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할리우드 영화는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슈퍼히어로 영화와 나머지. 마블과 DC라는 양대 산맥에 유니버설 스튜디오도 ‘다크 유니버스’ 이름으로 이 대열에 합류했다.
슈퍼히어로 영화는 애들이나 보는 유치한 영화에서 할리우드의 주류가 됐다. 마블의 수장 케빈 파이기의 말 한 마디는 당장 뉴스가 된다. 거의 신의 계시를 받는 느낌이다. 엄청난 돈을 쓸어담는 슈퍼히어로 영화에 쟁쟁한 배우, 감독이 참여하는 것도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그런 가운데 여전히 슈퍼히어로 영화에 출연하지 않는 배우, 연출을 거절한 감독이 있다. 그들의 사연이 궁금하다.
리들리 스콧
슈퍼히어로 영화를 거절한 사람으로 리들리 스콧 감독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는 2016년 말 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슈퍼히어로 영화를 연출하지 않는 이유를 밝힌 바 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은 “슈퍼히어로 영화는 내 취향이 아니다. 여러 번 제안을 받았고, 왜 찍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나는 슈퍼히어로 영화의 비현실적인 상황 속의 얇고 가는 ‘비단 밧줄’을 믿지 않는다. 그런 종류의 영화를 만든 적이 있다. <블레이드 러너>는 당신이 생각할 때 만화다. 그것은 비현실적인 세계의 어두운 이야기이다. 당신은 배트맨이나 슈퍼맨을 그 세계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좋은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핵심은 ‘좋은 스토리’다. 리들리 스콧 감독은 코믹북 원작의 영화에서 좋은 스토리가 나오기 힘들다고 생각하고 있다. 80세의 노장다운 생각이라고 해야 할까. 그는 “슈퍼히어로 영화가 영화의 질을 하향평준화한다”는 생각도 갖고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
지금 슈퍼히어로 영화의 지위는 어쩌면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나이트> 3부작 이후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영화는 이전과 달랐다. 3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을까. 크리스토퍼 놀란 역시 슈퍼히어로 영화는 ‘이제 그만’을 외쳤다. 필름을 고수하고 CG를 거부하는 감독의 성향과 썩 어울린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최근 개봉한 <덩케르크>를 보면 앞으로 크리스토퍼 놀란의 슈퍼히어로 영화는 확실히 보기 힘들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럼에도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나이트> 3부작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슈퍼히어로 영화의 연출에서 손을 뗐지만 <맨 오브 스틸>의 원안,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 <맨 오브 스틸>의 제작자이기도 하다.
한스 짐머
한스 짐머 역시 슈퍼히어로 영화에서 은퇴하겠다고 밝혔다. 존 윌리엄스, 엔니오 모리코네와 더불어 대중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영화음악가인 한스 짐머는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이 마지막 작품이 됐다.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의 결정적 장면으로 많은 이들이 원더우먼(갤 가돗)의 등장 신을 꼽는다. 그 장면에서 원더우먼 솔로무비 <원더 우먼>이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원더우먼의 등장을 더욱 극적으로 만든 건 원더우먼 테마인 ‘Is She With You?’다. 한스 짐머와 정키 XL이 만들었다. 한스 짐머와 크리스토퍼 놀란은 오랜 파트너다. <덩케르크> OST 역시 그의 작품이다. 두 사람은 서로 적지 않은 영향을 주고받는 듯하다.
