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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모든 임신은 축복일까? 〈나의 피투성이 연인〉유지영 감독

씨네플레이
〈나의 피투성이 연인〉포스터. 사진 제공=디오시네마

모든 임신은 축복일까? 함께하기 위해 나를 희생해야 한다면 그 관계는 옳은 것일까? <나의 피투성이 연인>(감독 유지영)이 던지는 묵직한 질문이다. 비혼, 비출산, 장기 동거커플로 삶의 균형을 맞춰온 ‘재이’(한해인)와 ‘건우’(이한주)는 계획에 없던 임신으로 위기를 맞는다. 엄마보다 작가이길 원하는 재이와 생겨난 아이와 함께 하는 가족의 미래를 꿈꾸는 건우는 맞닿지 않는 평행선을 이룬다. 영화는 커리어를 우선하는 여성의 선택이 이기심으로 치부되는 차별적인 시선과 성 역할의 고정관념에 따른 부담감 등 사회적 평가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인물의 초상을 감정의 단계를 차곡차곡 쌓아가며 폭발시킨다.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프리미어를 시작으로 제48회 서울독립영화제, 제25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제18회 파리한국영화제, 제10회 마리끌레르영화제 등 유수의 영화제에서 호평받으며 화제를 모았다. 특히, 역사와 권위를 자랑하는 동유럽 최고의 영화제 제57회 카를로비 바리 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한 유일한 한국 영화로 프록시마 그랑프리(대상)를 수상하며 한국 영화의 위상을 높였다.

글로벌 평단은 <나의 피투성이 연인>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마틴 호리나 카를로비 바리 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는 “여성이 자신의 몸에 일어나는 일을 결정할 때보다 부모됨의 금기와 모성에 대한 선입견을 깨뜨려야 할 때가 또 있을까?”라고 평했으며, 다비드 트레들러 파리한국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 또한 “여성의 욕망에 관계없이 고전적인 가족 패턴을 따르도록 여성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압력을 들여다본다. 유지영 감독은 등장인물의 심리를 깊숙이 파고들며 자국의 관습을 예리하게 관찰한다”라며 작품의 메시지를 짚어냈다.

청춘의 불안과 방황을 그린 첫 장편 데뷔작 <수성못>(2018)에 이어 이번에도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을 도맡은 유지영 감독은 ’가정을 꾸리고 아내이자 엄마로서 안정된 삶과 작가이자 감독으로서 삶이 공존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영화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감독 개인의 아주 사적인 경험에서 발화된 이야기는 임신과 모성에 대한 사회적 통념과 편견의 호수에 묵직한 돌을 던진다. ‘우리’ 안에서 ‘나’를 지키려 노력하는 수많은 재이와 건우를 응원하는 영화 <나의 피투성이 연인>의 유지영 감독을 만났다.

 


유지영 감독. 사진 제공=디오시네마​
유지영 감독. 사진 제공=디오시네마​

영화를 보면서 일기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더라고요. 그만큼 자전적인 경험이 녹아있겠죠?

영화를 만들던 시기가 30대 중반을 넘어가는 때였어요. 오래 만남을 이어가던 사람과 가정을 이루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죠. 더 깊은 관계에 대해 고민해 보니, 결혼이라는 결론으로 귀결되기에 자연스럽게 미뤄지게 되었습니다. 장기연애가 된 거죠. 아이에 대한 부분도 당연히 낳지 않는 걸로 생각했고요. 그때 본의 아니게 미뤘던 무의식이 있었나봐요. 결혼해도 영화를 할 수 있을까 라는.

주변에 친한 선배들을 보면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도 꾸준히 영화 작업을 이어가는 선배가 몇 안 되더라고요. 아예 그만두고 사라져 버린 분들은 더 많았고요. 그게 저한테는 걱정거리였나봐요. 그렇다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놓치고 나는 내 갈 길을 간다고 하는 것도 욕심이었던 거 같고요. 그 사람도 놓치기 싫고, 내 갈 길도 놓치기 싫다는 두 감정을 끊임없이 조율하려 했고, 균형을 맞추려 했어요. 잘 안되고 죄책감만 늘어갔죠. 실패하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고요.

