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에 대항하는 DC유니버스의 반격이 시작된다. <맨 오브 스틸>로 그 창대한 시작을 알렸던 DC배트맨의 화려한 부활과 명성을 가져온 크리스토퍼 놀란과 탁월한 비주얼리스트 잭 스나이더를 수장으로 앉히고 이 거대한 세계관을 확장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비록 놀란은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이하 배대슈)의 총괄 제작을 마지막으로 손을 뗐지만, 이 작품으로 DC유니버스의 단초를 심었고, 작년에 빌런들의 반상회 같았던 <수어사이드 스쿼드>를 거쳐 5월 31일 개봉하는 <원더우먼>으로 슈퍼맨과 배트맨(그리고 <그린 랜턴>도 있긴 하지만 이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흑역사가 되어버렸다!)에서 벗어나 장대한 여정을 떠나게 된다.

패티 젠킨스, <몬스터>

패티 젠킨스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이번 <원더우먼>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작품이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 슈퍼히어로란 사실에 맞춰 샤를리즈 테론이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던 영화 <몬스터><킬링>, <앙투라지> TV시리즈를 연출한 그녀에게 이 대작 프로젝트를 맡겼다. 패티 젠킨스는 할리우드 슈퍼히어로 영화사상 최초로 연출을 맡은 여성 감독이 되었고, 아울러 세계 최초로 1억 불이 넘는 예산의 영화를 연출한 여성 감독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메이저 상업영화를 연출한 경험이 없다는 것에 우려 섞인 시선이 없지 않았지만, 개봉을 앞두고 들리는 풍문으론 무너져갈 뻔한 DC유니버스를 멱살 잡고 끌고 간다는 평이 들려온다.

여성히어로의 선봉장,
원더우먼의 극장 데뷔
린다 카터와 갤 가돗

리차드 도너의 <슈퍼맨>과 스티븐 스필버그의 <인디아나 존스>에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젠킨스의 <원더우먼>은 탄생 76년 만에 비로소 단독으로 극장 데뷔를 하게 됐다. 70년대 린다 카터가 주연한 인기 TV시리즈가 있었음에도 영화화는 다른 히어로들에 비해 늦은 편인데, 사실 20년 전부터 꾸준히 극장판을 시도하긴 했다. 1990년대 중반 아이반 라이트만 감독이 산드라 블록을 앞세워 제작하려 했으나 불발됐고, 이번에 <배트 걸> 감독으로 내정된 조스 웨던 역시 2000년대 들어 오랫동안 만지작거렸지만 결국 엎어지고 말았다. 마블의 현란한 공세와 확장된 DC유니버스 덕분에 지독하게 안 풀리던 문제가 손쉽게 해결된 셈이다.

원더우먼 vs 캡틴 마블

원더우먼의 영화화에 자극받은 마블은 오스카 여우주연 수상자 브리 라슨을 앞세워 마블의 대표적 여성히어로 <캡틴 마블>의 영화화에 착수했다. <앤트맨> 속편에선 여주인공 에반젤린 릴리의 비중을 높여 본격적으로 여성히어로 와스프를 전면에 내세운다. 제목도 아예 <앤트맨과 와스프>. DC도 만만치 않다. <원더우먼>의 뒤를 이어 나올 <배트 걸>은 경쟁사 마블에서 홈런을 때린 조스 웨던을 영입해 전권을 부여했다. 그간 처참하게 망테크를 탔던 <캣우먼><엘렉트라>, <이온 플럭스> 등을 반면교사 삼아 제대로 된 여성히어로물이 만들어질 태세다. 그 첫 단추를 잘 꿸 이번 <원더우먼>의 성과가 그래서 중요하다. 분위기는 나쁘지 않다.