조쉬 하트넷
이제는 조금씩 그의 이름이 잊혀지고 있다. 조쉬 하트넷은 슈퍼히어로 거절의 대명사다. 그가 거절한 배역은 배트맨, 슈퍼맨, 스파이더맨이다. 세상에! 샘 레이미, 크리스토퍼 놀란, 브라이언 싱어 감독이 그의 거절을 받아들여야 했다. 조쉬 하트넷이 이 배역을 거절한 이유는 “배트맨, 슈퍼맨, 스파이더맨 등 슈퍼히어로 캐릭터로 이미지가 고정되는 게 싫어서”였다고 한다. 만약 그가 셋 가운데 하나라도 승낙했으면 어땠을까. 어쩌면 휴 잭맨처럼 17년 동안 울버린으로 살다가 박수 받고 떠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호아킨 피닉스
이 배우와 슈퍼히어로 영화는 좀 안 어울리는 느낌이긴 하다. 호아킨 피닉스는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페르소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인히어런트 바이스>, <마스터> 등에 출연했다. 그런 그에게 닥터 스트레인지(베네딕트 컴버배치) 배역 제안이 있었다. 호아킨 피닉스는 “그린매트로 둘러싸여 있는 스튜디오에서 촬영하는 것이 불편할 것 같다”는 이유로 배역을 거절했다.
멜 깁슨
멜 깁슨은 <토르> 시리즈의 오딘(안소니 홉킨스) 역을 거절했다. 이유는 밝히지 않았다. <매드맥스> 3부작, <리썰 웨폰> 시리즈 등 1980~90년대 초반 액션 배우였던 그가 슈퍼히어로 영화를 거절한 것은 어떤 이유일까. 추측을 해볼 수 있겠다. 최근 진지해지는 그의 필모그래피(<핵소 고지>)에서 이유를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오스카를 향한 그의 여정은 길고 길었다. 2016년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로 드디어 그 꿈을룬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역시 슈퍼히어로 영화 출연 제안을 받았다. 최근의 일은 아니다. 꽤 오래 전의 일이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1990년대 제작된 <배트맨> 시리즈의 로빈 역에 캐스팅될 뻔했다. 그는 “아직 준비가 안 됐다”는 식으로 거절했다. 그리고 선택한 게 <타이타닉>이었다. 샘 레이미 감독도 그에게 제안을 했다. 조쉬 하트넷이 먼저였는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먼저였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어쨌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스파이더맨> 3부작의 스파이더맨 역할도 로빈 때와 비슷한 이유로 거절했다. 결국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은 토비 맥과이어가 차지했다.
존 햄
미드 <매드맨>의 주인공으로 많이 알려진 존 햄 역시 슈퍼히어로 영화를 거절한 배우다. 그가 거절한 배역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어떤 배역인지 몰라도 그가 거절한 이유는 공개됐다. “한번 슈퍼히어로 출연을 하게 되면 앞으로 10년은 그 역할을 해야 하는데 그게 싫다”는 게 이유다. 어쩌면 조쉬 하트넷과 비슷한 이유라고 볼 수 있겠다. 약간 다르긴 한데 슈퍼히어로 이미지를 갖는 게 싫다기보다는 그 이미지를 오랫동안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게 싫다는 식이다. 도긴개긴인가.
맷 데이먼
맷 데이먼은 ‘결정적 거절’을 한 배우다. 그는 무려 데어데블 역을 거절했다. “시나리오가 별로라는 이유”였다. 그 자리는 친구 벤 애플렉이 가져갔다. <데어데블> 이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맷 데이먼에게 <다크나이트>의 하비 덴트/투페이스(아론 에크하트) 역을 제안하기도 했다. 맷 데이먼은 스케줄 사정으로 배역을 거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맷 데이먼의 슈퍼히어로는 앞으로 보기 힘들지 않을까. 친구 벤 애플렉은 배트맨으로 활약 중이다.
아래 언급하는 배우들은 슈퍼히어로 영화를 거부·거절했다기보다 사정에 의해서 출연하지 못한 경우다. 위의 감독, 배우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처음 제안을 거절한 뒤 뒤늦게 슈퍼히어로 영화에 분류될 만한 작품에 출연하기도 했다.
