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정성시>부터 <상견니>까지, 대만 뉴웨이브와 청춘영화 완전정복! 씨네플레이와 브릭스트래블이 함께 한 ‘대만 무비투어’를 지난 10월 31일부터 11월 3일까지 3박 4일간 다녀왔다. 지난해 9월 12일 장국영의 생일을 맞아, 그리고 올해 4월 1일 장국영의 기일을 맞아 진행했던 ‘홍콩 무비투어’를 대만으로 넓힌 것. 대만은 다양한 미식과 볼거리가 가득해 한국인 관광객에게 이미 친숙하고 매력적인 나라지만, 영화와 드라마에 초점을 맞춰 무비투어 참가자들과 함께 그 촬영지들을 찾아다니며 마치 그 작품 속에 걸어 들어간 것 같은 기분을 느끼다 돌아왔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사랑하는 두 편의 홍콩영화 <영웅본색>과 <해피 투게더> 모두에 대만 타이베이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오래도록 끌렸었다. <영웅본색>에서 주윤발이 적룡의 체포 소식에 신문을 떨어트리던 시먼딩의 육교는 이제 사라지고 없지만, <해피 투게더>의 야시장은 여전히 휘황찬란하다. 여행기는 대만 뉴웨이브와 청춘영화로 나눠 2회에 걸쳐 계속된다.
역사의 슬픔을 껴안은 태풍이 지나가고,
<비정성시> 지우펀(九份)

가장 먼저 찾은 곳은, 타이베이 북쪽의 대표적 관광 도시 ‘지우펀’이다. 태풍 콩레이가 지나가고, 더없이 맑은 하늘이 무비투어 참가자들을 반겼다. 현지 가이드 얘기로는 1년에 몇 번 오지 않는 그야말로 쾌청한 날이어서 먹거리와 기념품으로 가득한 거리 지산제부터 수치루까지 인산인해를 이뤘다. 한때 금광맥이 발견되며 번성했다가 폐광된 뒤, 이제는 허우 샤오시엔의 <비정성시>(1989) 촬영지로 널리 알려지며 대만을 대표하는 관광지가 됐다. 그 인기에 힘입어 많은 사람들이 몰렸던, 허우 샤오시엔 감독 영화들의 제목을 딴 ‘비정성시’ 레스토랑과 ‘희몽인생’ 찻집이 최근 문을 닫은 것은 무척 안타까운 일이다. 그럼에도 <비정성시>에 종종 등장하고, 지우펀의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아메이차루’는 여전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 프로덕션 디자인에도 큰 영향을 줬다고 하여 워낙 유명한 곳이다. 물론 확인된 바는 없지만, 어느덧 여러 서적과 방송을 통해 기정사실화된 것만 같은 분위기다. 중요한 건 아메이차루 앞에서 그 얘기를 듣고 위를 올려다보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끄덕하게 된다는 것.

대만 영화에 입문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크게 1980년대와 1990년대를 아우르며 1947년생 동갑내기인 허우 샤오시엔과 에드워드 양으로 대표되는 ‘대만 뉴웨이브’와 <말할 수 없는 비밀>(2007)부터 드라마 <상견니>(2019-2020)로 이어지는 ‘대만 청춘영화’라는 2개의 출입구가 있다. 1989년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비정성시>와 더불어 에드워드 양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1991)은 필견의 작품이다. 특히, 한 해 앞서 1988년 장이모우 감독의 <붉은 수수밭>이 베를린국제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한 것과 함께 <비정성시>의 등장은 중화권 영화를 전 세계에 본격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됐다. 지우펀을 주 무대로 촬영한 <비정성시>는 중국 대륙에서 넘어온 외성인과 원래 대만에서 살고 있던 내성인의 끊임없는 갈등을, 일제 강점기 이후 문씨 가족의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는 장대한 역사 드라마다. 봉준호 감독이 매번 ‘세계영화 베스트 10’을 뽑을 때 절대 빼놓지 않고 언급하는 작품이기도 하고, 이제는 글로벌 스타인 양조위가 문씨 형제 중 막내이자 청각장애인인 ‘문청’으로 출연해 처음으로 홍콩영화계 바깥에서 작업한 작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에드워드 양은 2007년 불과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고, 허우 샤오시엔은 지난해 10월 알츠하이머 진단 이후 영화감독으로서 공식적인 은퇴 선언을 했다.