<나의 피투성이 연인>이라는 제목에 그런 고민이 묻어나는 것 같아요. 어떻게 지었나요?

​그러던 시기에 신문에 실린 글을 한 편 읽었어요. 「나의 피투성이 연인」이라는 단편을 쓴 고 정미경 작가님을 제가 좋아하는데요. 남편인 김병종 화백이 동명의 제목으로 아내에 대한 추모글을 신문에서 쓰셨고, 그걸 제가 본 거죠. 그 글이 너무 충격적이었고 가슴을 울렸어요. 아내로서도 충실했고, 두 아이의 멋진 엄마였으면서, 예술가로의 삶도 너무나 치열하게 사셨거든요. 저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영역을 다 하신 분이었죠. 그때부터 시나리오를 썼습니다. 어떻게 끝날지 모르는 채로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간 거죠. 제 경험을 녹이면서요. 다만 객관화한다는 의미로 재이의 직업을 감독에서 소설가로 바꿨습니다. 그 안에서 제가 겪었던 고민들이 투영되어 있으니 <나의 피투성이 연인>은 자전적 이야기라고 할 수 있죠.

 

실제 경험을 녹이셨지만, 영화적으로 창작한 부분도 있을 텐데요.

재이와 건우 같은 장기연애 커플은 저와 그 시기 만났던 연인에게서 진솔한 모습을 많이 차용했어요. 각자 다른 직업군에 속해 있고, 뜨거운 연애 시기는 지났지만, 알콩달콩 안정적으로 함께, 나름 열심히 사는 인물이었다는 것까지 제 모습이 많이 담겨 있죠. 임신부터는 다 픽션으로 보시면 됩니다. 영화 속 사건들은 제가 실제로 겪지 않은 큰일들과 건우의 걷잡을 수 없는 분노를 극화해 구조화했어요. 발단부터 결말까지요. 결혼도 하지 않은 상황에서 급작스럽게 임신을 할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하는 극적인 요소를 넣으면서, 픽션화된 구조에서 인물들을 따라가고 지켜본 거죠.

영화 후반부에 나오는 동기 작가 보리와의 술자리 장면이 너무 리얼해서요. 이 부분도 자전적인 부분이 들어가 있나 궁금해요.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창작자라면 많이 공감할 장면이죠(웃음). 평소 재이의 캐릭터를 보면, 단순히 질투해서 한 말은 아니었을 거예요. 영화 초반 보리가 힘들어할 때 재이가 했던 조언은 진심이에요. 임신이라는 사건이 없었다면, 평소의 재이였다면 보리의 소식을 듣고 누구보다 기뻐했을 겁니다. 동기 작가들과의 자리에서 그 누구보다도 보리의 글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했을 거 같아요.

재이는 임신을 하면서 담배도 못 피우게 되었고, 그렇게 좋아하던 술도 못 마셔요. 원래 먹지 않았던 고기를 임신했다는 이유로 억지로 주변에서 권해 먹기도 하고요. 심리적으로 위축된 상황에서 자신의 전작을 극찬했던 편집자에게 신작을 두 번이나 퇴짜를 맞기도 하죠.

재이에게 글 쓰는 행위는 동일화된 자아와 같아요. 책상에 앉으면 칼같이 글을 쓰던 작가가 임신 후 잠만 잡니다. 그래서 보리의 소식은 재이에게 절망적으로 다가왔을 거예요. 질투로 보일 수 있지만, 단순한 감정이 아니었던 거죠. 차라리 보리의 글이 나빴더라면, 그렇게까지 무너져 내리지 않았을 거 같아요.

 

재이와 건우가 호텔에서 싸우는 롱테이크 장면에서 감정이 격하게 충돌하는데, 보는 입장에서도 너무 힘들더라고요.

