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낙관의 힘만으로 일어서지 못할 만큼 힘이 빠져 있을 때에도, 누군가 옆에서 “넌 빛이 난다”고 계속 말해주면 어느새 나도 그 사실을 믿게 된다.

<메리대구 공방전>

사람들은 종종 젊었던 시절을 돌아보며 배고프고 힘들어도 그 시절이 좋았다는 말을 한다. 난 그게 거짓말이라 생각한다. 사람의 기억은 간사해서, 현재의 고단함을 강조하기 위해 과거를 턱도 없이 미화하곤 한다. 어제는 아름다웠고 희망은 내일에 있는데 오로지 오늘만 아프고 지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루하루 벌어먹고 사는 일이 아무리 고단하고 지겨워도, 그 대열에 들어가 보기 위해 발버둥 치던 때의 막막함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죽을 만큼 노력했는데 기회는 나만 비켜가고, 세상은 짐짓 근엄한 얼굴을 하며 남들은 너보다 더 노력했다 말하고,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너무 가볍게 “희망을 잃지 않고 버티면 꼭 기회가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늘어 놓는다. 남의 일이니 말은 언제나 쉽지. 그런 말들이 원망스러워도 티도 못 낸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좋은 말 해줬는데 삐딱하게만 받아들인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그래도 그 시절이 좋았다는 말 속에 일말의 진실이 있다면, 그건 힘든 시절 옆에서 같이 앓아주는 누군가에 대한 기억 때문일테다. 내가 힘들 때 주전부리를 나눠 먹자며 선뜻 손을 내밀고 내가 울적할 때 곁에서 실없는 농담을 건네주는 이가 있다면, 나처럼 찌질하고 못난 그이가 곁에서 “지금의 너도 썩 괜찮으니 좌절하지 말라”고 말해준다면, 그 시절을 낙관으로 이겨 내는 일은 한결 쉬워진다. 세월이 지나며 힘들고 서러웠던 기억이 옅어진 자리에, 그렇게 소중했던 누군가의 기억만 선명하게 남는 거겠지. 오늘의 나는 결국 그간 겪어온 시련이 아니라, 그 시련을 극복하는 과정이 만들어 낸 존재인 셈이니까. 파도를 함께 넘고 산을 같이 오르며 시련을 극복하게 도와준 이들의 기억이, 젊은 날의 기억을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13년 전 방영된 <메리대구 공방전>(2007) 속 황메리(이하나)와 강대구(지현우)도 그런 사이였다. 뮤지컬 배우를 꿈꾸며 오디션을 보지만 매번 낙방하는 황메리나, 처음으로 출간에 성공한 무협소설이 크게 망한 뒤 동네 백수로 살고 있는 강대구 모두 멀리서 보면 한심하고 초라한 청춘이다. 못난 놈은 못난 놈을 알아보는 법이라고, 남산 근처를 지박령처럼 어슬렁거리던 둘은 이내 서로를 발견하고 티격태격 싸우기 시작한다. 컵라면을 사면 끼워주는 햇반 하나를 얻기 위해 싸워 대고, 동네 슈퍼마켓 알바 자리를 놓고 입사 경쟁을 펼치며 면을 서서히 터가며 두 사람은 서로가 퍽 닮았다는 걸 확인한다. 언제 무대에 서게 될지도 모르면서 매일 노래와 춤을 연습하는 메리나, 내 주겠다는 출판사도 없으면서 매일 한 페이지라도 거르지 않고 무협소설을 쓰고 있는 대구나. 저 멀리 빛이 보이는 걸 보면 이 길고 어두운 터널에도 분명 끝이 있을 거 같은데, 가도가도 끝이 나오지 않아 지치고 막막한 심정인 것을 서로서로 알아봐 준다.

그 막막한 마음을 “내 꿈은 충치야, 품고 있어도 아프고 빼 버리기도 아프다”라고 표현하면서도, 두 사람은 상대에게 치통도 언젠가 나을 날이 있을 거라 위로하는 걸 멈추지 않는다. “작가로 꼭 성공해.”, “꼭 붙어, 네가 선 무대는 눈부실 거야.” 거죽만 보면 남들이 쉽게 던지는 위로의 말과 하등 다를 게 없는 말들이지만 두 사람은 안다. 그 말은 나만큼 암담하고 한심한 진창을 구르는 이가 진심을 짜내서 어렵게 건네는 응원이라는 걸. 이렇게 기약 없이 버둥거리는 게 얼마나 진 빠지고 우울한 일인지 너무 잘 아는 사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잘 될 것’이라고 말하기 위해 크게 용기를 냈을 거란 걸.

그런 서로를 발견한 덕분에, 메리와 대구는 꿈을 이루기도 전에 벌써 행복하다. 비록 “남들 보기에 나도 한번쯤 폼나 보이고 싶다”고, 지금은 빛이 나는 게 아니라 “희끄무레”하다고 말하는 오늘이지만, 내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옆에서 “매일 공원에서 연습하던 걸로 충분히 감동”이었고 “노력하는 지금도 너무 멋져’라고 말해주는 사람을 찾았으니까. 내 어깨가 쳐졌을 때 등을 툭툭 두들겨주며 빠듯한 용돈을 쪼개 냉면을 사주고, 아껴가며 모아둔 피자박스 쿠폰을 모아 산 피자를 선뜻 같이 먹자고 말해주는 이가 있으니까. 내가 내 낙관의 힘만으로 일어서지 못할 만큼 힘이 빠져 있을 때에도, 누군가 옆에서 “넌 빛이 난다”고 계속 말해주면 어느새 나도 그 사실을 믿게 된다.

<메리대구 공방전>이 방영되던 그 해에 데뷔해 올해로 13년째 글을 쓰고 있는 나는, 가끔은 쉬지 않고 글을 토해내야 하는 오늘이 암담하고 지켜서 주저앉고 싶다 생각할 때가 있다. 사람의 기억은 간사하고 나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어서, 오늘은 지치고 아픈데 어제의 기억은 그럴싸해 보일 때가 있으니까. 그럴 때마다 난 메리를 떠올린다. 아직 기회조차 잡아보지 못한 채 여전히 남산 어귀의 슈퍼마켓에서 일을 하면서도, 자신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라는 조언을 들은 뒤 마침내 “전 이제 아무 때나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라고 말할 수 있게 된 메리를. 여전히 답 없고 지지부진한 오늘을 살지만 끝끝내 희망을 잃지 않은 덕분에 그 초라한 오늘마저도 사랑할 수 있게 된 메리와 대구를. 그들이 나에게 들려주었던 위로를.


이승한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