캣우먼, 엘렉트라, 이온 플럭스


한스 짐머의 손을 떠난 DC유니버스

갤 가돗을 앞세워 <배대슈>에서 처음 원더우먼을 등장시켰을 때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슈퍼맨과 배트맨이라는 양대 히어로 사이에서 전혀 기죽지 않고, 오히려 압도적인 존재감을 내뿜은 원더우먼은 다소 지루하고 어수선한 영화에서 강력한 각인을 남겼다. 이는 갤 가돗이란 배우의 독특한 아우라와 여신급 카리스마가 제대로 발휘된 것에 기인하지만, 그 첫 등장에 깔리던 한스 짐머와 정키XL의 사이키델릭하고 웅장한 진군가 덕분이기도 했다. 이 원더우먼의 테마는 <배대슈> 사운드트랙에서 가장 화제를 모은 킬러 트랙이었다. 하지만 이번 영화판 <원더우먼>의 음악은 한스 짐머와 정키XL이 아닌 루퍼트 글렉슨 윌리엄스가 담당한다.

<배대슈> OST와 한스 짐머

다소 뜬금없고 당황스런 선택으로 보일 수 있는데, 그간 DC유니버스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한스 짐머가 더 이상 슈퍼히어로 음악에 손대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 때문에 연쇄적으로 벌어진 사달(?)이다. 짐머는 놀란의 배트맨 3부작을 마치자마자 다시 이번에 확장된 DC유니버스에 들어서며(특히 슈퍼맨 이야기에만 국한됐던 <맨 오브 스틸>과 달리 <배대슈>에 임하며) 전혀 다른 모습의 배트맨 테마를 다시 (그것도 짧은 텀에) 만들어야 한다는 것에 장르에 대한 회의감과 정신적인 부담감을 호소했다. 그런 자신의 상태가 관객들에게도 전달될까봐 우려하며 슈퍼히어로 음악에서 떠난다고 밝혔다. 그런 이유로 정키XL<저스티스 리그> 음악으로 일찌감치 선택됐고, 더 먼저 개봉하는 <원더우먼>의 음악은 꽤 오래 공석인 채 결정되지 않았다.
 

한스 짐머의 새로운 영웅찬가,
다크한 DC유니버스
한스 짐머의 '배트맨' 삼부작

전통적으로 DC에선 존 윌리엄스의 <슈퍼맨>이나 대니 엘프만의 <배트맨>처럼 고전적이고 영웅적인 심포닉 사운드로 할리우드 영화음악사에 길이 족적을 남길 위대한 스코어들을 들려줘왔다. 이 스타일이 변화를 맞은 건 크리스토퍼 놀란이 연출한 밀레니엄 배트맨 3부작부터였는데, 한스 짐머의 리모트 콘트롤 사단을 앞세워 새로운 조류를 만들어냈다. 그간의 웅장하고 서사적인 영웅찬가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미니멀한 스타일에 리듬섹션을 강하게 부각시킨 모노톤의 어두운 스코어로 전통적인 흐름을 싹 갈아엎은 것이다. 호불호는 분명하게 갈렸다. 영웅담에 어울리는 팡파르의 부재로 지나치게 현실적이고 다크한 색채가 짓누른다는 부정적인 인식부터, 그간 가려있던 히어로들의 현실적인 고뇌와 무게감을 전달했다는 극찬까지.

정키 XL과 한스 짐머

하지만 제작비 2억 불에 육박하는 블록버스터에서 짐머가 선보인 실험적인 시도와 그 용단만큼은 이견 없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더욱이 <맨 오브 스틸> 음악을 맡으며 지난 40년간 상징처럼 굳어온 존 윌리엄스의 슈퍼맨 테마를 배제한 짐머의 선택은 정말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비록 짐머가 DC유니버스에서 물러났지만, 그와 같이 공동 작업을 해왔던 정키XL과 그의 산하의 리모트 콘트롤 사단이 전체적인 프로세스를 이어받았기에 전체적인 분위기나 색채가 크게 달라지거나 어색해질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패티 젠킨스의 이번 <원더우먼> 역시 DC의 통일된 세계관을 공유하는 만큼 그 스타일과 흐름에 적절히 녹아들며 자신만의 비전과 색채를 투영할 수 있는 작곡가가 무엇보다 필요했다.