연출자로서는 그 장면이 가장 흡족하지만, 촬영하기는 정말 어려웠어요. 둘이 호텔에 돌아와 소리를 지르고 서로 밀치며 싸우는 롱테이크 갈등 씬인데요. 둘의 모습을 보는 저는 한 인간으로서 가슴이 미어질 만큼 그들의 목소리, 호소가 와닿아 보기가 괴로웠습니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을 얼핏 여성영화로 생각할 수 있어요. 자기결정권, 커리어 등등을 보면요. 그런데 영화가 건우의 학원을 비출 때 자연스럽게 세대 이야기로 전환하더라고요. 사람을 부속처럼 여기고 손쉽게 갈아치우는 원장은 586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요. <수성못>에서도 그런 고민이 있었던 거 같아요. 건우의 캐릭터는 어떻게 구축한 건가요?

<수성못>은 서른 즈음에 만든 영화죠. 갈팡질팡, 우왕좌왕하면서 지나온 20대를 돌아보는 마음으로 만들었다면, <나의 피투성이 연인>은 30대 중반의 이야기예요. 그래서 세대적인 공감대 형성이 될 수 있다고 보고요.

건우 이야기를 하면, 처음에는 재이와 건우가 한 화면에 담겨요. 임신 이후로는 따로 나옵니다. 쇼트에서 나눔과 동시에 서사에서도 마찬가집니다. 클라이맥스로 향할수록 교차되는 부분이 더욱 빠르게 진행되어요. 그러면서 강조하고 싶었던 게 있어요. 그렇게 힘들 때 재이 곁에 건우가 있었다면, 그렇게 어려운 결정을 할 때 건우가 재이 전화를 받았더라면 그런 파국적인 상황으로까지 치닫지는 않았을 거란 거죠.

그러니까, 서로에게 간절히 필요했을 때 정작 둘은 같이 있지 못했던 거네요.

서로에게 서로가 없었던 그것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로 치닫게 하는 동력이 된 거죠. 결국 두 사람은 너무나도 목표를 잘 해내고 싶었지만, 너무나도 잘 하려고 했던 그것이 결국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부닥친 겁니다. 그것이 욕심이든 집착이든지요. 결국 둘은 끝간 데까지 가버리죠. 그때 서로가 서로에게 없었고, 혼자였음을 보여주는 것이 제게는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두 사람을 비유하자면 재이는 나무라고 해보죠. 나무가 아무리 꼿꼿하고 단단하고 싶어도, 그건 땅이 기름져야 뿌리를 내릴 수 있잖아요. 저는 건우가 땅이라고 생각했어요. 땅이 흔들리는 순간 나무가 무너지죠. 그걸 생각하면서 두 사람의 상생과 균열을 상상한 겁니다.

 

두 사람의 상황을 지원하지 못하는 사회구조도 있어요.

거대하게 묻고 싶었던 질문이기도 했죠. 아이를 낳더라도 경력단절 여성이 되지 않는 게 전제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거요. 만약 유럽이었다면 건우도 아이를 낳으면 월급을 받으면서 지낼 수 있었을 테고, 재이도 계속해서 글을 쓸 수 있었을 테니까요. 그런데 한국 현실에서 재이는 소설가로서는 끝일 거라고 생각해요. 건우도 자신을 믿고 재이에게 아이를 낳으라고 하는 거니까 중압감이 너무 크고요.

코너에 몰린 재이가 이렇게 말하죠. “난 이기적으로 살면 안 돼?” 영화에서 가장 도발적인 대사인 거 같아요. 이기적이라는 건 어떤 면에서 자신을 위한 것이죠. 부정적이지 않아요. 하지만 아이에 대한 부분이 들어가면 사회적으로 비판을 받을 수 있다는 염려는 안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재이도 나름 노력했어요. 건우가 자신만 믿으라고 하는데, 호텔에서 위스키 마실 때까지는 술 마시는 장면이 안 나오잖아요. 그런데 그날 생각해보면 호텔까지 가서 그 비싼 돈을 내면서 마지막으로 글을 썼는데, 편집자가 이 정도면 된 거 같다고 말해요. 재이는 자신이 만족하지 않으면 글을 내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는 사람이에요. 보리에게도 그렇게 말했고요. 그 시점이 닥친 거죠. 건우 개업식 날에도 맥주를 마셔서 얼굴이 벌게지고요.