에밀리 블런트
에밀리 블런트의 사정은 조금 다르다. 슈퍼히어로 영화가 싫어서라기보다는 출연료가 문제였다. 에밀리 블런트는 블랙 위도(스칼렛 요한슨) 역을 제안 받았다. 개런티가 맞지 않아 거절했다. 지금 그녀는 그 결정을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스칼렛 요한슨은 할리우드에서 가장 몸값이 높은 여자 배우가 됐다. 에밀리 블런트는 이후 <퍼스트 어벤져>의 페기 카터 역도 거절했다. 여러 사정이 있었겠지만 마블 영화 속 에밀리 블런트를 언젠가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톰 크루즈
슈퍼히어로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아이언맨. 톰 크루즈가 그 아이언맨이 될 뻔한 건 매우 유명하다. 물론 지금 와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아닌 토니 스타크/아이언맨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마블의 성공에 배가 아팠을까. 그는 <미이라>로 또 다른 슈퍼히어로의 세계에 결국 들어오고 말았다.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면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의 에단 헌트만 열심히 했으면 좋겠다.
매튜 맥커너히
매튜 맥커너히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제임스 건 감독에게 출연 러브콜을 받았지만 거절했다. 아마도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2>에서 커트 러셀이 연기했던 에고 역이 아닐까 추측해볼 수 있다. 로맨틱코미디 영화의 청춘 스타에서 진지한 배우로 변신을 거듭한 매튜 맥커너히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으로 오스카 트로피를 받기도 했다. 매튜 맥커너히는 마블의 제안을 거절하고 슈퍼히어로 영화라고 하기에는 조금 애매한 <다크 타워: 희망의 탑>에 출연했다. <다크 타워> 시리즈는 마블에서 출판한 그래픽노블이 있지만 원작은 스티븐 킹의 소설이다.
그밖에 제시카 차스테인이 <앤트맨 앤 와스프>의 와스프와 <아이언맨3>의 마야 한센 역을, 올리비아 와일드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가모라 역을, 알렉 볼드윈이 알려지지 않은 마블 영화(아마도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를 거절했다. <수어사이드 스쿼드>에 출연한 윌 스미스는 2006년 개봉한 <슈퍼맨 리턴즈>에 슈퍼맨을 제안 받았다. 백인들의 영웅이었던 슈퍼맨에 흑인을 캐스팅한 파격적인 제안은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 제임스 본드로 활약했던 피어스 브로스넌 역시 슈퍼히어로 영화를 거절했다. 팀 버튼의 <배트맨>의 배트맨 역이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2년 전쯤 슈퍼히어로 영화를 과거 할리우드에서 번성했다가 사라진 서부극에 비교한 적이 있다. 그의 말을 좀더 들어보자. “지금 슈퍼히어로 영화는 살아있고, 매우 번성하는 중입니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대중문화에서 이러한 사이클의 시간은 무한하지 않다는 거예요. (슈퍼히어로 영화 같은) 신화적인 스토리는 지금 몇몇 젊은 영화제작자들이 고민하고 있을 새로운 장르로 대체되는 날이 올 겁니다.”
또 최근 아이언맨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슈퍼히어로 영화의 은퇴를 언급한 바 있다. 그는 “부끄러워지기 전에 그만두고 싶다"고 말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발언이 틀리지는 않은 것 같다. 다만 슈퍼히어로 영화를 대체할 새로운 장르가 빠른 시간 안에 나올 것 같진 않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생각하는 ‘부끄러운 영화’가 나오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고백하자면 이 포스트는 “워너브러더스가 <원더 우먼>을 내년 아카데미 시상식의 작품상과 감독상으로 밀고 있다”는 뉴스를 보고 시작했다.
마블 슈퍼히어로 영화의 본격적인 등장 이후 슈퍼히어로 영화가 더 이상 유치한 코믹북 원작 영화가 아닌 시대가 시작됐다. 지금은 슈퍼히어로 영화가 ‘작품’으로 인정받으려는 느낌이다. 누군가는 슈퍼히어로 영화의 확장에 박수를 보낼 것이고, 누군가는 슈퍼히어로 영화에 피로감을 호소할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에디터는 후자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신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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