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카하타 이사오가 지난 45, 82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사인은 폐암으로 밝혀졌지만 작년 여름부터 건강이 좋지 않아 입원과 퇴원을 반복해왔다. 1959년 토에이 동화에 입사해 애니메이션과 인연을 맺은 그는 평생의 지기 미야자키 하야오와 함께 <알프스 소녀 하이디><엄마 찾아 삼만 리>, <빨강머리 앤> 등의 TV시리즈 세계명작극장을 성공시키고, 80년대 중반부터 스튜디오 지브리를 세워 일본 아니메 산업을 이끌었다. 그는 화려하고 이상적인 미야자키와 대비되며 일상이라는 토대 위에 현실적인 모습을 수수하지만 디테일하게 녹여낸 작품들로 많은 호응을 얻었다. 이런 거장의 죽음은 이제 한 시대가 저물고 있음을 시사한다.

타카하타 이사오

지브리에서 많은 작품을 만들지 않았지만, 미야자키의 동료이자 라이벌이고, 또 정신적 지주로서 그가 뿜어낸 영향력은 실로 엄청났다. 지브리 삼인방 중 하나이자 현 대표인 스즈키 토시오에 따르면 미야자키는 단 한 사람의 관객을 의식하며 작품을 만들었다그 관객이 바로 타카하타 이사오라고 말하기도 했다.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를 만들 당시 애초에 음악으로 내정된 이는 옐로우 매직 오케스트라(Yellow Magic Orchestra)의 호소노 하루오미였지만, 당시 무명이었던 히사이시 조가 작업한 이미지 앨범을 좋아했던 미야자키의 손을 들어주며 음반사와 제작사가 반대한 걸 꺾은 것도 타카하타였다. 작업속도가 늦어 지탄(!)을 받았음에도 그는 언제나 지브리에서 특별한 존재였다.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반딧불이의 묘>를 시작으로 마지막 작품이었던 <가구야 공주 이야기>까지 지브리에서 만든 다섯 편에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건 지극히 일본적인 시선과 평범한 삶이다. 타카하타 이사오는 자신이 살아가는 일본이라는 환경 안에서 펼쳐지는 인간들의 다양하고 현실적인 미시사에 매력을 느꼈고, 또 집착했다. 지극히 사소한 동작과 행동을 통해 캐릭터들을 입체화시켰으며, 자연친화적인 시각으로 풍부한 감성과 상상력을 관객들에게 전달했다. 게다가 다양한 방식의 시도와 도전도 멈추지 않았다.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에선 지브리 최초로 CG가 쓰였고, 다음 작품인 <이웃집 야마다군>에선 지브리 최초로 100% 디지털 작업을 진행했다.

<이웃집 야마다군>

음악의 활용에서도 마찬가지. 히사이시 조와 오랜 기간 함께 한 미야자키 하야오와 달리 타카하타 이사오는 지브리에 들어와서 같은 작곡가와 작업을 이어가지 않았다. 통일성과 고유의 독자적인 색채를 가지진 못했지만, 그 만큼 다양한 스펙트럼과 개성 넘치는 분위기로 작품마다 색다른 인장을 남겼다. 따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고, 또 직접 악보를 읽고 피아노를 연주할 만큼의 솜씨를 갖췄기에 더 큰 열정과 욕심이 생겼기 때문인지 모른다. 결국 <가구야 공주 이야기>에선 본편에 흘러나오는 전래동요선녀의 노래를 직접 작사, 작곡하는 열의도 보였다.
 
타카하타 이사오가 지브리 시절 연출했던 다섯 편의 장편 아니메 음악을 살펴보며, 떠나간 그에 대해, 작품들에 대해 반추해본다.