질문하신 부분은 사실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지점이죠. 결국 모든 걸 내려놓고 넋이 나가버린, 미쳐버린 상황입니다. 뜻하지 않게 생긴 아이를 어떻게 할 것인지가요.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은 아이가 중요하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영화가 아닙니다. 아닙니다. 절대로. 원치 않던 아이를 굉장히 중요하게 다루는 이야기예요. 보통 임신하면 건강한 아이를 출산하기 위해 잘 태교하고, 주변에서는 임신부를 어떻게 대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닌 거죠. 술을 마시는 임산부에 대한 비난이 있을 수 있죠. 저도 유럽 등 정보를 찾아서 그 부분을 이해하려고 노력했고요. 임신은 축복이라고 생각하지만, 원치 않았던 임산부도 분명 있기에, 그런 부분에서 어떤 비난이나 질타가 와도 답변할 수 있습니다.

오성호 감독의 <그 겨울, 나는>이나 가성문 감독의 <드림팰리스> 같은 젊은 감독들의 올해 영화를 보면 경향성이 느껴집니다. 분명 사회에서 제대로 된 복지 제도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청년들이 나오는데, 사회와 싸우는 대신 자신의 잘못으로 돌려요. ‘내가 더 열심히 하면 될 거야’라는 결론이랄까요? <나의 피투성이 연인> 역시 그런 느낌입니다. 모든 영화를 묶을 수는 없겠지만, 이런 경향성이 느껴지는 것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이 영화의 결말을 최선의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해요.(웃음) 앞으로 두 사람에게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모르지만, 관객들이 두 사람이 각자의 미래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 죄책감을 갖지 않고 살아간다고 느끼길 바랍니다. 새장에서 풀어주는 느낌처럼요.

경향성에 대해 말씀드리면, 오성호 감독은 저도 알고 지내는 사이에요. 오 감독이 잘 하는 부분이 20대와 가난한 연애죠. <그 겨울, 나는>에서도 그 장기를 살렸다고 봐요. 그전 단편들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눈물이 날 정도로 공감이 가더라고요. 감독의 개성과 천착된 주제를 영화에 녹인 때문이겠죠.

자꾸만 자기 탓을 한다는 건 아마도 저희 세대의 특징이 아닌가 싶어요. 586 같은 기성세대처럼 저희도 20대 후반, 30대 중반까지는 집회도 나가고 욕도 했어요. 학부생일 때 청소노동자가 급여를 못 받으면서 하대당하는 모습을 보고 연대하기도 했죠. 그런데 어느 순간 SNS와 휴대폰의 세상이 되면서 그런 게 사라졌습니다. 매체 안에서도 신랄하게 비판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실천하거나 행동하지는 않아요. 우리가 해서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걸 경험했으니까요. 예전에 비판했던 것으로 세상이 뭐가 달라졌나 하는 허무가 느껴지죠. 창작자로서 사회의 이런 단편상을 담아내는 게 제 몫이라 생각하고 있고요, 관객이 영화를 보고 단 하나의 질문이라도 가져갈 수 있다면 성공이라고 생각해요.

 

관객평들을 보면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나의 피투성이 연인>이 어찌 보면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읽힐 수 있는 지점입니다. 그런데 감독님이 생각하는 ‘사랑과 헤어짐’이라는 큰 주제가 가려질 수도 있어요.

저는 화두나 제재 같은 걸 염두에 두고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아니에요. 영화뿐 아니라 예술이 메시지를 내세워서 사회에 영향을 끼쳐야 한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저의 개인적인 고민과 동시대적인 의제가 담길 수 있다고는 생각해요. <나의 피투성이 연인>에서 채식주의였던 재이가 임산부가 되었다는 이유로 잘 알던 친구들마저 고기를 먹으라고 하는 부분들이나, 건우의 학원에서 보이는 직장 내 갑질 같은 부분들처럼요. 그런데 제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각자가 자신이 정말 욕망하는 것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큰 대가를 치른다는 것이었어요. 이걸 건우와 재이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고요. 로맨스로도 이별로도 읽어도 좋습니다. 페미니즘 서사로 읽어 논쟁이 되어도 좋아요. 관객이 다각도로 영화를 읽으면 좋겠습니다.

