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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자학하던 과거에서 벗어나 앞으로의 길을 찾아..." 〈하이재킹〉 여진구

이진주기자
배우 여진구(사진=키다리스튜디오, 소니픽쳐스)
배우 여진구(사진=키다리스튜디오, 소니픽쳐스)

 

데뷔 19년 차. 그간 공백기 없이 꽉 채워 약 50여 편의 영화/드라마 속에서 성장한 배우 여진구는 우리 모두의 기억 속에 서로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다. 2005년 영화 <새드무비> 속 짙은 감성을 지닌 8살 아이는 2024년, 20대 끝자락에 <하이재킹>을 만나 생과 사의 기로에서 폭주하는 악인으로 변모했다. 여진구가 맡은 역할은 민간 여객기를 납치하는 테러범 '용대'. 섬뜩한 눈빛 연기로 스크린을 장악하는 여진구의 모습은 '첫 악역'이라는 사실이 무색할 만큼 압도적이다. 지난 17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서 배우 여진구와 만나 신작 <하이재킹>과 영화를 통해 변화한 그의 연기 가치관에 대해 들어보았다.


<하이재킹> 언론시사회에서 많이 긴장한 모습을 보였다. (지난 13일 서울 용산구 CGV 용산아이파크몰에서 <하이재킹> 언론시사회가 있었다.)

그렇다. 아마 평생 긴장할 것 같다. 매번 진심을 다해서 준비하기에 많은 분들에게 공개하는 날이면 안 떨릴 수가 없다. (하)정우 형, (성)동일 선배님의 경지가 되려면 20년은 흘러야 할 것 같다.

 

하정우가 직접 캐스팅 제안을 했다고 들었는데, 그때의 상황을 이야기해달라.

지난해 정우 형과 티빙 예능 <두 발로 캐스팅>을 함께했다. 촬영차 뉴질랜드로 가는데 비행기 안에서 <하이재킹>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정우 형이 전반적인 줄거리를 이야기하시며 “영화 <1987>(2017)과 <백두산>(2019)에서 함께 했던 김성한 조감독이 상업 장편 데뷔를 한다. 극 중 ‘용대’의 폭발적인 에너지가 너와 잘 어울릴 것 같다. 스케줄 괜찮으면 읽어보고 편하게 얘기해달라”고 감사하게도 제안해 주셨다. 그래서 뉴질랜드 가서 바로 읽어보았고 한국에 돌아와서 다시 한번 읽었다.

 

출연을 결정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처음 받아보았던 시나리오에는 용대의 감정들이 많이 빠져있었다. 그렇다 보니 상상을 많이 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특히 용대가 뿜어내는 폭발적인 에너지의 원동력이 궁금했다. 한편으로는 내가 현장에서 이 연기를 한다고 생각하니 내심 두렵기도 했지만 계속 생각이 나는 이야기였다.

〈하이재킹〉 촬영 현장. (왼쪽부터) 하정우, 여진구, 성동일
〈하이재킹〉 촬영 현장. (왼쪽부터) 하정우, 여진구, 성동일

 

<하이재킹>의 현장은 꽤나 유쾌한 촬영 분위기였다고 하던데 실제로 어땠나.

지금까지 있었던 많은 현장 중에서도 상당히 많이 기억에 남을 현장 분위기였다. 한순간도 유쾌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모든 배우와 스태프들이 현장을 사랑하는 것이 느껴져 떠나기 싫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한 장면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조금 불편하지만 한번 참자’라는 생각이 아닌 각자가 받아들일 수 있게끔 치밀하고 촘촘하게 맞추었다. 배우 입장에서 너무나 만족스러운 과정이었다. ‘이렇게 좋은 현장과 분위기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우로서, 사람으로서 많이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이재킹>에서 첫 악역 연기를 했다. 캐릭터를 만들고 연기를 하면서 어느 부분에 주안점을 두었나.

‘용대’라는 캐릭터는 1971년도에 실제로 나온 기사를 토대로 구체화한 캐릭터이다. 극 중 용대의 이야기는 캐릭터 당위성을 위한 수단이 아닌 용대의 모티브가 된 인물의 실제 사연이다. (영화 <하이재킹>은 1971년 여객기 납북 미수 사건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극 중 '용대'는 실제 테러범 김상태를 모티브로 했다.) 여기에 다양한 연기적 시도를 통해 캐릭터의 톤을 맞추어 나갔다. 감독님께서 영화 <헨리, 연쇄살인범의 초상>(1986)의 한 장면을 보여주시기도 하며 캐릭터를 잡아가는 데에 도움을 주셨다. 감독님께서 내 이야기를 많이 듣고 같이 고민해주셔서 감사했다.

가장 신경 쓴 부분은 범인의 행동을 정당화를 하지 않는 것이었다. ‘우리 용대’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저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인물이지만 인간적으로는 안타까움을 줄 수 있기를 바랐다.

 

〈하이재킹〉
〈하이재킹〉

 

<하이재킹>은 ‘비행기’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사건이 벌어지며 공중에서 액션이 진행되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기체가 뒤집히는 장면이 인상 깊은데 그 장면은 어떻게 촬영했나.

