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세 감독의 <첫사랑>(1993)은 쉽게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 오리지널 네거티브는 소실됐고, 다운로드, 스트리밍 서비스, DVD도 없다. <첫사랑>의 디지털 복원판이 BIFAN에서 상영된다는 소식이 많은 관객들을 흥분시킨 이유다. 지난 7월 3일 저녁 8시 CGV소풍에서 열린 상영과 관객과의 대화는 만원이었다. 이명세 감독과 깜짝 등장한 배우 김혜수가 참석했는데 두 사람이 만난 건 26년 만이다. 최선을 다해 지난 시간을 복기해 꺼내놓은, 영화만큼이나 서정적이었던 그 순간들을 지면에 옮겼다.
이명세 당시 제작사가 <첫사랑> 전에 제작한 영화가 흥행이 안 됐다. 재정적으로 힘든 상황이었고, <첫사랑> 제작도 계속 지연됐다. 1년 가까이 찍었던 것 같다. 김혜수, 송영창 등 배우들이 기다려준 게 정말 고마웠다.
김혜수 짬만 나면 몰래 숨어서 잤던 게 기억난다. 당시에는 엄청나게 다작을 해야 했었다. 주말극, 미니시리즈, 학교에선 단편영화, 쇼 프로그램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진행까지 했다. 항상 지치고 잠이 부족한 상태였는데, 이명세 감독님은 원하는 게 나올 때까지 끊임없이 반복해서 연기를 시켜서 힘들었다. 답답하면 직접 연기를 하시기도 했다. (웃음) 그런데 보통의 감독과 배우 관계와는 조금 달랐다. 마치 연극반 선생님과 학생처럼 가까웠다. 주전자 막걸리를 함께 먹었던 게 기억이 난다. 영화와는 별개로, 정말 낭만적이고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명세 김혜수씨와 처음 만난 것이 누군가의 결혼식장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보는 순간 저 얼굴이 주인공 영신의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김혜수의 눈, 눈만 보이더라. “난 너의 눈만 기억하고 찍겠다”고 했다. 그 눈은 첫사랑에 대한 모든 함의를 응축하고 있었다.
김혜수 그때 감독님이 “혜수, 네 눈은 네 나이를 찾아야 해”라고 했다. 나는 당시 노숙한 이미지가 있었다. 항상 실제 나이에 비해 어른의 배역을 맡았다. 그러니 <첫사랑> 통해서 최초로 내 나이를 찾은 거다. 당시 나는 아직 사랑을 몰랐다. 연기는 22살에 했고, 내 실제 첫사랑은 23살 때다.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고 했기 때문에 나온 연기들이 있는 것 같다. 때 묻지 않은 도화지 같은 투명함, 그것을 지금 할 순 없다. 지금 같은 연기를 하라면 당시의 김혜수보다 나을 자신이 없다.
이명세 예나 지금이나 시간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한다. <첫사랑> 작업하면서 너무나 가슴 아팠다. 시간이 사라져가는 것이 안타까웠다. 첫사랑은 언제나 과거다. 첫사랑이 미래일 순 없다. 나는 ‘첫사랑’이야말로 시간의 비밀을 여는 키라고 생각했다.
김혜수 촬영 전에 내가 감독님한테 영화의 주제가 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때 같은 말씀을 하셨다. “첫사랑은 시간의 비밀을 여는 키.” 촬영 중에는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첫 시사 날에서야 그 의미를 알았다. 영신의 사랑처럼, 모든 것이 사라지고 변해버렸다. 영신의 얼굴, 영신이 걷던 그 골목은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다. 에필로그에서는 영신은 아예 사라진다. 과거 속으로 모든 것이 용해된다. 지금 보니 그 시간의 덧없음이 더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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