대만 뉴웨이브의 거대한 마침표,
<하나 그리고 둘> <음식남녀>
원산대반점(The Grand hotel)

‘원산대반점’(圓山大飯店)이라 불리는 ‘더 그랜드 호텔’은 (2004년 완공 당시 101층의 세계 최고층 빌딩이었지만 이제는 세계에서 9번째로 높은) ‘타이베이 101 빌딩’과 더불어 타이베이의 랜드마크다. 무려 1952년에 지어져 외국 대사, 국가원수 등의 국빈들을 접객하기 위한 영빈관 같은 곳이었기에, 1990년대 이전에는 일반인의 투숙이 불가능한 곳이었다. 일단 이곳 로비에 들어서면 두 가지에 놀란다. 먼저 국빈들을 맞이한 호텔답게 압도적인 규모에 놀라고, 온통 붉은색의 로비와 계단과 난간 등 영화에서 본 모습 그대로 유지되고 있어 놀란다. 이곳에서 촬영된 영화가 바로 리안의 <음식남녀>(1994)와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2000)이다.

허우 샤오시엔과 에드워드 양의 뒤를 잇는 대만 대표 감독이라면, <브로크백 마운틴>(2005)과 <라이프 오브 파이>(2012)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을 무려 2번 수상한 1954년생 리안과 <애정만세>(1994)로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1957년생 차이밍량이 있는데, 두 감독 모두 여전히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중 리안이 <센스 앤 센서빌리티>(1995)와 <아이스 스톰>(1997) 등으로 할리우드에 안착하기 이전, 대만에서 마지막으로 만든 영화 <음식남녀>가 바로 원산대반점에서 촬영됐다. <쿵후 선생>(1992)과 <결혼 피로연>(1993) 등 리안 초창기 영화의 페르소나와도 같았던 랑웅 배우가, 세 딸을 홀로 키운 아버지이자 원산대반점에서 은퇴한 셰프 ‘주사부’로 등장한다. 한 달에 한 번, 이제는 모두 나가 살고 있는 세 딸과 집에서 식사하는 것이 삶의 낙인 주사부가 그렇게 모인 어느 날 저녁, 원산대반점의 주방에 큰 문제가 생겨 부랴부랴 택시를 타고 떠난다. 중요한 손님을 맞이하던 중 재료 선정에 문제가 생겨 이미 은퇴한 노장 주사부에게 SOS를 친 것. 주사부가 주방에 도착해 이곳저곳 이동하는 모습을 핸드헬드 롱테이크로 촬영했는데, 호텔이 영업하지 않는 시간을 이용해 재빨리 새벽에 촬영을 끝내야 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원산대반점 주방의 어마어마한 규모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아쉽게도 원산대반점의 주방까지 들여다볼 수는 없는 노릇이고,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의 흔적은 바로 찾을 수 있다. 영화 초반부, 결혼식 장면이 촬영된 웨딩홀이 바로 이곳에 있다. 2000년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돼 감독상을 수상한 <하나 그리고 둘>은 <벌새>(2018)의 김보라, <남매의 여름밤>(2019)의 윤단비 감독이 무한한 애정과 영향을 고백한 작품이기도 하다. 놀랍게도 원산대반점 로비에 들어선 순간, 마치 <하나 그리고 둘>의 무대로 타임슬립한 것만 같은 압도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마치 <하나 그리고 둘>의 꼬마 주인공 ‘양양’이 당장이라도 계단을 뛰어내려 올 것만 같은 빨간 레드카펫과 난간이 25년 전 영화 속 모습 그대로다. 실제로 작년에는 ‘보그’ 대만판 7월호 표지를 바로 이곳에서 촬영했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으로 데뷔한 배우 장첸이 마치 <하나 그리고 둘>의 양양이 성장한 것 같은 모습으로 원산대반점의 붉은 계단에 선 것. 에드워드 양의 초창기 작품과 후반기 작품이 장첸이라는 배우를 통해 세월의 경계를 초월해 대화하고 있는 것 같은 멋진 표지였다.

양조위는 과연 홍콩으로 돌아갔을까,
<해피 투게더> 랴오닝(遼寧) 야시장과
중샤오푸싱(忠孝復興) 역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뿐만 아니라 최근 드니 빌뇌브의 <듄>(2021)과 넷플릭스 시리즈 <수리남>(2022)을 통해 국내 관객에게도 친숙한 배우 장첸은 왕가위의 <해피 투게더>(2007)와 <일대종사>(2013)로도 기억된다. 그렇게 대만과 홍콩영화가 만난다. <해피 투게더>는 다시 시작하기 위해 홍콩의 반대편인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떠난 보영(장국영)과 아휘(야조위)가 끝내 헤어지고 마는 이야기다. 아휘는 여러 직업을 떠돌다 한 식당 주방에서 장(장첸)을 만나게 되는데, 결국 아휘는 혼자 홍콩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그전에 잠시 대만 타이베이에 들른다. 장의 가족이 랴오닝 야시장에서 일한다는 것을 기억한 그는, 이곳에서 우연히 장의 사진이 있는 한 국수 가게에 앉게 된다. 막상 랴오닝 야시장을 찾았을 때 영화 속 국수 가게를 전혀 찾을 수 없었지만, 영화 속에서 아휘의 시선을 스쳐 지나갔던 아육성(鵝肉城), 흑백절(黑白切) 같은 가게들이 리모델링을 거쳐 여전히 이곳에서 영업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다른 야시장에 비해 규모가 작은 이곳에는 어차피 길이 하나밖에 없기에, <해피 투게더>의 양조위가 걸었던 그 길이 맞다. 어쩌면 그들 가게를 지나쳐 이 길 가장 끝에 있는 사진 속 가게에 앉아 국수를 먹었을지도 모른다. 돌이켜 보니 <해피 투게더>도 어느덧 30년 전 영화가 되어 가고 있는 중이다.