‘통돌이’라고 부르는 세트가 있었다. 승객을 맡은 배우분들이 모두 특수한 안전벨트를 차고 앉아있으면 세트가 180도로 돈다. 그럼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빠르게 들어가서 촬영을 하고 나오면 통돌이가 다시 원위치되는 식이었다.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상상했을 때도 굉장히 충격적인 장면이었는데 실제로 내 눈앞에 사람들이 거꾸로 매달려 있는 그 모습이 굉장히 강렬하게 남았다.

 

좁고 긴 복도를 뛰어다니면서 액션 연기를 펼친다. 비교적 넓은 공간에서의 액션 신을 촬영할 때보다 어려울 것 같은데…

좁은 곳에서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것보다 부딪히면 부딪히는 대로 막 다니는 것이 그 상황에 맞을 것 같아 몸을 아끼지 않았다. 혼자 구르고 뒹구는 액션은 괜찮은데 오히려 다른 배우와 합을 맞춰야 할 때 걱정이 되었다. 특히 부기장 태인을 연기한 정우 형에게 위협을 가하는 장면들에서 흥분을 해서 형과 실제로 접촉하는 경우들이 있었다. 충분히 리허설을 하고 마음을 다스리고 촬영을 해도 나도 모르게 제어가 안되었다. 다행히 정우 형이 이해해주시고, 사랑을 주시고, ‘이번 현장을 계기로 감정조차도 잘 컨트롤할 수 있는 배우가 됐으면 좋겠다’고 조언해 주셨다.


벌써 데뷔 19년 차 배우이다. 평생 동안 연기를 해왔는데 슬럼프도 있었나.

한때 슬럼프가 크게 왔다. 나 자신을 많이 외면했고 스스로를 더욱 안 좋은 곳으로 끌고 갔다. 연기는 나에게 일이 아니라 놀이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즐겁게 연기를 하던 아이가 어느 날 큰 역할과 좋은 기회를 통해서 배우가 되었고 더욱 성장하고 싶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큰 사랑과 인정을 받았다. 얼마나 큰 행운이 왔는지는 잘 알지만 내 인생이 많이 변했다는 것을 인지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던 것 같다.

 

더 잘 해내고 싶고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욕심에 결과에 집착하게 되었다. 주어진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는 생각에 현장과 집만을 오가며 일에 몰두했다.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하긴 했다. 문제는 연기를 하는 게 행복하지 않았다. 연기가 너무 어렵고 무서웠다.

배우 여진구(사진=키다리스튜디오, 소니픽쳐스)
배우 여진구(사진=키다리스튜디오, 소니픽쳐스)

그 슬럼프는 어떻게 극복했나.

결국 작품을 통해 극복했다. 내 연기 인생에서 ‘모든 것을 내가 감당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거구나’라는 깨달음을 준 작품은 tvN 드라마 <왕이 된 남자>(2019)이다. 당시 연출을 하셨던 김희원 감독님께서 어느 순간 내가 연기를 어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신 듯하다. 매번 현장에 가면 아무 말 없이 ‘빨리 연기해 봐’라고 하셨다. 그전에는 촬영할 장면에 대한 충분한 이야기를 나누고 리허설을 했었다면 ‘네가 하고 싶은 거 다 해봐. 내가 무조건 찍을게’라며 일단 움직이라고 하셨다. 이때의 경험 덕분에 연기가 한결 편해져서 다른 작품을 할 때도 거침없이 연기할 수 있었다.

 

이후 tvN 드라마 <호텔 델루나>(2019)라는 작품을 선택했다. 그간 늘 성장하거나 주변의 응원을 받는 역할을 주로 맡았다. 그런데 <호텔 델루나>의 구찬성은 누군가의 옆에서 듬직하고 묵묵하게 지켜주는 캐릭터라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JTBC 드라마 <괴물>(2021) 역시 나에겐 큰 도전이었다. 극 중 ‘한주원’은 스스로 생각했을 때도 내가 가진 이미지와는 반대되는 인물이었다. 자신만의 룰을 철저히 지키는 모습이 융통성이 없는 외골수와 같아 비호감으로 비춰 보이기도 한다. 웃긴 이야기이지만 나 역시 그렇게 살았었다. 그래서 나 자신을 많이 투영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20대를 너무 잘 보낸 것 같다. 내 생각 이상으로 더욱 좋은 작품과 사람들을 만나 함께하면서 불과 몇 년 전의 내 모습과는 전혀 비교를 못할 정도로 편안한 상태가 되었다. 20대의 끝자락에 만난 <하이재킹>은 앞으로 30대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정답을 알 수 있던 현장이었다.

<하이재킹>이 깨닫게 해준 여진구의 30대가 나아갈 답은 무엇인가.

훌륭한 배우가 아니라 행복한 배우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훌륭한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한계가 없는 배우, 많은 사랑을 받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옥죄기도 했다. 결국 내가 생각하는 배우상에 다다르지 못했다고 생각하니 겸손을 넘어 자학을 하게 됐다.

 

그런데 촬영을 하면서 만난 하정우 형, 성동일 선배님, <하이재킹>의 많은 배우분들 중 훌륭하지 않은 배우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분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얻는 행복감에 연기가 너무 즐겁고 재밌었다. 훌륭한 연기를 하고 훌륭한 작품을 선보이는 배우가 되는 것보다 현장에서 행복하게 연기하는 배우가 되고, 또 그런 현장을 만들 줄 아는 좋은 선배가 되는 것이 목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