 

원장(오만석) 같은 인물이 주변에 참 많죠. 정말 현실적으로 묘사했던데, 캐릭터 구축은 어떻게 했나요?

건우를 가장 무너뜨리는 일이 뭘까 고민했어요. 지키려고 하는 무언가가 무너질 때겠죠. 원장직을 제안받고 고민하던 건우는 재이의 임신 소식을 듣고서야 수락하게 됩니다. 원장을 향해 달려가는 거죠. 그러면 원장 캐릭터는 어떻게 되어야 할까, 아마 원장의 젊은 시절은 건우 같았을 겁니다. 운동권이었으니 더 거칠었겠죠. 정의가 더 중요하고, 부정한 것들은 참지 못했을 테고요. 그런 사람이 학원 원장이 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나고 겪었겠어요? 속물이라는 표현은 싫어하지만, 자연스럽게 세속적인 현실에 들어갔다고 보고 싶어요. 많은 정치인이 후에 변절하듯 원장도 그랬을 겁니다. 처음 건우에게 분원 원장직을 제안할 때는 아마 진심이었을 거예요. 촬영 때도 진심으로 해달라고 요청했고요. 건우가 거기에 동요될 수 있도록요. 여기에 아이가 생기면서 원장을 믿고 가게 된 거죠.

미애라는 캐릭터는 건우랑 달라요. MZ세대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그렇죠. 급여가 늦어지면 못 참아요. 그렇다고 싸우진 않죠. 노동청에 신고한다고 하죠. 건우가 아마 원장에게 이런 상황을 뒤에서 말했을 거 같아요. 그랬더니 원장이 미애를 만나자마자 학원 소개시켜주겠다고 했느냐며 비아냥대요. 건우는 원하는 대로 전달되지 않아서 놀랬고, 미애에게는 민망했겠죠. 보리도 마찬가집니다. 미애나 보리나 모두 자존감이 낮아요. 그래서 보리도 만취한 가운데 열등감이 튀어나온 거죠. 재이에게는 건우 오빠 서포트를 받으면서도 글을 못 썼느냐고, 꼴 보기 싫었다고요. 단순한 질투, 배신, 갑질이 아니라 그들만의 어떤 이면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결말이 너무 파격적입니다. 건우는 소시민적 성실함을 가진 사람인데도 그런 파국을 선택한 이유가 궁금해요.

제가 다큐멘터리 감독은 아니잖아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영화도 있지만, 저는 그렇게 창작하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현실에서 고민을 끌어올리지만, 뭔가 다르게 보이는 이야기를 좋아해요. <나의 피투성이 연인>을 만들 때도 아주 순진무구한 커플에게 고난이 닥칠 때 어디까지 가는지 보자, 이게 소목표 중 하나였어요. 쓰면서도 괴로울 정도로 끝까지 몰아붙여 보자고요.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마음에서 재이와 건우를 떠나보낼 수 없을 정도로요. 이야기 구조는 그렇게 증폭된 거 같아요.

결말이 ‘세다’라는 점에 대해서 관객들이나 주변에서는 어떻게 이야기하나요?

<나의 피투성이 연인>은 지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프리미어 상영을 했습니다. 그때 관객들 반응을 보면서 처음 알았어요. 아, 이 영화가 세구나.(웃음) 저는 그렇게까지 느끼진 못했거든요. 제게는 당연히 일어나는 수순처럼 느껴져서 끝까지 밀고 나간 거고요. 영화를 끌어온 가장 큰 견인장치인데 이걸 어떻게 세게 할지, 자극적으로 할지에 대한 고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관객들이 ‘세다’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하시더라고요. 이 영화가 그렇게 다가갈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느꼈습니다. 사실 배급사와 미팅하면서도 결말이 너무 파격적이라고 우려가 된다는 말을 듣긴 했는데, 부산국제영화제 프리미어 상영을 하고서야 그걸 인지한 거죠.