타이베이 여행의 진수 중 하나는 야시장 구경이다.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스린 야시장부터 가장 역사가 오랜 화시제 야시장을 비롯해 라오허제 야시장, 린지앙 야시장, 닝샤 야시장 등 서로 다른 개성을 지닌 야시장들이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그중에서도 랴오닝 야시장은 규모가 작아서 관광객이 굳이 들를 만한 곳은 아니지만, 앞서 얘기한 것처럼 단지 <해피 투게더>에서 양조위의 발길이 닿은 곳이라는 이유로 찾게 된다. 영화에서는 홍콩으로 떠나기 위해 공항에 가기 직전 양조위가 들른 곳인데, 실제로도 공항으로 향하는 모노레일 전철인 원후선(文湖線)이 지나는 곳이다. 여기서 아휘는 식당에서 장의 사진을 훔쳐(!) 나온 뒤 중샤오푸싱 역에서 모노레일에 올라, “언제 다시 만날진 모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가 보고 싶으면 어디서 찾을지 안다는 거다”라는 아리송한 대사를 남기고 영화가 마무리된다. 그 대사의 의미는 지금도 곱씹게 되지만, 아휘가 진짜 홍콩으로 돌아갔는지 아닌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당시 인터뷰에서 왕가위는 “아휘가 홍콩으로 돌아갔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고 했었는데, 마지막 장면에서 모노레일 정면 차창으로 노선이 왼쪽으로 꺾여지는 것으로 추측하건대, 아휘는 공항 방면으로 가는 게 아니었다. 무비투어의 목적이기도 하지만, 막상 영화 촬영지에 가봐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막상 중샤오푸싱 역에 와보니 아휘는 홍콩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쨌건, 적어도 그날만큼은 공항으로 가지 않은 게 분명하다.

왕가위는 <아비정전>(1990)에서 장국영이 살던 시무어 테라스나 양조위가 살던 구룡성채(홍콩에서 사라질 운명인 두 장소에서 살아가고 있는 서로 다른 계급의 두 남자), <중경삼림>(1994)에서 임청하의 비즈니스 장소인 중경 빌딩(<중경삼림>은 임청하의 마지막 작품이기도 했고, 중경 빌딩은 당시 늘 철거 얘기가 있었다)처럼 사라질 운명에 처한 장소들에 집착했다. 마치 언젠가 사라질 홍콩의 운명이 겹친다고 느꼈던 걸까. 한편으로는 <중경삼림>의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화양연화>(2000)의 앙코르와트처럼 영화에 처음 등장한 ‘신상’에도 관심이 많았다.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는 영화 촬영 당시인 1993년에 이제 막 운행을 시작했고, 앙코르와트는 카메라에 담긴 적이 없었기에 두 곳 모두 왕가위 영화에 처음 등장한 장소들이었다. <해피 투게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원후선도 1996년 개통했기에 <중경삼림>의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처럼 <해피 투게더>에 처음 담겼다. 결국 왕가위 영화 비주얼 스토리텔링의 핵심은 사라지는 것과 처음 본 새것을 그저 나란히 두는 것이다. 게다가 왕가위는 기관사 없이 앞이 탁 트인 무인 모노레일 맨 앞칸의 양조위가, 전철 바깥 풍경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는 모습에 꽂혔을 것이다. 앞을 보며 달리는 무인 모노레일이 왜 그리 신기했을까. 다소 과잉 해석하자면, 영국이든 중국이든 기관사도 없이 혼자 잘 달리는 모노레일에서 마찬가지로 홍콩의 모습을 보았던 걸까. 아무튼 왕가위는 그 누구의 영화에도 등장한 적 없는 새로운 장소를 기어이 자신의 영화에 가장 먼저 등장시켜야 한다는 강력한 의지를 <해피 투게더>에서도 발휘한 것이다. 그렇게 <해피 투게더>는 홍콩이 아닌 대만 타이베이에서 끝난다.

*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의 풍등 마을 스펀, 드라마 <상견니>의 타이난 등 대만 청춘영화의 촬영지들은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