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메오(애드리언 티티에니)는 현재 중산층 가정의 가장이자 의사로 살고 있습니다. 로메오에겐 연약한 아내 마그다(리아 버그나)와 영국 캠브리지 대학으로의 유학을 앞둔 딸 엘리자(마리아 빅토리아 드래거스)가 있고, 로메오는 엘리자의 학교 선생 산드라(말리나 마노비치)와 불륜 관계이기도 합니다.

어느 날, 엘리자는 중요한 시험 전날 괴한에게 폭행을 당하고 그 트라우마로 시험을 망칩니다. 로메오는 엘리자가 유학을 가지 못할까 걱정돼 교육 관계자에게 시험에 관한 ‘선처’를 부탁합니다. 경감(블라드 이바노브)은 응당 폭행을 가한 가해자를 찾아 구속할 책임이 있음에도 자신의 건강이 좋지 않은 지인 불라이를 로메오가 잘 살펴주면 가해자 색출에 더욱 노력하겠다고 로메오를 설득합니다. 로메오는 불라이를 따로 신경 써주긴 하지만 불라이가 내미는 봉투는 받지 않습니다. 로메오와의 관계를 분명히 하길 원하는 산드라는 어린 아들 마테이에게 로메오의 존재를 알리고 로메오의 결단을 종용합니다. 경찰과 환자 불라이, 로메오와 불륜 중인 산드라와 교육 관계자들이 엘리자의 문제로 한 데 얽히게 됩니다.

엘리자의 사건으로 엮이는 인물들은 자신의 비리와 부정이 알고 지내는 사람들끼리의 호의나 어려운 처지의 지인을 굽어살피는 아량인 양 행세합니다. 이 길이 최선이라 자위하기도 합니다. 루마니아의 고된 현실 안에서 그 말은 일부 사실이기도 합니다. 로메오가 악착같이 엘리자의 시험에 집착하는 까닭도 엘리자에게만은 자신의 세대와는 다른 삶을 살게 하고 싶어서 입니다. 영국으로의 유학만이 엘리자가 루마니아를 떠나도록 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한 때 루마니아 민주화 운동에 몸을 던졌던 로메오는 크게 바뀌지 않는 현실에 절망한 상태입니다. 로메오의 아내가 종종 긍정과 윤리를 이야기하지만 정작 아내는 자기 몸 하나 지탱하기 버거워 보이고, 엘리자에게 인간적인 연민을 드러내며 올바른 교육에 관해 로메오를 타이르는 노모는 금방이라도 세상을 떠날 듯 위태롭습니다. 비참한 현실에 도덕과 정의는 무너진지 오래입니다. 때때로 어디선가 돌덩이가 날아와 로메오 집의 유리창과 차창을 깨부수곤 합니다. 깨진 유리는 어쩌면 로메오의 상처 입은 양심을 은유하는지도 모릅니다. 얼마 뒤 로메오는 마음을 고쳐먹습니다. 새로운 세대인 엘리자와 마테이는 같은 현실 안에서 어떤 어른으로 자라게 될까요.

감독 크리스티안 문주에 관하여

1968년, 루마니아에서 출생한 크리스티안 문주는 이아시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뒤 교사와 저널리스트로 일했습니다. 그 뒤 부쿠레슈티 영화학교에서 연출을 공부했고 몇 차례의 단편을 내놓은 뒤 하우스푸어 청년들의 좌절과 서방을 향한 동경을 묘사한 장편영화 <내겐 너무 멋진 서쪽 나라>(2002)로 감독 데뷔했습니다.

제60회 칸영화제에서 혜성처럼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두 번째 장편 <4개월 3주… 그리고 2일>(2007)은 차우세스쿠 독재정권 시절이었던 1987년에 법으로 금지돼 있던 낙태를 선택한 여성들을 다룬 영화입니다. 주인공 오틸리아(아나마리아 마린차)는 부유한 남자친구 아디와의 유희 대신 뜻하지 않게 임신한 어리숙한 친구 가비타(로라 바실리우)의 고통을 함께 떠 안는 길을 택합니다. 영화는 낙태 당사자인 가비타가 아닌, 곁에서 가비타를 지켜보며 그 수발을 들어주는 친구 오틸리아의 시점으로 진행됩니다.

오틸리아가 가비타를 돕는 모든 과정은 우정과 인간애에서 나온 따스한 연대라기보다 냉정한 현실 인식에 바탕한 것으로 보입니다. 의도적으로 남성의 역할이 제거된 이 영화에서 같은 처지에 놓인 두 여성(과 기숙사 내의 다른 여성들)은 서로를 도와야만 생존할 수 있습니다. 아디의 우유부단한 무신경함, 낙태 시술자인 미스터 베베(블라드 이바노브)의 잔혹성은 캐릭터와 행위에 대한 도덕적 판단에 앞서 약자 가비타와 오틸리아가 놓인 현실을 부각합니다. 최악의 상황만은 피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리게 만들면서도 그들이 놓인 현실이 나아지리란 낙관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세 번째 장편 <신의 소녀들>(2012)은 실제 루마니아에서 일어난 사망 사건을 바탕에 두고 두 여성이 종교의 억압에 갇혀 비극적 상황에 처하게 되는 과정을 그립니다. 어린시절 함께 고아원에서 자란 알리나(크리스티나 플루터)와 보이치타(코스미나 스트라탄)는 헤어져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알리나는 일반 가정에 입양돼 독일로 떠나 있었고, 보이치타는 루마니아의 수도원에서 지냈습니다. 세속과 문명에 익숙한 알리나의 눈에 보이치타와 수도원 사람들의 생활은 지나치게 억압적으로 보입니다. 반면 보이치타는 사회에서 변질되어 돌아온 알리나가 신의 품 안에서 삶의 의미를 찾길 바랍니다. 수도원에서는 알리나 몸 속에 깃든 악마를 퇴치하기 위한 모종의 의식을 벌입니다. 하루 뒤 알리나는 사망하고, 보이치타는 법정에서 수도원에 불리한 증언을 합니다. 두 여성은 둘로 갈라졌으나 결국 하나였음이 드러납니다.

전작 <4개월, 3주… 그리고 2일>과 마찬가지로 <신의 소녀들>에서 두 여성의 발목을 붙잡는 것은 역시 경제적 빈곤입니다. 종교는 현실의 어떤 문제도 제대로 해결해주지 않고, 공공기관과 병원도 약자를 책임지지 못합니다. 영화는 루마니아의 억압적인 시스템을 은유하며 맹목적인 믿음과 개인의 독단이 부딪힌 자리에서 발생하는 폭력의 결과를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신의 소녀들>은 제65회 칸영화제에서 각본상과 여우주연상(크리스티나 플루터, 코스미나 슈트라탄)을 수상했습니다. 네 번째 장편 <엘리자의 내일>도 제69회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습니다. 칸이 사랑하는 감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네요. 크리스티안 문주의 세 작품에 드러난 루마니아의 현실은 마냥 남의 나라 일처럼만 여겨지지 않습니다. 다만 크리스티안 문주는 신작 <엘리자의 내일>에서만큼은 희망을 묘사합니다. 부정이 발생했을지언정 그 끝은 낙관입니다. 그들의, 우리의 사회는 더 나은 곳을 향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윤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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