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아직 우리가 보지 못한 수많은 영화가 있다. ‘오늘은 무슨 영화를 볼까’라는 행복한 고민에 빠진 이들을 위해 쓴다. ‘씨네플레이’는 ‘씨플 재개봉관’이라는 이름으로 재개봉하면 당장 보러 갈 영화, 실제로 재개봉하는 영화들을 소개해왔다. 이번에 만나볼 영화는 6월28일 재개봉하는 에드워드 양 감독의 <하나 그리고 둘>이다. 2000년 10월 국내 개봉했던 작품이다.

하나 그리고 둘

감독 에드워드 양 출연 오념진, 금연령, 켈리 리, 조나단 창, 이세이 오가타 개봉 2000년 10월 28일 재개봉 2018년 6월 28일 상영시간 173분 등급 12세 관람가


<하나 그리고 둘>은 결혼식에서 시작해 장례식으로 끝난다.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행사를 모두 보여준다. 에드워드 양 감독은 이 중대한 의식을 치루는 대만 중산층 가족의 삶을 포착했다. 그의 시선은 어디를 향해 있을까. 그가 바라본 삶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가 ‘보여준’ 우리 인생 ‘절반’의 진실을 함께 찾아보자.

대만 중산층 가족의 사연

아버지 NJ(오념진)는 처남 아디(진희성)의 결혼식장에서 우연히 첫사랑 셰리(가소운)를 만난다. 30년 만이다. 셰리는 대뜸 “그때 왜 안 나왔냐”고 소리지른다. 두 사람에게는 뭔가 사연이 있어 보인다. NJ의 회사는 경영 위기에 봉착했다. 새 사업 파트너 오타(이세이 오가타)를 만나는 도쿄 출장에서 NJ는 셰리와 재회하고 새 삶을 그려본다.

아버지 NJ.

결혼식 도중 집으로 돌아온 할머니가 쓰러진다. 뇌사 상태에 빠진 할머니 때문에 어머니 민민(금연령)은 괴롭다. 의사는 의식이 없지만 들을 수 있다며 할머니에게 무슨 말이든 계속 해주라고 조언한다. 의사의 말에 따라 민민은 자신의 일상을 얘기하려다 실패하고 만다. 갑자기 찾아온 삶의 회의. 죽음에 대한 공포와 빈껍데기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초라함이 그녀를 무너뜨린다. 그렇게 그는 잠시 집을 떠나 절에 들어간다.

어머니 민민.

고등학생 딸 팅팅(켈리 리)은 베란다에 있던 쓰레기를 버리려다 깜빡한다. 할머니가 그 쓰레기를 대신 치우려다 쓰러진 것 같다. 팅팅은 자괴감에 빠진다. 할머니가 자신 때문에 그렇게 됐다고 믿는다. 같은 날, 옆집에 또래 리리가 이사온다. 팅팅과 리리는 친구가 된다. 리리에게는 남자친구 패티가 있다.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팅팅과 패티는 서로에게 연애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다.

큰딸 팅팅.

8살 아들 양양(조나단 창)은 어린 철학자다. 동시에 관찰자다. 그는 아버지, 어머니, 누나가 보지 못하는 세상 절반의 진실을 보려 한다. 사람들은 앞만 보고 뒤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절반의 진실만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양양이 아버지에게 선물받은 카메라로 사람들의 뒷통수를 찍기 시작하는 이유다.

막내 아들 양양.

알고 보면 단순한 삶

<하나 그리고 둘>의 주요 서사는 아버지 NJ와 딸 팅팅이 담당한다. 중년 가장과 10대 소녀,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살아가는 도중 두 사람의 인생이 묘하게 겹치는 지점이 도래한다. 도쿄 출장 중에 첫사랑 셰리를 만난 NJ와 리리의 남자친구였던 패티와 첫 데이트를 하는 팅팅을 교차편집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다. 30년 만에 만나 첫사랑의 감정을 되살리던 NJ와 셰리가 처음으로 손을 잡았던 순간을 추억하는 대사가 나오는 동안 팅팅과 패티가 손을 잡은 화면을 보여주는 식이다.

