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없이 전쟁을 그려낸 육체적 도상학
참혹한 전쟁의 무도를 영화화하기 위해 감독 칸테미르 발라고프는 공방전 혹은 폐허의 스펙터클을 동원하는 관습에서 벗어난다. 그가 잔인한 정직성으로 파고든 전후 사회엔 인간 존엄을 성찰할 인도적 여유는 없다. 육신에 어떻게 전쟁이 각인돼 있는지 보라. 온몸이 마비된 전쟁 영웅, 잘려진 손으로 날갯짓하는 상이군인, 봉합 부위에서 피가 스미는 것도 모르는 채 흥분하여 박수치는 청년. 전쟁의 상흔을 몸에 새기고 귀환한 자들의 육체들을 통해 보이지 않는 전쟁의 환영적 신체가 떠오른다. 물리적 전쟁은 끝났지만 신체에 낙진처럼 달라붙은 전쟁은 진행 중이다. 고요한 방식으로 죽고 죽이는 불가피하고도 서글픈 일상이다. 그렇게 <빈폴>은 육체적 도상을 통해 전쟁의 야만을 대리 재현한다.
영화는 전쟁에서 돌아온 두 여성 이야(빅토리아 미로시니첸코)와 마샤(바실리사 페렐리지나)의 이상한 공생관계를 보여준다. 생사를 함께한 전우였지만, 일상으로 돌아온 그녀들은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절박성 앞에서 야생적이고 동물적인 계약관계 속으로 들어간다. 이야는 유독 큰 키 탓에 ‘꺽다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피로 찌든 붕대와 환자복으로 가득한 병원 세탁실에서 이야가 얼어붙는 장면을 보여주는 오프닝은 전쟁을 보여주지 않으면서도 온전히 전쟁의 핵심을 간파한다. 금발, 흰 속눈썹, 투명한 피부, 백골과 같은 골격의 이야는 거리와 전차와 목욕탕의 사람들 속에서도 존재감이 뚜렷하다. 뇌진탕 증후군으로 그녀가 유령처럼 굳어버리는 것은 유사-죽음의 상징이다. 영화 속 이야가 굳어버리는 장면은 삶과 죽음의 전조와 관련해서 등장하는데, 가령 어린 소년 파슈카(티모시 그라스코프)의 생명과 관련되거나 그녀 내부의 욕망의 회로가 작동하기 시작하는 순간이 그렇다. 마비는 그녀의 몸에 생의 약동이 솟아오를 때 의도치 않게 파국적으로 도래하는 유령적 빙의다. 육체를 통한 비유는 목욕탕 장면에서도 부각된다. 공중목욕탕에서 이야는 마샤의 아랫배의 상처를 본다. 마샤는 더이상 삶을 잉태할 수 없는 몸이 된 것이다. 목욕탕에 있는 전라의 여성 군상을 통해 이상하게도 보색의 잔상효과인 양 대조적 이미지인 전쟁터의 군인들이 떠올랐고 이 이미지의 연쇄는 나치수용소 가스실의 벌거벗은 유대인들로 이어졌다. 칸테미르 발라고프는 화면만으로 화면 이상의 것, 때로는 대조적으로 충돌하는 의미들을 접합시키곤 한다. 감독의 첫 장편 <가까이>(2017)가 러시아 사회 내의 유대인 혐오를 소재로 하고 있으며 친밀감과 가학성의 교묘한 양면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은 시사적이다.
