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이사를 하다가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던 카세트테이프들을 발견했다. 고등학교 다닐 때 들었던 소년대의 복사 크롬 테이프. 이현석의 기타 연주 앨범, 크래쉬의 1집 테이프가 있었고 언젠가 펜팔을 했었던 요코하마의 여고생이 자기가 좋아하는 밴드라며 보내줬던 바비보이스의 복사 테이프도 거기 있었다. 문득 차게아스의 오래된 노래가 생각났다.

CHAGE & ASKA C-46. 만화 '황혼유성군'에서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이런 것들에 쉽게 마음이 움직이는 스타일이었다. 구식이 좋고 예전 이야기가 좋고 나이 든 사람들이 어떻게든 현실을 살아가는 이런 '황혼유성군' 같은 만화가 좋았다.
 
하긴, 만화를 정말 좋아하지만 소위 생활툰이나 힐링계를 좋아하지 SF 류는 영 맘이 가지 않는다. 뭐랄까, 현실에 발을 붙인 그런 이야기가 맘에 들고 그래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하루키 역시 소설보다 짧은 에세이 류 글이 더 맘에 든다. 솔직히 그의 소설들은 너무 억지로 성적인 묘사를 넣는 것 같아 좀 껄끄럽기도 하고.
 
, 나에게 이 노래 가사처럼 목소리를 녹음해준 사람은 없었다.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뭐 없다고 이제 와서 아쉬워할 일도 아니다. 누구에게나 이런 종류의 옛 추억은 있고 그런 추억은 알고 보면 매우 보편적이다. 그래도 돌이켜보면 그냥 쌉쌀한 느낌만 남는 추억만 있다면 좋을 텐데 가끔은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그런 기억들, 그런 것들도 추억이라는 단어로 불리곤 한다. 매우 흔하게. 그래서 왕가위 감독은 <동사서독>에서 취생몽사라는 술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었을까. ‘마시면 지난 일을 모두 잊는 술.

<동사서독>은 왕가위 감독이 만든 영화다. 1994년에 처음 개봉되었고 2008년 감독이 칸 영화제를 위해 재편집한 <동사서독 리덕스>라는 버전도 있다. 특유의 영상미와 편집 기법, 거기에 인생의 고독과 허무를 <중경삼림><타락천사등의 영화에서 잘 표현해냈지만 개인적으로는 <동사서독>이 그의 영화적 미학을 가장 잘 드러낸 영화가 아닌가 생각한다.
 
원작은 김용의 무협소설 사조영웅전이지만 등장인물이 같을 뿐 모두 새로운 내용이다. 굳이 원작 소설과 붙이자면 아마도 사조영웅전등장인물들의 젊었을 때 이야기라고 해도 될 것 같다. ‘서독구양봉이 사막으로 가면서 시작되는 이 영화는, 과거를 잊지 못하고 사막을 떠나지 못하는 서독과 취생몽사를 마시고 과거를 잊었지만 동시에 잊지 말아야 할 것들까지 잊고 방황하는 동사를 통해 하늘 아래 새로울 것 없어 가슴을 울리는 삶의 한 부분 부분을 이야기한다.

움직이는 것은 깃발도 바람도 아닌 그대의 마음이다

영화 전체를 감싸고 있는 영상미와 그 영상미 속의 허무감,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대사 하나하나가 은유적이고 상징적이다. 이뤄졌다면 달콤할 수 있었을 사랑의 상대가 형수였던 서독, 같은 사람을 사랑했지만 그 사람의 눈길이 서독에게만 향했던 것을 알고 방황했던 동사, 호수에 비친 분열된 자기 자신에게 칼질을 하던 모용언까지,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역설적이고 허무하다. 달콤한 사랑의 기간은 짧고 허무함은 오래 남는다. 그리고 그 달콤한 사랑은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마치 로즈뱅크 위스키처럼.
 
