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주인공이었던 적은 거의 없었다. 왜소한 몸 때문에 더 커 보이는 아코디언을 매고 6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연주해 왔지만 늘 스포트라이트에서 벗어나 있었다. 일흔이 넘어 발표한 정규 앨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심성락이란 이름이 좀 더 많이 세상에 알려졌지만 그 전까지 그는 스튜디오 세션 연주자의 위치에 만족해야 했다. 기타나 키보드 같은 필수 악기도 아니었고, 양념처럼 맛을 더할 때나 아코디언이 더해지곤 했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아코디언은 곧 심성락이기도 했다. 양념을 쳐야 하는 그 미묘한 순간엔 늘 심성락의 손맛이 필요했다. 고등학생 때 악기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 아코디언을 처음 접했지만 악기를 다루는 데 타고난 재능이 있었다. 초등학생 때는 혼자서 풍금을 연주하는 법을 깨우쳤고 아코디언 역시 처음엔 주인 몰래 독학으로 연마했다. 그로부터 60년 가까이 경력을 쌓고 신뢰를 얻었다.

한국 음악에서 아코디언 연주가 나올 때 크레디트를 보면 거기에는 대부분 심성락이란 이름이 적혀있었다. 최희준, 나훈아부터 신승훈, 장윤정까지 장르와 연령을 가리지 않고 긴 세월 동안 사이드맨으로 묵묵히 자신의 연주를 들려줬다. 한국음악실연자협회에 등록된 연주곡만 7천 곡이 넘고 음반은 1천 장이 넘는다는 기록 자체가 아코디언 연주자로서 심성락의 위상을 보여준다.
 
영화음악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아코디언 소리가 필요할 때 수많은 가요 작·편곡가들이 그를 찾았던 것처럼 역시 많은 영화음악가들이 그의 아코디언 연주를 필요로 했다. 특히 영화음악 전문 프로덕션인 M&F에 속해있는 조성우, 박기헌 같은 영화음악가들과 좋은 호흡을 보여줬다. 아직까지도 수많은 이들의 귓가에 맴돌고 있는 <봄날은 간다>, <효자동 이발사> 안의 아코디언 선율이 심성락의 것이다.

그의 첫 정규 앨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독특한 작품이었다. 새롭게 창작한 곡들과 함께 그가 그동안 연주해온 대표 영화음악을 한 앨범에 담았다. 스스로의 표현대로 '하이클래스'한 곡들이 때로는 서정적으로, 때로는 비장하게 연주된다. 하지만 영화음악 안에서 그의 아코디언 연주는 따뜻하고 정겹다.

광고에도 쓰이며 많이 알려진 영화 <인어공주>'My Mother Mermaid', <봄날은 간다>의 메인 테마인 'One Fine Spring Day', <효자동 이발사>'자전거' 같은 곡들에서 그는 바람통을 통해 흘러나오는 소리로 수많은 이들의 귀를 사로잡고 감동케 했다. 엔니오 모리코네가 만든 <러브 어페어>'Love Affair Theme' 역시 마치 처음부터 자신의 연주였던 것처럼 서정적인 바람의 소리를 연출해낸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는 담겨 있지 않지만 <와일드 카드>'Main Theme', <죽어도 좋아>'프롤로그', <신석기 블루스>'석기의 수난시대' 같은 곡들에서도 심성락이란 인장이 찍힌 연주를 들을 수 있다. "노래하듯 연주한다"는 그의 말처럼 그의 아코디언 소리는 자연스럽고 친숙하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꽃밭에서- 심성락&리차드갈리아노

때론 서늘하기도 하고 때로는 또 한없이 다정하다. 볕이 좋은 봄날에도, 오늘처럼 흐리고 비 내리는 여름날에도 그의 아코디언 소리는 언제 어디서나 잘 어울린다. 정훈희의 노래로 유명한 '꽃밭에서'를 세계적인 아코디언 거장 리차드 갈리아노와 함께 연주하는 영상이 있다. 연주를 마친 뒤 리차드 갈리아노는 나직하게 "뷰티풀"이라 말한다. 그 표현만큼 심성락의 연주와 어울리는 말도 또 없을 것이다. 영화 보기 좋은 날이다. 심성락의 연주 듣기 좋은 날이다.


김학선 / 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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