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시절, 어느 날 빌려 본 비디오가 있다. 컬러와 흑백을 동시에 사용하고, 시간이 거꾸로 흐르며, 타투와 폴라로이드 사진으로 기억의 한계를 연명하는 남자의 이야기였다. 한 번 보고, 또 보고, DVD를 구매해서 보고, TV에서 할 때 또 봤다. <메멘토>는 내게 위대한 영화 중 하나였고, 크리스토퍼 놀란은 내가 애정하는 감독 중 하나가 됐다.
- 메멘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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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출연 가이 피어스, 캐리 앤 모스, 조 판토리아노
개봉 2000 미국
그랬던 내가 <인터스텔라>에 이어 <덩케르크>에도 실망했다. 노파심에 선수 치자면 <덩케르크>는 무척 잘 만든 영화다. 관객을 ‘현장에 있다’고 믿게 하려고 세계 2차대전 당시 모든 요소를 완벽하게 구현했다. <덩케르크>에 실망한 건 완성도가 아니다. 몇 가지 대목을 지적하면서 그 이유를 정리해보겠다.
1. 아이맥스와 필름
<덩케르크>는 아이맥스 필름과 65mm 필름을 사용했다. 영화 전체 분량을 75%를 아이맥스 필름으로 촬영하고 나머지는 65mm 필름으로 채웠다. 아이맥스 상영관에서 영화를 볼 경우 1.43:1(혹은 1.9:1)과 2.35:1의 화면 비율을 오간다.
이 부분에서 시각적으로 큰 차이를 보인다. 같은 필름이라고 하지만 아이맥스 촬영 분량은 고해상도 영상만의 날카로운 표현력이 부각되고 65mm 필름 촬영분은 필름만의 다소 따스한 색감이 두드러진다.
아이맥스 필름이 포착한 비행 장면의 긴박함과 넓은 화면비의 방대한 정보량에 찬탄하는 바이나, <덩케르크>가 주는 재현성에는 65mm 필름의 느낌이 적합하다고 느꼈다. 두 촬영분이 혼재함으로써 화면비의 변화와 질감의 차이에서 오는 이질감이 때때로 영화에 대한 몰입감보다 더 크게 느껴진다.
2.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특유의 ‘밀당 부재’
예전에 다른 글에서 ‘크리스토퍼 놀란은 진화하는 감독’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간략하게 서술하면 전작의 장점을 차기작에 정확하게 녹여내는 능숙함이 빛난다는 뜻이다. <프레스티지>의 복선과 회수는 <다크나이트>에 적용됐고, <다크나이트>의 캐릭터에 상징성을 투영하는 법은 <인셉션>에도 사용된 걸 예로 들 수 있다. 스토리와 캐릭터를 영화에 알맞게 녹여낼 줄 알았다.
- 다크 나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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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출연 크리스찬 베일, 히스 레저, 아론 에크하트
개봉 2008 미국
<덩케르크>에 부재한 건 그런 놀란만의 장점이다. 놀란 감독은 <다크나이트> 삼부작을 제외해도 <메멘토>, <프레스티지>, <인셉션>이란, 관객들과의 두뇌싸움에 능한 영화들을 만들었다. 관객에게 정보를 주고 그것을 허위로 만들거나 역전시키는 방식으로 영화의 재미를 추구했다.
하지만 <덩케르크>는 (실화이기에 그렇기도 하지만) 전장의 특수성 때문에 복선보다는 즉각적인 정보가 주를 이룬다. 이는 그동안 놀란 감독 특유의 ‘스토리텔링’에 빠져있던 (에디터를 포함한) 관객들에겐 단점에 가깝다.
3. 체험을 강조한 연출의 한계
놀란 감독은 <덩케르크>에 대해 “영화적인 서스펜스와 스펙터클, 시각적인 스토리텔링, 그리고 기술적인 완벽함을 추구하여 관객들이 체험할 수 있는 최대치이자, 지금껏 보지 못한 것을 보여줄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체험’이라 할 수 있다.