정키 XL


 

<원더우먼>의 음악가
루퍼트 그렉슨 윌리엄스

그런 면에서 간택된 이가 루퍼트 그렉슨 윌리엄스라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미 리모트 콘트롤 사단에서 히어로물 음악을 맡은 작곡가들이 헨리 잭맨이나 라민 자와디, 존 파웰과 블레이크 닐리, 론 발프 등 여럿 있는데, 그들이 아니라 전혀 이쪽 장르를 해보지 않은, 신인 아닌 그를 등용했다는 건 그가 가진 전혀 다른 면모에 기대를 품었단 반증이기 때문이다. 사실 루퍼트는 아담 샌들러가 나온 일련의 코미디 영화들과 장편 애니메이션에서 두각을 나타내왔다. 토니 스콧의 음악적 짝패이자 리들리 스콧과도 인연이 있던 영화음악가 해리 글렉슨 윌리엄스의 친동생이기도 한 그는 형과 달리 고전적이면서도 전통적인 오케스트레이션과 (앞선 필모에서 알 수 있듯 코미디와 애니메이션에서 그 효과가 극대화되는) 미키마우징 기법에 능하다.

<원더우먼>

그의 이런 장기는 이번 <원더우먼>에 득이 될 것이다. 이미 영드 <더 크라운>에서 현대판 신화처럼 포장된 왕가의 이야기를 다루며 권위와 상징적인 스코어들을 작업한 바 있고, 현세에 적응하려는 원더우먼의 코믹한 톤과 액션 시퀀스에서 영상과 동기화된 음악은 그가 잘 다뤄왔던 분야이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퍼 리브의 <슈퍼맨>과 에롤 플린의 활극 등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한 만큼 그간 짐머가 참여했던 DC유니버스의 어두웠던 모습은 줄어들고, 존 윌리엄스나 제임스 호너, 알란 실베스트리처럼 낭만적이고 서사적인 스타일에 접근하고 있다. 동시에 리모트 콘트롤 소속으로 짐머나 정키XL의 작업물에 대한 이해도도 높고, 스타일을 공유하면서, 구력 쌓인 작곡가로 자신만의 비전을 발휘할 수 있단 점도 상당히 인상적인 부분이다.
 

고전과 현재의 조화,
<원더우먼> 사운드트랙

최근 데이빗 예이츠의 <레전드 오브 타잔>과 멜 깁슨의 오랜만의 감독 복귀작으로 잘 알려진 <핵소 고지> 등의 음악을 맡는 등 점차 스케일 큰 작업물들을 소화해내고 있는 터에 이번 <원더우먼>의 음악은 루퍼트에게 큰 기회이자 도약의 발판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는 영리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고전적인 스타일과 기존 DC유니버스의 음악을 믹스시키라는 미션을 성공해냈다. 티나 구오가 일렉트릭 첼로로 거칠고 힘 있게 연주하는 싸이키델릭한 기존의 원더우먼테마는 여전히 중용되고 있으며, 그의 장기인 오케스트레이션과 결합돼 더 웅장하고 장엄한 사운드로 (그것도 관현악으로 빠방하게) 울려퍼지며 관객들을 압도한다. 리모트 콘트롤 사단의 전매특허라 할 수 있는 미니멀하면서 역동적인 오스티나토 역시 환상적이다.

첼리스트 티나 구오의 '원더우먼' 테마

엔딩에 흐르는 주제가 ‘To Be Human’은 호주 출신의 싱어송라이터 Sia가 불러 강인하면서도 순수한 원더우먼의 상황을 절묘하게 노래했다. 최근 갑작스런 딸의 자살로 총책임자였던 잭 스나이더 부부가 이탈한 가운데 개봉하는 <원더우먼>은 위기에 빠진 DC유니버스에 한줄기 빛으로 떠오를 수 있을까. ‘감독패티 젠킨스처럼 음악루퍼트 글렉슨 윌리엄스란 선택도 모험에 가까운 승부수였지만 선방할 것으로 예측된다. 애초 첫주 오프닝으로 6천만 불을 예상하던 예측치도 시사회의 호평 이후 8천만 불 이상으로 상향조정되었다. <원더우먼>의 사운드트랙은 북미 영화 개봉일과 동일한 62일 공개될 예정이다.


사운드트랙스 / 영화음악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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