뒤섞이거나 침투하는 녹색과 적색
감독은 대사나 장면 제시와 같은 설명적 방식을 과감히 거두어내고 생략과 통제를 통해 전쟁이 이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드러내는데 무엇보다 회화와 같은 절묘한 세부묘사 능력이 탁월하다. 실제 영화는 박물관에 보관된 당시 소품들을 동원해 1945년의 시대상을 재현했다고 한다. 한 장면을 보자. 병원에서 퇴근한 이야가 파슈카를 목욕시킨다. 적록의 벽지들을 배경으로 녹색 상의의 이야가 붉은 수건으로 아이 몸의 물기를 닦고 있다. 밤의 실내는 희미한 천장 등, 뜯긴 벽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줄기, 침대 옆 스탠드에서 퍼져나오는 은은한 조명으로 다채로운 빛의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화면 왼쪽에서 담배 연기를 내뿜는 이웃 여자, 오른쪽 하단의 스탠드 불빛에 비친 뿌연 연기, 그리고 중앙 욕조에서 올라오는 옅은 수증기 등 공기도 다층적이다. 한 장면만으로도 감독이 이미지를 장악하는 장인적 수준을 확인할 수 있다.
주인공 이야는 늘 녹색 상의를 입고 있으며 그녀가 거주하는 공동주택의 벽은 빛바랜 초록색과 붉은색 벽지로 뒤덮여 있다. 실내 소품이나 패브릭도 동색 계열로 되어 있다. 중반에 비극적 죽음을 맞이하는 파슈카가 입은 옷은 붉은색이며 이야와 동거하는 마샤의 상의는 대개 붉은 계열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두 여자의 옷 색깔이 뒤바뀌어 있다. 이야는 피처럼 붉은 옷을, 그리고 마샤는 생동하는 녹색 옷을 입고 있다.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좁은 터널을 빠져나온 이야는 어디선가 뒤를 돌아다본다. 그녀의 손에는 어디선가 주워온 깨진 화분에 녹색식물이 심겨져 있는데, 나는 이것이 불모성 속에서도 그토록 생명을 욕망하는 마샤를 상징하고 있다고 느꼈다.
직관적으로 우리는 영화 속 녹색은 생명을, 붉은색은 피와 같은 죽음의 이미지를 지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빈폴>이 제시하는 상징은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 각기 명도와 채도가 다른 녹색과 적색이 있으며, 때로 이 두 색은 서로 뒤섞이거나 침투하기 때문이다. 녹색은 생명을 상징하지만 빛바랜 녹색은 군복, 즉 전쟁과 학살을 대리한다. 환자복으로 스며나오는 붉은 피나 마샤가 자주 흘리는 코피는 불모의 상징이지만 동시에 생명의 상징이기도 하다. 감독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서 영감을 받아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는 전쟁영화가 습관적으로 동원하는 젠더 관습, 즉 포용, 재생, 회복과 같은 여성 이미지에 갇혀 있지 않다. 대신 우아하고 절제된 방식으로 이야와 마샤, 나아가 생존의 최전선에 놓인 여성들의 가학성과 원초적 삶의 논리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는 인간 본성과 전쟁의 악함을 보여주려는 도덕주의에 견인된 것이 아니며 생존을 위해 불가피하게 야생적 공동체의 습속으로 돌아간 인간 퇴보의 반영일 뿐이다.
이야와 마샤의 의존적이며 마조히즘적 관계성의 역설은 녹색과 적색이 상호 침투하는 순간들에 확인된다. 서로의 신체를 감각하며 군인들에게서는 얻을 수 없었던 생명력을 느낄 때, 녹색 페인트는 두 여성의 신체에 얼룩을 남긴다. 핏자국이 녹색 원피스에 스며들어 비극을 암시하기도 하지만, 마지막 장면 이야의 얼굴에 흐르는 코피는 그녀가 여전히 살아 있음을 증거한다. 편집증적일 정도로 정교한 화면구성은 이 영화가 미학을 내세움으로써 윤리학을 동원했다는 비난의 단서가 될지도 모른다. 다만 고다르가 윤리학과 미학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 진실일지 모르지만 어느 한쪽을 선택하든지 항상 선택하지 않은 다른 한편이 있다는 것 역시 진실이라 했듯이, <빈폴>의 회화성은 그 반대편 인간 조건에 대한 영화적 장면화임은 분명하다.
씨네21 www.cine21.com
글 송효정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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