NJ와 팅팅은 하나에서 둘이 되려고 했던 것인지 모른다. 삶을 살아가는 개인은 하나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둘이 됐다고 믿는다. 그러니까 <하나 그리고 둘>이 보여준 세계는 ‘하나’(一)와 ‘둘’(二)로 이뤄져 있다. 나도 하나이고, 너도 하나다. 하나와 하나가 만나면 둘이 된다. 그런데 사실 둘은 없다. “삶의 두 번째 기회가 온 줄 알았어”고 믿었던 NJ는 첫사랑과 헤어지고 만다. 팅팅도 패티와 파국을 맞는다. 결국 하나는 하나일뿐이다. 그래서인지 <하나 그리고 둘>은 원제는 ‘Yi Yi’라고 표기된다. Yi는 중국어 ‘一’의 발음기호와 같다. 즉 원제를 직역하면 ‘하나 하나’ 라는 뜻이다. 중국어로 ‘하나 하나’는 ‘개별적’이라는 의미다.

볼 수 있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

“갑자기 삶이 끝날까 봐 두려워하던” 어머니 민민은 절에서 돌아온다. 첫사랑과 새 삶을 꿈꿨던 남편 NJ에게 말한다. “알고 보니 삶은 단순한 거”라고. 그 단순한 삶의 진실을 아는 건 사실 여간 힘들 일이 아니다. 팅팅은 패티와의 관계가 완전히 끝난 뒤, 그 진실을 조금 알아챘다. 할머니의 무릎에 기대 이렇게 말한다. “왜 세상은 우리 생각과 다른 걸까요. 내가 보는 세상은 너무 아름다워요.” 팅팅은 세상의 추한 모습을 이제서야 보기 시작했다.

<하나 그리고 둘>은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영화다. 오로지 어린 양양만이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을 본다. 그는 NJ, 민민, 팅팅이 보지 못했던 절반의 진실을 본다. <하나 그리고 둘>은 양양의 시선을 통해 ‘본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영화다. 양양은 늘 본다는 것에 대해 말한다. 학교에서 풍선을 가지고 놀던 양양이 선생님에게 꾸중을 듣는다. 선생님은 양양이 콘돔을 가지고 놀았다고 ‘들었다’. 양양은 선생님에게 말한다. “선생님은 듣기만 했지 직접 본 것도 아니잖아요.” 병상에 누운 할머니에게 말을 해보라는 엄마의 말에는 이렇게 답한다. “말하면 뭐해? 할머니는 볼 수도 없는데.” 양양은 어버지에게 묻는다. “아빠가 보는 걸 난 못 보고, 내가 보는 건 아빤 못 봐요. 둘 다 보려면 어떡해야 하죠?” 아버지는 “그래서 카메라가 필요하단다”라고 답한다. 양양이 다시 묻는다. “우린 반쪽짜리 진실만 볼 수 있나요? 앞만 보고 뒤를 못 보니까 반쪽짜리 진실만 보이는 거죠.”

어린 철학자의 말들은 모두 수첩에 적어두어야 한다. 그의 말에 감독이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녹아있다. <하나 그리고 둘>을 ‘보는’ 관객은 양양의 말을 생각한다. 우리가 보지 못한 세상 절반의 진실. 이 영화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과 보여주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 <하나 그리고 둘>에는 본다는 것의 의미를 꼽싶어 보는 여백이 가득한 영화다.

영화를 보는 이유

양양의 안내에 따라 본다는 것의 의미를 찾는 <하나 그리고 둘>의 여백은 카메라의 위치를 통해 만들어진다. 이 영화에는 클로즈업이 없다. 대체로 카메라는 창밖에 있거나, 멀리서 문틈을 비추거나, 길 건너에 있다. 화면 가득 인물의 얼굴을 담는 경우는 없다. 클로즈업은 카메라가 가지는 특권이다. 타인의 얼굴을 가까이 보는 거리, 이를 테면 10~20cm의 거리는 매우 친밀한 연인이나 가족이나 친구만 허락된다. 영화의 카메라는 그 거리를 언제든지 넘나들 수 있다. 그래서 클로즈업은 영화 속 인물의 감정을 더 잘 느끼게 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슬픈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이 눈물을 흘릴 때의 클로즈업을 생각해보라. 그런 클로즈업이 없다면? 영화가 인물과 거리를 두고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하나 그리고 둘>의 여백이 발생한다. 또 타이페이 거리의 풍광, 사운드와 화면이 전경과 후경으로 대치되는 화면전환도 관객에게 여유를 만들어준다. 그렇게 관객에게 생각할 틈이 만들어진다.

