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무대와 스크린을 오가며 오랜 무명생활을 거친 김선영은 출세작 <응답하라 1988> 이후 부지런히 작품 활동을 이어오며 한국영화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여성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문소리, 장윤주와 자매를 연기해 지금까지 보여준 것과 전혀 다른 인물을 보여준 최신작 <세자매>에 이르기까지, 영화 속 김선영의 모습들을 연대별로 정리했다.

열애기 & 모순, 2004

1995년 연극 무대에서 연기를 시작한 김선영은 2004년 전주국제영화제를 통해 두 개의 영화 작업을 선보였다. 안선경 감독의 <열애기>와 이승원 감독의 <모순>이다. 뮤지션 백현진과 호흡을 맞춘 <열애기>에선 아내와 창녀 1인 2역을 소화했다. 공공장소에서 욕설을 퍼붓다가 만난 두 남녀가 로버트 레드포드를 이야기하다가 가까워지는 과정을 그린 <모순>을 통해 처음 만난 이승원 감독과 훗날 부부가 됐다.

잠복근무, 2005

김선영의 첫 장편영화. 강력계 형사 천재인(김선아)은 조폭 부두목의 소재를 찾기 위해 그의 딸 차승희(남상미)가 다니는 고등학교에 위장 잠입한다. 김선영은 수학 선생님 역을 맡았다. 살짝 허스키한 목소리와 경상도 사투리로 전학 첫날인 재인에게 전교 1등인 승희가 틀린 문제를 풀어보라고 시킨다.

아이스케키, 2006

60년대 말 시골을 배경으로 한 <아이스케키>에선 주인공 영래(박지민)와 엄마(신애라)가 사는 마을에서 술집을 하는 춘자를 연기했다. 영화 초반부터 등장해 영래 엄마와 대차게 싸우고, 영래에게 죽은 줄로만 알고 있던 아버지의 존재를 알려준다. 얽은 얼굴을 감추고자 짙은 화장을 한 춘자는 목청껏 전라도 사투리를 내뱉으며 영래 엄마와 티격태격하면서도 우정을 이어간다.

위험한 상견례, 2011

<아이스케키> 이후 5년 만에 작업한 영화. 전라도 청년 현준(송새벽)은 경상도 집안 여자친구 다홍(이시영)과의 결혼을 허락받기 위해 부산에 가서 벌어지는 사건을 코믹하게 그렸다. 현준의 뒤를 밟아 따라온 형 대식(박철민)이 부산에서 만나는 슈퍼마켓 주인이 바로 김선영이었다. 지역감정을 소재로 해 사투리 연기가 중요한데, 롯데 껌이 아닌 해태 껌을 찾는 대식의 속을 뒤집어놓는 '카메오' 김선영의 단 1분짜리 사투리는 짧지만 강력했다.

음치클리닉, 2012

<위험한 상견례>의 김진영 감독은 이듬해 신작 <음치클리닉>에 꽤나 비중 있는 역할로 김선영을 캐스팅했다. 음치클리닉의 수강생 중 한 명인 이형자는 남편(송새벽)의 폭력에 시달리고 음치라 아이에게 자장가도 못 불러주는 소심한 가정주부지만, 클리닉 사람들과 우정을 쌓으면서 점차 자신감을 회복해 관중들 앞에서 임상아의 '뮤지컬'을 부른다.

국제시장, 2014

<국제시장> 속 김선영의 캐릭터는 '오영자랑 싸우는 아지매'다. 덕수(황정민)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사이, 혼자 부산에서 '꽃분이네'를 운영하는 영자(김윤진)에게 웃음을 팔며 장사를 한다며 시비를 붙여 드잡이를 벌인다. 어머니 캐릭터를 남편이 없다고 공격하는 건 <아이스케키>의 춘자와 꽤나 비슷하다.

소통과 거짓말, 2015

김선영의 이름을 널리 알린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 방영되기 한 달 전, 남편 이승원 감독과 함께 한 영화 <소통과 거짓말>이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공개됐다. 10분에 육박하는 롱테이크로 이루어진 오프닝 가운데, 학원 교사들과의 기행을 두고 주인공 장선(장선)에게 따져 묻는 학원 실장을 연기해 8분 동안 카메라를 장악했다. 더불어 영화 중/후반에 등장하는 슈퍼마켓 주인까지 1인 2역을 소화했다.

미씽: 사라진 여자, 2016

김선영의 캐릭터는 심드렁함과 괄괄함을 오가는 특유의 코믹 연기로 어두운 영화의 분위기를 잠시 환기시키곤 했다. <미씽: 사라진 여자>도 그중 하나. 싱글/워킹맘 지선(엄지원)이 딸을 데리고 사라진 조선족 보모 한매(공효진)를 쫓는 과정을 그리는 영화에서 한매가 과거 일했던 안마시술소 사장으로 나왔다. 지선과 한매의 처지 따위 관심 없이 매출을 망치는 데에만 혈안이 된 사장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은 경직된 분위기에 잠시 실소를 터트리게 했다.

