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2019)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나이 먹고 아이가 되는 어른들은, 어쩌면 그들의 삶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를 다시 방문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나의 외조부는 내게 평생 공부할 것을 당부했다. 내가 대학에 진학하기 전에는 좋은 대학에 갈 것을 당부했고, 내가 그의 기준에 못 미치는 대학에 진학한 후에는 대학원이나 유학에 대한 이야기를 넌지시 꺼내곤 했다. 당신의 외손자가 글 쓰는 직업을 가지게 되자 그는 아주 조금 안도한 눈치였지만, 그럼에도 공부하라는 당부는 잊지 않았다. 네가 꾸준히 배우고 익혀야 더 좋은 글을 쓸 것 아니냐며 공부를 멈추지 말라던 당부를 들을 때마다 난 웃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누가 교육청 공무원 출신 아니라고 할까 걱정이신지, 일평생 조언이라고는 공부하란 말씀이 전부시구나.

그런 외조부에게 말년에 찾아온 노인성 치매는 여러 모로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물론 외조부는 다른 이들에 비해 그 증상이 경미했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당신의 가족들을 모두 알아보았고, 그 덕에 자식들이 겪어야 했던 고생도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러나 생애 내내 지식 노동으로 가족을 부양하고 자기 삶을 꾸렸다는 자긍심이 대단했던 외조부에게 기억과 사고능력이 흐릿해진다는 건 큰 공포였으리라. 그래서 말년의 외조부는 기억이 더 흐릿해지기 전에 자신의 지식을 다음 세대에게 전달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온갖 것들을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했다. 가끔 외조부의 집을 방문할 때마다 그는 나를 불러 당신이 붓펜으로 써 내려간 각종 기록들을 보여주곤 했다.

안타깝게도 그가 남긴 기록들은 이미 오래 전에 그 의미를 잃은 관혼상제 가정의례였다. 1970년대 정부가 표준안을 제시해 규제하기 전, 오래 전에 외조부가 젊은 시절 배우고 익혔던 방식 그대로의 가정의례. 지금은 아무도 지키지 않아 가이드로서의 의미도 잃었거니와, 풍속사적 가치로 따지면 이미 더 상세한 기록과 연구를 담은 논문들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그런 기록. 나는 외조부가 손수 붓펜으로 쓰고 같은 내용을 필사해 여러 부를 묶어낸 관혼상제 가정의례를 보며 생각했다. 외조부의 기억이, 점점 당신이 세상의 주역으로 활동하던 시절인 찬란했던 젊음에 머무르기를 선택하고 있는 것 같다고. 당신의 지식이 높은 값어치로 평가되던 행복했던 시절에.

JTBC <눈이 부시게> 속 혜자(김혜자/한지민) 또한 젊은 시간의 기억으로 산다.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날 운명이었던 아버지 상운(안내상)을 구하기 위해 시간을 뒤로 돌리는 손목시계를 반복해서 사용한 탓에, 스물 다섯 혜자(한지민)는 혼자만 나이 먹어 70대의 노인 혜자(김혜자)의 몸으로 세상을 살게 된다. 몸은 70대의 노인인데, 스물 다섯으로 살던 시절은 손을 뻗으면 닿을 것처럼 가까이에 있다. 바로 어제까지 함께 놀던 친구 현주(김가은)와 상은(송상은)도 그대로인데, 기쁨과 아픔을 모두 함께 나누던 썸남 준하(남주혁)도 코 앞에 있는데. 혜자는 스물 다섯의 기억을 밑천 삼아 혼자만 나이 먹은 서러움과 두려움을 하루하루 이겨낸다.

드라마 방영 당시 화제가 된 탓에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그 정체를 알고 있을 반전은, 70대의 혜자가 정말 70대라는 것이다.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혜자의 기억은 예전 같지 않고, 그래서 그는 자신의 젊음과 현재가 뒤죽박죽 섞인 버전의 뒤틀린 스물 다섯을 산다. 연분홍 치마를 봄바람에 나풀거리며 젊고 가난한 준하와 함께 연애하던, 통금 단속을 피해 숨어들어간 골목에서 몰래 입을 맞추던 그 찬란했던 찰나의 기억을 꺼내어 그 시간 속에 머무른다. 아직 남편 준하(남주혁)가 고문으로 목숨을 잃기 전, 아들이 교통사고로 한 쪽 다리를 잃기 전, 혼자서 장애를 지닌 아들을 키우며 악착 같이 살아야 했던 시간이 펼쳐지기 전의 행복했던 찰나.

아직 젊은 내가 노화를 이해한다는 듯 넘겨짚는 오만을 떨 생각은 없다. 다만 가끔 멀쩡하게 떠올릴 수 있었던 배우의 이름이나 작품 제목이 가물거릴 때마다, 나는 나처럼 지식 노동으로 생계를 꾸렸던 나의 외조부가 겪었을 불안과 공포를 상상하곤 한다. 과거의 행복했던 기억들은 아직도 탄탄한데 최근 기억들부터 바스러지는 걸 느끼며,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어쩌면 그래서 당신의 기억 중 가장 선명하게 떠오르는 시절, 해방된 조국에서 혼례를 올리고 아이를 낳아 키우며 교육청에 출근해 새 조국을 건설할 지식인을 키워낸다는 자긍으로 박봉을 견뎌내던 시절의 행복을 열심히 기록했던 건 아닐까? 온 동네에 밥 짓는 냄새가 퍼져 나가는 저녁, 아들의 손을 잡고 준하의 퇴근길을 마중 나와, 세 가족이 함께 노을을 보던 순간의 행복으로 세상의 고통을 견뎌낸 혜자처럼.

여전히 난 기억이 완전히 바스러지는 게 어떤 경험인지 알지 못한다. <눈이 부시게>는 그걸 고통이나 공포로만 그리는 대신, 가장 행복한 버전의 추측을 자아내 조심스레 우리에게 건넸다. 나이 먹고 아이가 되는 어른들은, 어쩌면 그들의 삶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를 다시 방문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부디 그 추측이 정답이기를, 부디 그들이 눈부신 행복의 시간 속에서 더는 두렵지도 아프지도 않기를 바란다.


이승한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