우리는 그들의 절반만 본다

멀찍이 위치한 카메라의 조심스럽고 섬세한 시선은 가족의 삶의 담아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의 삶을 잘 알고 있는 것일까. 양양의 말대로라면 그들의 앞이나 뒤만 볼 뿐이다. 결국 에드워드 양 감독이 선택한 삶의 한쪽 단면을 볼 뿐이다. 그게 앞이든 뒤든 그 나머지 절반은 보지 못한다. 관객은 스스로 절반의 진실을 찾아야 한다. 많은 이들이 <하나 그리고 둘>을 ‘인생영화’라고 여기는 이유가 여기 있다. 감독이 보여주지 않은 절반의 진실은 내 삶을 돌아보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양양은 기꺼이 가이드를 자처한다. 허세 가득한 말을 하는 삼촌 아디가 등장한 장면을 보자. 투자한 돈을 몽땅 사기당할 뻔하고 죽음의 고비도 넘기면서도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는 삼촌에게 양양이 슬그머니 다가온다. 그는 조용히 아디의 뒷통수가 찍힌 사진을 전한다. 삼촌이 “이걸 왜 찍었냐”고 묻자, 양양은 “삼촌은 뒤를 못 보니까 내가 찍었어요”라고 말한다. 내 뒤통수가 따끔거리는 순간이다.

양양 말고도 에드워드 양 감독이 숨겨둔 가이드는 또 있다. 극장 데이트에 나섰던 팅팅과 패티. 두 사람의 대화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패티/ 영화는 현실과 닮아 있어. 그래서 사람들이 좋아하지.

팅팅/ 그럼 뭐 하러 영화를 봐?그냥 현실을 살면 되지.

패티/ 우리 삼촌이 이런 말을 했어. 영화가 생겨난 후로 인간의 수명은 3배 늘어났다고.

팅팅/ 정말? 말도 안돼.

패티/ 일상을 통해 얻는 것 말고도. 영화를 통해 2배의 삶을 더 경험한다는 거지. 예를 들면 살인 같은 거. 우리가 직접 사람을 죽이지 않아도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되잖아. 영화를 통해 그런 게 가능한 거지.

패티의 삼촌의 말은 진리다. 단언컨대 <하나 그리고 둘>은 현실과 닮았다. 그런 만큼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도 맞다. <하나 그리고 둘> 속의 가족으로 일종의 대리체험도 할 수 있다. 단, 경험의 강도가 낮다. 앞서 언급한 클로즈업의 부재가 그걸 만들어낸다. 극중 인물에 감정을 이입하기보다는 그들의 삶을 관조하게 된다. 천천히 바라보는 시간. 나를 돌아보게 되는 영화. 삶을 이야기하는 영화의 본질. 영화란 무엇일까. 질문은 계속 떠오른다. <하나 그리고 둘>의 미덕이다.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

<하나 그리고 둘>은 장례식으로 끝이 난다. 결국 할머니는 삶을 마감한다. 할머니의 죽음을 목격한 양양은 자신의 방에 가서 노트를 펼치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 장례식장에서 양양은 어머니 민민에게 “할머니와 얘기해도 되냐”고 묻는다. 병상에 누워있던 할머니와 얘기하지 않겠다고 했던 그는 노트를 펼치고 또박또박 할머니에게 자신의 말을 전한다. 그렇게 양양의 이야기가 끝나면 영화도 끝난다.

1987년 프랑스의 3대 일간지 가운데 하나인 ‘리베라시옹’은 칸영화제 특집호에서 전 세계의 영화감독에게 “왜 영화를 만드는가”라고 질문했다. 에드워드 양 감독은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으니까”라고 대답했다. 에드워드 양 감독이 <하나 그리고 둘>에서 말을 통해 들려주지 않고, 영화를 통해 보여준 것, 그것은 양양이 할머니에게 전하는 마지막 말을 떠올리게 만든다.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어요. 그들이 모르는 걸 알려주고 볼 수 없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그럼 정말 즐거울 것 같아요.”

에드워드 양 감독은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나서 친구를 만났다는 인상을 안고 나왔으면 한다. ‘영화 감독’의 세계를 만났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이 영화를 실패작이라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하나 그리고 둘>처럼 좋은 조언을 해주는 친구는 흔하지 않다.

애석한 점이 하나 있다. 에드워드 양 감독은 2007년 6월29일 지병인 결장암으로 타계했다. <하나 그리고 둘>이 그의 마지막 영화다.

씨네플레이 신두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