로즈뱅크는 스코틀랜드 로우랜드 지방에 위치한, 아니 위치했던 증류소다. 1993년도에 문을 닫았고 그 이후로 다시 열리지 않았다. 생산이 중단되고 얼마 후 거대 주류 자본인 디아지오가 증류소를 인수했지만 로즈뱅크에 종사했던 노동자들이 ‘거대 자본이 인수한 로즈뱅크는 더 이상 로즈뱅크가 아니다라며 증류소 증류기를 떼다 팔아먹어버렸다는 전설 같은 스토리가 전해지는 증류소다. 단순히 없어진 증류소야 여기 말고도 많지만 이 증류소가 유명해진 이유는 뭣보다 맛있는술을 만들었던 증류소였기 때문인데 최근 다른 곳에서 증류소를 다시 인수하려는 시도가 있지만 설사 인수해서 위스키를 재생산하더라도 예전 그 맛을 재현하는 건 어려울 것이다.
 
대개 스카치위스키, 특히 싱글 몰트의 경우 쉽게 버번의 바닐라 향, 쉐리의 꾸덕꾸덕함, 그리고 피트의 강렬한 소독약 냄새 등으로 조악하게 구분하고 표현할 수 있을 텐데 로즈뱅크의 위스키는 이 중 어느 분류에도 속한다고 하기 어렵다. 숙성 연도와 도수, 캐스크 등에 따라 다르지만 전 생산품에 거쳐 꽃향기가 나는, 마치 첫사랑 같은 맛이 나는 위스키다. 첫 모금을 마시는 순간 내가 꿀물을 마시고 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달콤한 향기와 맛을 지닌다. 숙성 연도와 도수가 올라갈수록 뒷맛에 묵직함이 배가되지만 단맛의 무게감 역시 증가해 그야말로 마니아를 양산하는 위스키이다. 거기다 보관된 원액이 다 소모되면 다시 생산될 기약이 없다 보니 가격은 그야말로 천정부지로 뛰고 있는 중이다. 참고로 2017년 말에 정규품도 아닌 26년 숙성 제품이 일본에서 14만 엔에 거래되었다

다양한 로즈뱅크 위스키들

누구에게나 사랑의 첫 느낌은 달콤하다. 하지만 대개 그 달콤함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심지어 예전에 느꼈던 달콤함을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그리워하지만 두 번 다시 그 달콤함을 느낄 수 없는 경우도 많다. 마치 지금은 생산되지 않는 로즈뱅크 위스키처럼, 아니면 가지 않았거나 가지 못했던 길에 대한 아쉬움처럼 말이다. 그래서 로즈뱅크를 접하고, 입에 머금은 순간 <동사서독>의 이미지가 머릿속을 맴돌았던 것 같다. 로즈뱅크의 마치 첫사랑 같은 달콤한 맛과 꽃향기는 사실 <동사서독> 영화 그 자체와는 어울리지 않는데도 말이다.
 
누군가는 마치 동사와 서독처럼 그 아쉬움을 마음속에 빈 공간처럼 키워가며 삶을 소모하기도 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현재를 살아갈 수밖에 없고 뒤에는 꿈이 없다는 걸 다들 머리로는 안다.
 
그렇게 머리로만 안 채로 삶을 살아간다.
 
누구나 그렇다. 우리는 모두 특별한 듯 특별하지 않다. 그게 사람이다.
 
얼마 전 오디오를 단출하게 정리했고 이제 더 이상 집에서 테이프를 재생할 수는 없다. 아마 앞으로도 이 테이프를 재생할 일은 없을 것이다. 지금 재생하면 소리가 나올지도 의심스러운 저 테이프들, 버리기도 뭐하지만 갖고 있어봤자 쓸모도 없을 그런 물건들처럼 내 마음속에도 그런 추억이랄지 기억이랄지 그런 것들이 쌓여간다.
 
이사 후 집을 정리하며 테이프를 버릴까 말까 고민하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테이프의 시대가 다시 오는 일은 아마 없을 거라는 거. 더 이상 로즈뱅크의 위스키가 생산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마치 너무나 창피하고 미숙하고 병신 같았던 내 10대와 20대 때 그 시절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동사서독

감독 왕가위

출연 장국영, 양조위, 임청하, 장만옥, 양가휘, 장학우

개봉 1994 홍콩, 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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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렉 / 술 애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