반딧불이의 묘
(1988)

음악: 마미야 미치오 (間宮芳生)
<반딧불의 묘>
반딧불이의 묘

감독 다카하타 이사오

출연 타츠미 츠토무, 시라이시 아야노, 시노하라 요시코

개봉 1988 일본

상세보기

노사카 아키유키의 동명 단편소설을 바탕으로 전쟁 중 공습으로 부모를 잃은 남매의 짧은 여정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하지만 전쟁에 대한 미화와 일본을 피해자로 그렸다는 논란 또한 존재한다. 타카하시는 애초에 반전 작품을 의도하지 않았다고 밝힌 바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웃집 토토로>60분 중편으로 제작될 예정이어서 단독 개봉이 힘들 것 같자 동시 상영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두 작품 다 제작과정에서 분량이 늘어나며 지금과 같은 장편 애니메이션이 되었다. 음악을 맡은 건 1929년에 태어난 일본 현대음악의 원로 중 한명인 마미야 미치오다.

그는 같은 동년배의 토루 타케미츠나 마츠무라 테이조, 히야시 히카루, 아쿠타가와 야스시 등과 같은 작곡가들과 달리 그리 많은 영화음악을 남기진 않았다. 타카하타 이사오와는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첼로 켜는 고슈>의 음악을 맡은 인연으로 이번 작업에 참여했다. 애잔하게 눈물을 쏟아내는 내용임에도 오버하지 않는 - 짧고 절제된 스코어링을 들려주고 있으며, 섬세한 스트링 위로 슬쩍 얹은 영롱하지만 곧 사라질 듯 희미한 신디 음색은 반딧불이의 점멸하는 모습을 상징한다. 중간 중간 전위적인 사운드로 전쟁의 상흔을 묘사하기도 하고, 팬플루트와 피아노가 던져주는 씁쓸한 뒷맛도 잊을 수 없다. 엔딩을 장식하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헨리 비숍의 그 유명한 홈 스위트 홈이다. 이런 배치는 슬픔을 더욱 배가시키고, 안타까움과 어리석음을 극대화시킨다.

<반딧불의 묘> 엔딩 테마

추억은 방울방울
(1991)

음악: 호시 카츠(星勝)
<추억은 방울방울>

<추억은 방울방울>은 미완성으로 상영된 <반딧불이의 묘>의 책임을 지고 용퇴한 타카하타에게 재기의 기회로 주어진 작품으로, 오카모토 호타루와 도네 유코의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삼았다. 1980년대 초 도시에서 시골로 휴가를 떠난 여자가 과거(1960년대)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진정한 행복과 참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모습을 그렸다. 음악을 담당한 건 사이키델릭 록밴드 ‘The Mops’ 출신이자 편곡자 겸 프로듀서로 각광을 받고 있던 호시 카츠였다. 그는 안전지대와 오구라 케이, 하라다 토모요, 우에다 마사키 등 일본의 내로라하는 가수들과 작업을 하며, 아니메와 영화, TV 등 매체를 가리지 않고 전천후 활약을 보였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과거 60년대 향수를 자극시킬 그때 그 시절의 노래들과 80년대 농촌에서 흘러나오는 월드뮤직 사이에서 호시 카츠의 음악이 균형을 잘 잡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원곡을 다 담지 않아 아쉽긴 하지만, 60년대 NHK에서 인기리에 방영되던 인형극 <뜻밖의 표주박 섬>의 주제곡과 삽입된 노래들을 비롯해, 니시다 사치코와 더 와일즈 원즈, 우에키 히토시, 미야코 하루미와 바이쇼 치에코 등 당대 쟁쟁한 가수들의 클립을 담고 있으며, 사운드트랙 후반에는 헝가리의 집시음악인 무지카시와 게오르그 장피르의 전통 연주가 시골에서의 삶을 대변하듯 따스하면서도 서정적으로 자리 잡아 가슴 한편을 찌르르 울리게 만든다. 그리고 대망의 엔딩에 흐르는 더 로즈의 번안곡 사랑은 꽃, 너는 그 씨앗은 엔카 가수 미야코 하루미가 불러 추억을 방울방울 환기시킨다.