원라인, 2016

<원라인>의 김선영은 이전 영화들에 비해 힘을 한껏 덜어냈다. 민재(임시완)가 이끄는 대출 사기단 '원라인'의 홍일점 멤버 홍대리는 한번도 핏대 세워 화를 내지 않는다. "아침저녁으로 우체통을 쎄가 빠지게" 뒤져서 확보한 2만 개의 개인정보로 원라인의 세를 넓히게 하지만, 점점 더 비윤리적인 방법을 택하는 민재를 경계한다.

당신의 부탁, 2017

<당신의 부탁>은 죽은 남편이 전처와 사이에 둔 아들 종욱(윤찬영)을 가족으로 맞게 되는 여자 효진(임수정)의 이야기다. 영화의 영어 제목은 'Mothers'인데,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엄마인 효진과 종욱의 친모일지도 모르는 연화(김선영)를 가리키는 말이다. 효진과 연화는 영화 중반 이후에야 만나는데, 한밤중에 연화의 집에서 나긋나긋 대화를 나누는 설정이라 눈보다는 귀로 김선영의 섬세한 연기를 만끽할 수 있다.

허스토리, 2017

<응답하라 1988>로 이름을 알린 후 김선영의 필모그래피는 여성 캐릭터의 활약이 두드러지는 영화들로 채워졌다. 김희애와 호흡을 맞춘 <허스토리>는 김선영과 주연/여성 배우와의 '케미'가 유독 돋보였던 작품이다. 돈만 좇던 여행사 사장 문정숙(김희애)이 부산 일본 강제위안부 대책협의회 회장을 맡게 하고 예상치 못하게 사비까지 털어 성심을 다하는 정숙을 뜯어말리기까지 하는 신사장을 연기해, 열혈 여성 관객들의 '덕력'에 불을 지폈다.

미쓰백, 2018

<미쓰백> 속 김선영은 본격적으로 참담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등장해 코믹한 분위기를 확 불어넣는다. 식당을 운영하는 장후남(김선영)은 강력계 형사인 동생 장섭(이희준)이 백상아(한지민)에게 마음을 쓰는 게 못마땅해 한껏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김선영의 특기인 구성진 사투리로 내뱉는 거의 원맨쇼에 가까운 신세한탄은 결국 동생을 향한 애정으로 흘러간다. 정감이 뚝뚝 묻어나는 후남은 드문드문 등장해 <미쓰백>의 보는 관객들의 얼어붙는 마음을 얼마간 녹여준다.

말모이, 2018

<말모이>는 김선영이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도 하나 해보고 싶다 생각하던 즈음 때맞춰 찾아온 작품이었다. 조선어학회 회원인 구자영(김선영)은 학회의 비밀서고와 사무실이 있는 '문당책방'을 운영하면서 까막눈인 판수(유해진)에게 글을 가르치며 '말모이'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영화의 다채로운 재미를 위해 김선영이 직접 자영과 판수의 로맨스를 넣자고 감독을 설득했으나 결국 거절당했다고. 그럼에도 판수를 대하는 자영의 태도엔 애정이 물씬 묻어난다.

겨울밤에, 2018

춘천을 배경으로 한 영화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장우진 감독의 <겨울밤에>엔 카메오로 참여했다. 흥주(양흥주)는 아내 영주(서영화)와 함께 30년 만에 춘천에 찾아오지만, 잃어버린 휴대폰을 찾다가 서로 다른 여정을 지난다. 장우진 감독과 영화제 뒤풀이에서 처음 만나 그 자리에서 카메오 출연을 제안받은 김선영은 흥주의 옛 연인 해란을 연기했다. 술에 취한 채 실제인 듯 환상인 듯 펼쳐지는 8분 남짓한 포장마차 롱테이크는 불과 촬영 하루 전 스태프들과 자리를 같이하며 만들어낸 호흡에서 비롯됐다.

내가 죽던 날, 2020

<내가 죽던 날>은 들뜨는 호흡 없이 느릿느릿, 오랜만에 현장에 돌아온 형사 현수(김혜수)가 범죄 사건의 증인이었지만 스스로 목숨을 내던진 소녀 세진(노정의)의 행적을 추적하는 과정을 그린다. 과거 사건을 맡았던 옛 동료 민정(김선영)은 소녀의 죽음에 점점 이입하는 현수를 돕는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서히 변화하는 민정의 태도는 진심 어린 친구의 응원과 걱정은 모두 지지의 표현이란 걸 깨닫게 한다.

세자매, 2021

이승원 감독의 세 번째 장편 <세자매>에서도 김선영의 활약은 두드러진다. 자매이긴 하지만 서로 만나기를 꺼려하는 세 여자의 삶을 교차하며 보여주는 영화에서 김선영은 맏언니 희숙을 연기한다. 모두가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미연(문소리)과 미옥(장윤주)에겐 그나마 살아갈 숨통 정도는 있는 반면, 암에 걸렸지만 남편과 딸에게도 의지할 수 없는 희숙의 삶은 그가 운영하는 꽃집처럼 캄캄할 뿐이다. 매사에 미안하다는 말은 달고 사는 희숙에게 빛이 내려오길 바라며 그의 위태로운 삶을 지켜봐야만 한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