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때론 현실이 영화보다 극적이다. 활기찬 민주주의국가에서 대통령이 난데없이 비상계엄을 선포하더니, 경찰은 버스로 국회 정문을 가로막고, 헬리콥터가 무장 병력을 국회 안으로 실어 나른다. 국회 보좌진이 본회의장으로 진입하려는 군병력에 소화기를 쏘며 저항하는 사이, 경찰을 피해 월담한 국회의장과 의원들은 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을 통과시킨다. 비상계엄 선포부터 해제 발표까지 6시간 남짓. 인터넷에는 12.3 사태 직후 한국의 계엄령이 치타나 비행기, 심지어 광속보다도 빠르다는 내용의 밈 '지구에서 가장 빠른 것 (The Fastest Things on Earth)'이 유머처럼 퍼졌고, 세계는 계엄 실패야말로 한국 민주주의의 견제와 균형이 작동된 것이라며 찬사와 위로를 보냈다.
몸을 숨긴 대통령이 투표에 의해 뽑혔고 계엄의 신속한 해제가 민주적 절차에 의해 이뤄졌다는 아이러니와 편가르기로 전락해 버린듯한 민주주의를 마주하면 '대체 무엇을 위한 민주주의인가?'라는 질문이 절로 나온다. <교실 안의 야크>(2019)를 만든 파우 초이닝 도르지 감독도 비슷한 질문을 품은 듯 하다. 그는 신작 <총을 든 스님>(2023)에서 어려운 정치용어 대신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처음 받아들인 국가와 국민을 비추며 민주주의의 본질에 다가가고자 한다. 총을 경유하는 노스님의 혜안과 소박한 사람들의 깨달음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사는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준다.
"선거? 신종 돼지병인가요?"

이야기는 약 1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상에서 가장 늦게 텔레비전과 인터넷이 보급된 '은둔의 나라' 부탄. 2006년, 또 다른 서구 문물이 늦은 도착을 알리는데 다름 아닌 민주주의다. 부탄은 전제 군주인 국왕이 자진해서 모든 권력을 내려놓으며 역사상 첫 선거를 준비하게 된다. 하지만 선거를 해야 한다는 공무원의 말에 "선거? 신종 돼지병인가요?"라 되묻는 이들이 있는 곳에서 선거 준비는 난항을 겪는다. 왕정국가에서 평화롭고 만족스럽게 살아온 사람들에게 현대적, 민주적 선거에 대한 개념부터 이해시켜야 한다. 지난한 과정이 예상되지만 CNN, BBC, 알자지라 등 세계의 눈과 귀가 은둔의 왕국에 쏠려있는 만큼 낮은 투표율은 용납할 수 없다. 공무원들은 전국 각지로 퍼져 새로운 민주주의 제도를 교육하는 한편 성공적 선거를 위해 모의 선거를 진행하기로 한다.
선거관리국장 양든 또한 선거율 올리기에 열을 쏟는다. 부탄 시골 마을로 향한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투표 방법을 가르치기 위해 3개의 가상 정당을 설정하고 선거운동을 시연한다. '파란당'은 자유와 평등, '빨간당'은 산업 발전, '노란당'은 보존에 가치를 둔다. 하지만 정확한 생년월일도 알지 못하는 이들이 수두룩한 이곳에서 투표자 등록은 10%를 넘지 못하고 조급해진 공무원들의 선거 시연은 과격 양상을 띤다. 가상 정당의 지지자가 되어 삼등분된 주민들은 공무원의 구호에 맞춰 주먹을 불끈 쥐고 구호를 내지른다. 모의 선거는 노란색의 압도적 승리로 끝난다. 노란색은 신망이 두터운 왕의 상징색이다. 갈 길이 멀다.

'민주주의'로 인해 반목하기 시작한 것은 젊은 부부 초펠과 초모도 마찬가지다. 단란했던 가정에 불화가 찾아온 건 정치적 이견 때문이다. 초펠은 친척들과 지지하는 후보가 다르다. 발전을 강조하는 후보를 지지하는 그는 더 나은 삶을 꿈꾼다. 선거 운동을 돕고 권력자에 줄을 대면 딸을 도시 학교에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야심이 커갈수록 초펠의 불평은 늘어만 가고, 선거 감독관을 돕는 초모는 가족 관계가 변해 가는 것에 불안함을 느낀다.
민주주의의 도입을 둘러싼 각자의 입장이 얽히고설킨 이야기 구조를 끌고 가는 동력은 총을 구해오라는 큰 스님의 명령이다. 모의 선거가 치러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 라마 승은 젊은 제자에게 보름달 제의를 위해 총을 구해오라 명한다. 젊은 스님은 부탄을 샅샅이 뒤진 끝에 미국 남북 전쟁 당시의 희귀한 소총을 손에 넣는다. 그러나 미국에서 건너온 무기상이 이 총을 노린다. 무기상은 가격을 산정할 수 없는 골동품 총을 손에 넣기 위해 제임스 본드가 쓰던 최신식 기관단총 두 자루를 구해준다. 마침내 마을에 총 세 자루가 도착하고 모두가 모인 가운데 제의가 시작된다.
오해와 갈등에 대한 '부탄식 해법'

살상 무기인 총과 그것을 찾아 헤매는 스님. 이질적인 요소의 조응은 영화 내내 일종의 서스펜스를 제공하는데, 첫 번째 선거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다양한 오해들과 이에 대한 '부탄식 해법'을 전달하기 위한 효과적 장치로 기능한다. 평화와 번영을 추구해야 할 민주주의가 증오와 갈등만 불러일으키는 상황에서 노스님이 행한 결단은 무엇일까. 젊은 스님이 구해온 오래된 총의 끝이 모의 선거장의 북적이는 사람들을 겨누는 장면이 서스펜스를 고조시키는 가운데 큰 스님은 사람들의 갈등을 종결시킬 혜안을 제시한다.
영화는 또한 자본주의 체제 밖에 위치한 듯한 인물을 내세워 무해한 웃음을 유발한다. 희귀한 소총을 얻기 위해 거액을 제시한 미국 무기상에게 값을 올려 흥정하기는커녕 너무 많은 돈이라며 절반 이하만 받겠다는 농부. 소총을 자신에게 팔면 총 10개는 더 살수 있다 회유하는 무기상에게 10개는 너무 많다며 2개만 필요하다는 젊은 승려까지. 현대 문명 비판과 함께 부탄의 국가이념인 '국민총행복지수'의 의미를 곱씹게 하는 장면들이다. 전제군주국 부탄이 민주주의를 도입하는 과정 또한 무해한 한 편의 동화처럼 그려진다. “민주주의는 위로부터가 아니라 아래로부터 나온다”(하워드 진)라 믿었는데 이곳의 민주주의는 국왕의 결단에 의한, '위로부터의 민주화'다. 이마저도 국민들은 거부한다. '민주적인 것은 현대적인 것이니까' 좋은 것이고 그래서 선거를 해야 한다는 공무원의 말은 설득력이 없다. '이미 행복한데 바꿀 필요가 있냐'라는 질문이 허를 찌른다.
데뷔작 <교실 안의 야크>(2019)로 2022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오른 파오 초이닝 도르지 감독의 두 번째 영화로 지난해 스위스 프리부르 국제영화제 관객상을 비롯해 2023년 로마 국제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언급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