(김옥빈)를 견제하던 라이벌 김선 역이다. 김선은 숙희를 넘어서고자 안간힘을 쓰지만 결국 실패한다. 월등한 실력의 주인공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캐릭터는 대개 훗날 막강한 빌런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은데, 김선은 결국은 숙희의 복수를 돕는다. 고난도의 액션보다는 불안을 감추지 못하는 감정 연기가 돋보인다.

<카센타> 순영

<카센타>는 언뜻 블랙코미디처럼 보인다. 외딴 시골에 덩그라니 놓인 카센터를 운영해 극심한 가난을 견디는 재구(박용우)와 순영 부부는 타이어를 부러 펑크 내는 꼼수로 큰 돈을 번다. 그런데 이를 알아챈 사람들이 두 주인공을 몰아세우는 과정은 결코 우습지 않다. 영화는 부정으로 부를 축적하는 과정보다 갑작스럽게 바뀐 처지를 지키기 위해 인간의 존엄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걸 보여주는 데에 힘을 쏟는다. 자존감이 무너져버린 이의 황량한 얼굴을 한 조은지는 낯선 만큼 강력한 인상을 남긴다. 조은지의 재발견이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