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의 조건이라면 당연히 연기력일 것이다. 그러나 연기력만으로 되는 건 또 아니다. 캐릭터에 녹아들기 위해 여러 '특기'를 갖춘 것도 중요한데, 그중 하나가 사투리가 아닐까 싶다. 영어권 배우들도 마찬가지인데, 지역마다의 영어를 얼마나 능숙하게 쓰는지나 자신의 영어 억양을 얼마나 자유롭게 고치는지가 배우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물론 반대로 그 고치지 못한 억양이 스타성을 더하는 경우도 있다. 오늘은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배우들에서 억양의 정석을 보여준 배우와 자신만의 억양으로 화제가 된 배우를 소개한다.
전매특허 어눌한 억양
아놀드 슈왈제네거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T-800으로 유명한 아놀드 슈왈제네거는 그 어눌한 억양이 곧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오스트리아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자 출신으로 본토의 억양을 쉽게 버릴 수 없었던 것. 또한 처음부터 배우로 활동하려 작정한 것이 아니라서 억양을 고치려는 노력보다는 그 자신의 스타성을 빛낼 수 있는 캐릭터들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하는 데 집중했다. 그렇게 '과묵한 악역' T-800을 만나면서 단번에 스타덤에 올랐다. <터미네이터> 시리즈 내내 T-800이 로봇이란 특성상 호연을 펼칠 수 있었던 데다 아예 이런 어눌한 말투를 코미디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유치원에 간 사나이>, <트윈스> 같은 흥행작을 배출하며 아놀드는 시대의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억양은 한계이자 동시에 그만의 무기였던 것. 그렇지만 인기와는 별개로 그의 억양은 언제나 놀림거리였는데 <심슨 가족>은 오스트리아의 액션 스타 '레이니어 울프캐슬'라는 캐릭터를 만들어 그의 어눌한 억양을 대놓고 패러디하기도.

'미국의 얼굴'답게 정석 억양
톰 행크스

당연히 활동하는 배우 대부분은 미국 억양을 제대로 쓰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미국인들이 으뜸으로 뽑는 미국식 영어 구사자는 톰 행크스다. '미국의 얼굴'이란 별명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닌 것. 일련의 출연작과 연기뿐만 아니라 미국식 영어를 가장 정석적으로 구사하는 배우라고. 그렇다고 다른 억양을 못하는 것도 아니다. <포레스트 검프> 때는 경계선 지능 장애를 가진 포레스트 검프 역을 위해 아역 배우의 말투를 고스란히 배워 아이 같은 지능을 가진 캐릭터의 성격을 온전히 보여준 바 있다. 그가 늘 미국인이 특히 좋아하는 배우로 뽑히는 이유는 아마 이런 섬세한 연기가 미국인에게 더 와닿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텍사스 그 자체
매튜 맥커너히


얼굴만 봐도 목소리와 억양이 딱 떠오르는 배우, 매튜 맥커너히. 연기력은 물론이고, 캐릭터마다 기막힌 억양으로 존재감을 남기는 그는 미국 텍사스 출신이다. 그래서 남부 출신 캐릭터를 연기할 때 남부 지역 사투리의 맛을 정말 잘 살리는 편이다. 남부 사투리의 리드미컬함과 톡 쏘는 듯 높게 올라가는 톤 등이 일품이다. 그의 대표작이자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작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이 그 사례. 텍사스 출신 론 우드루프를 연기하며 장점이 정말 도드라졌다. 그렇다고 남부 사투리 캐릭터만 잘 살리는 것이 아니라서 캐릭터마다 그의 톤과 목소리 변화를 비교하는 것도 무척 재밌다.
제작자조차 영국인인지 몰랐다는
휴 로리

자신의 출생지마저 완벽하게 지울 정도로 훌륭한 미국식 영어를 선보인 배우가 있다. <하우스>에서 그레고리 하우스를 연기한 휴 로리다. 휴 로리는 영국 출신 배우인데, 그레고리 하우스는 태생부터 미국인이다. 그럼에도 휴 로리는 미국식 영어를 완벽하게 소화했고, 심지어 극에서 '미국인이 하는 엉터리 영국 영어'를 기막히게 보여주면서 국적을 헷갈리게 했을 정도. 오죽하면 제작 총괄을 맡은 브라이언 싱어도 휴 로리가 영국인인지 모르고 캐스팅했다는 일화까지 있다. 영국의 대표 캐릭터 셜록 홈스를 모티브로 한 그레고리 하우스를 영국인인 휴 로리가 누구보다도 미국인스럽게 연기한 것이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
억양의 마법사
케네스 브래너


배우, 각본, 감독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는 케네스 브래너는 억양에서조차 천부적인 재능을 뽐낸다. 그는 북아일랜드 출신, 그것도 '셰익스피어 전문가'라고 불릴 만큼 고풍스러운 영국식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인데 최근 그가 연기한 캐릭터를 보면 폭넓은 소화력에 감탄하게 한다. 일단 <테넷>에서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사토르를 연기했을 때, 러시아 출신 영어 사용자들의 억양을 완벽하게 구사해 몇몇 관객들은 케네스 브래너를 알면서도 못 알아보기까지 했다. 그는 또 <오리엔트 특급 살인>을 시작으로 '에르큘 포와로'를 연기하고 있는데 포와로 또한 벨기에 출신 인물로 무척 인상적인 발음과 억양을 보여준다. 연극 무대에서의 경험이 어디 가지 않는 듯, 캐릭터의 독특한 억양과 습관마저 자연스럽게 소화해 시리즈를 3편까지 견인했다(<오리엔탈 특급 살인>-<나일 강의 죽음>-<베니스 유령 살인사건>).
기괴한 캐릭터, 우아한 본체
토니 콜렛

한국 관객 중에선 토니 콜렛의 악센트를 신경 쓴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일단 영어가 외국어란 점을 차치하더라도, 그의 연기가 워낙 압도적이기에 악센트 같은 디테일을 알아차리기 어려우니까. 그럼에도 토니 콜렛은 호주 출신임에도 미국식 영어를 정확하게 구사하는 배우로 유명하다. 특히 장르영화의 독특한 캐릭터를 자주 맡는 영화 속 모습과 달리, 평소 인터뷰 영상을 보면 우아하다 싶을 정도로 악센트가 고풍스럽다. 호주 영어가 미국식 영어와도, 영국식 영어와도 겹치는 부분이 많아 미국 캐릭터와 영국 캐릭터를 오가는 소화력이 토니 콜렛의 장점이기도.
다들 영국 대표 배우라고 생각하는
르네 젤위거


미국인인데 영국인으로 착각할 만큼 영국 영어를 잘 살린 배우라면 단연 르네 젤위거다. 그를 단번에 스타로 만든 <브리짓 존스의 일기>는 영국 소설 원작에 영국 배경, 영국 감독(정확히는 웨일스)과 영국 배우들이 함께 한 '토종 영국영화'인데 정작 르네 젤위거는 미국인이다. 그것도 그는 매튜 맥커너히처럼 사투리가 강한 텍사스 출신이어서(둘은 지역 독립 영화에서 만난 적이 있다고) 당시만 해도 '텍사스 사람이 어떻게 영국인을 연기하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영화가 개봉하자 전세는 뒤집어졌다. 지금까지도 영국 배우 아니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르네 젤위거는 훌륭한 연기력에 영국 영어까지 곁들여 사랑스러운 브리짓 존스를 완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