 

지금 영화가 가진 사회적 의미가 달라지고 있죠. 감독님은 영화가 가진 사회적 의미, 가치, 역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정확하게 대답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제가 생각하는 영화는 시네마입니다. 시네마는 반드시 극장과 함께 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영화를 만들 때도 극장의 5.1채널 서라운드 사운드나 스크린을 염두에 두고 색보정 편집을 하거든요. 단순히 관객이 큰 스크린에서 영화를 본다라는 느낌보다, 배우들의 감정을 경험하고 서사를 따라가고 이미지 마주하는 데서 오는 덮쳐지는 느낌? 완전히 덮침을 당하는 체험이 일어나는 순간이 극장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해요. 극장에서 봐야 할 영화를 만드는 일이 영화감독이 해야 할 일인 거 같고요. 휴대폰이나 노트북에서도 OTT를 보지만, 가끔 이걸 스크린으로 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재이가 가로등을 바라보는 장면은 스크린에서 익스트림클로즈업된 섬세한 배우의 얼굴을 봐야 느낄 수 있는 것이니까요. 영화는 OTT를 만들 때보다 스크린에 영사될 때 어떻게 보일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러닝타임이 155분입니다. 혹시 첫 편집본 러닝타임은 몇 분이었나요?

3시간 40분요(웃음).

<수성못> 이후 155분에 달하는 이번 영화를 보고 나니 다음 영화가 더 궁금해졌습니다. (감독의 전작 <수성못>은 88분으로 짧은 편이었다-편집자 주) 차기작은 뭐로 준비 중이신가요?

<수성못>은 KAFA(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만들었어요. 지원금이나 장비 대여 등 현물 지원을 받았고, 부모님 도움도 있었죠. <나의 피투성이 연인>은 2019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기획개발비를 받게 되었는데, 2년이나 밀렸어요. 너무 센 영화다 보니 고민이 있었겠죠. 거기서 제가 깨달은 건 결국 내가 제작비를 구해오지 않으면 영화를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이었어요. 너무 힘든 시기였고, 이후 서울영상위원회와 인천영상위원회, 대구미디어센터 지원을 받아 영화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후반작업은 부산국제영화제 지원을 받았죠. 이런 지원이 없었다면 아마 개봉하기 어려웠을 거예요. 주변에도 영화를 만들어두고도 개봉하지 못하는 감독들이 너무 많아요. 그렇다고 상업영화로 가야 할까 하는 고민도 들죠. 그런데 그 길이 쉬운 길인가요? 시나리오 주면 다 오케이되는 것도 아니거든요. 예전처럼 다음 작품을 뭐로 쓰고 있는지 말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그래도 여러 상상을 하고 있어요. 좋은 때를 기다리면서요.

 

최근 영화진흥위원회가 독립영화 관련 예산을 줄인 영향도 있겠군요.

더 힘들어졌죠. 예산이 절감되고 삭감되면서 훨씬 열악해졌고요. 사실 <나의 피투성이 연인>이 제작 지원을 받기 어려운 건 알고 있었지만(웃음). 여러 생각을 하고 있어요. 카메라를 들고 1인 창작시스템으로 가야 할지…. 미래를 모색 중입니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을 본 관객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요?

이 영화를 보신 관객들이나 지인들이 이야기해 준 건 처음 볼 때보다 두 번 봤을 때 훨씬 좋다고 하더라고요. 러닝타임이 길어서 인물이 샅샅이 안 보였는데, 두 번 보니 잘 보인다고요. 창작자인 동시에 가정을 잘 꾸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현실의 삐걱거림에서 흔들렸던 자전적 이야기를 관객들과 나누게 되었는데요. 혹시 저와 같은 고민이나 선택의 기로에 선 분들에게 이 영화를 제가 편지로 띄우고 답장을 받고 싶습니다.

 


윤상민 씨네플레이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