<덩케르크>는 개성 있는 인물들을 내세우고 그 뒤를 따르기보다 보편적인 인물을 두고 상황(목숨이 위태로운 전장)을 부각시킨다. 위태로운 상황이 부각되니 관객은 그 보편적인 인물에게 이입하게 된다. 이 방법으로 <덩케르크>는 관객에게 ‘체험’을 선사한다. 또 압도적인 아이맥스의 비주얼과 등장인물들의 시선을 쫓는 카메라 앵글로 관객에게 마치 전장 한 가운데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렇게 관객들에게 ‘체험’을 강요하니 호불호가 갈릴 수밖에 없다. 영화를 보는 이들 중엔 ‘이야기를 본다’는 입장에서 관람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본다는 건 흥미롭고 재밌는지 여부를 떠나 한 발 뒤에서 이야기가 흐르는 과정을 지켜보는 걸 즐긴다는 뜻이다. 그런 관객들을 상황 안으로 밀어넣는다면, 쉽게 몰입할 수 없을 것이다.
4. 체험에서 서사로의 전환
그렇다고 해서 그 ‘체험’을 끝까지 밀고 갔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덩케르크>는 무성영화에 가까울 만큼 대사를 없애고 상황을 부각시켜 ‘체험’을 강조한다. 토미(핀 화이트헤드)에게 의도적으로 대사를 거의 주지 않았던 초반부가 그렇다. 그는 전장이란 위험한 상황에서 생존을 꿈꾸는 평범한 사람이다.
하지만 영화가 전개되면서 토미는 동료 군인들과 갈등을 겪고 자연스럽게 대사가 많아진다. 대사가 생긴다는 건 그에게 ‘개성’이 생긴다는 의미다. 캐릭터를 통한 의미 부여와 상황 전개가 이뤄진다는 뜻이다. ‘체험’을 강조했던 전반부와 달리 후반부는 ‘서사’로서의 색깔이 짙어지는 것은 물론, 관객이 몰입하고 있던 토미란 매개체가 무너지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어색한 구조에 정점을 찍는 건 마지막 엔딩이다. 정적인 몽타주에 내레이션이 나오는 ‘크리스토퍼 놀란식 엔딩’이 지겨운 건 둘째 치자. 관객이 투영될 수 있게 보편적인 인물이었던 토미(가 읽는 처칠의 연설문)를 통해 당시 군인들의 ‘숭고함’을 부각시킨다. 영화에서 고수해왔던 ‘체험’은 어느새 사라지고, 메시지와 정서의 과잉이 도드라진다.
5. 제작자를 위한 영화?
영화 외적인 부분이지만 반드시 지적하고 싶은 건 ‘과연 아이맥스 영화 제작이 옳은가?’이다. 놀란 감독은 이전작인 <인터스텔라>도 상당 분량을 아이맥스 필름으로 촬영했다. <덩케르크>와 마찬가지로 1.43:1, 1.9:1, 2.35:1의 세 판본이 존재했다.
- 인터스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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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출연 매튜 맥커너히, 앤 해서웨이, 마이클 케인, 제시카 차스테인
개봉 2014 미국, 영국
전 세계적으로 1.43:1의 아이맥스 상영본을 볼 수 있는 극장은 그 수가 많지 않다. 당시 한국에는 1.43:1로 상영할 수 있는 아이맥스관이 아예 없었다. <덩케르크>가 상영되는 지금도 CGV 용산 아이맥스관이 유일하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치열한 예매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관객들의 '취사선택'이라고 하기엔 판본을 접할 수 있는 여건 자체가 너무 부족하다. 이런 상황에서 놀란 감독은 <인터스텔라>에 이어 <덩케르크>도 세 가지 판본으로 완성시켰다. 그리고 '아이맥스'에서 보길 바란다고 추천했다. 창작자로서 원본을 추천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환경이 조성되지 않아 선택의 폭이 좁은 현 상황만큼은 고려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놀란 감독처럼 많은 팬을 거느린 ‘상업영화 감독’이라면 더욱더.
한 번 더 강조하자면, <덩케르크>는 잘 만든 영화이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만 새로운 영화계의 거장은 있지만 새로운 즐거움을 주던 크리스토퍼 놀란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영화를 만드는 감독도 좋지만 이전처럼 능수능란한 솜씨로 재미를 선사하던 놀란 감독이 돌아오는 날을 기다려본다.
씨네플레이 인턴 에디터 성찬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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