<추억은 방울방울> 메인 테마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1994)

음악: 고류 & 상상 타이푼 (紅龍 & 上々颱風)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은 원작이 있던 다른 작품들과 달리 유일하게 타카하타 이사오가 직접 쓴 오리지널 각본을 영상화한 작품이다. 산에서 자연과 더불어 사는 너구리들이 인간의 개발에 의해 서식처를 잃게 되자 이를 막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는 모습을 너구리들의 시점에 다큐멘터리 터치로 그려냈다. 물러설 수 없는 너구리들의 절박함과 자연을 파헤치는 인간의 탐욕을 유머러스하게 담아 그해 25억엔이 넘는 흥행을 거두며 정상을 차지했다. 이 작품 때문에 유일하게 일본에서만 <라이온 킹>이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음악을 맡은 건 국내에서 다소 생소한 일본에서도 가히 파격이라 할 만 했던 독특한 퓨전 그룹 샹샹 타이푼이 담당했다.

샹샹 타이푼

아시아를 중심으로 세계 각국의 민속음악들과 일본의 전통 색채를 기가 막히게 조화시켜 자신만의 스타일을 창조한 샹샹 타이푼은 그야말로 가장 일본적이면서, 일본적이지 않은 음악을 들려주는 그룹이다. 타카하타는 여기에 힌트를 얻어 사람들 속에서 숨어 변신해 살아가는 너구리들의 의미를 부여하고, 서로 다른 문화의 충돌과 교류 속에서 조화와 화합을 찾아내는 과정을 음악적으로 구현해주길 바랬다. 샹샹 타이푼은 일본 전통음악을 연주하는 핫소가쿠단과 함께 너구리들의 한바탕 소동을 담아내기 위해 전통 예능에서 피리와 북, 소고 등으로 흥을 돋우는 오하야시스타일로 에너제틱한 사운드를 들려준다. 물론 여기에 삼바와 컨트리, 맘보, 아프리칸 사운드 등 다양한 장르를 결합시켜 신명나고 감동적인 스코어를 완성시켰다. 그 대미는 엔딩곡 언제나 누군가가로 전래 동요에서 차용한 곡조로 축제 같은 기분을 안겨준다.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메인 테마

이웃집 야마다군
(1999)

음악: 야노 아키코 (矢野顕子)
<이웃집 야마다군>


‘아사히신문’에 연재되는 4컷 일상 카툰 <노노짱>을 원작으로, 여러 에피소드를 재조합해 하나의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탄생시켰다. 일본 회화의 묘선을 살려 스케치 풍의 담채화 느낌을 구현하고자 했던 타카하타의 오랜 바람이 이루진 작품이다. 따라서 기존의 지브리 작품들과는 많은 차이를 보여 호불호가 갈렸다. 평론가들은 일상의 이야기를 마법처럼 원숙하게 펼쳐낸 연출자의 내공에 박수를 보냈지만, 특정한 줄거리 없이 흘러가는 잔잔한 구조와 생소한 스타일에 관객들은 등을 돌렸다. 흥행참패로 타카하타는 오랜 기간 침묵해야 했다. 음악을 담당한 건 사카모토 류이치의 전 부인으로 잘 알려진 싱어송라이터이자 피아니스트인 야노 아키코다.

일반 가정 속에서 벌어질 법한 에피소드들과 독특한 상상력으로 무장한 짧은 호흡의 신문만화 톤을 살리기 위해 팝과 재즈, 클래식과 민속음악 등 다양한 활동을 해온 그녀를 섭외한 건 도전적인 모험수였지만 성공적인 선택이었다. 그녀는 랙타임과 포크, 탱고와 하와이언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하게 혼용된 형태의 짧은 큐(Cue)들을 바탕으로 재미있는 스코어를 완성 지었다. 여기에 쇼팽과 모차르트, 말러와 바흐, 멘델스존, 알비노니 등 클래식을 선곡했으며, 고전 특촬물인 <월광가면>이나 감독의 전작인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도 활용하는 등 깨알 같은 이스터 에그도 삽입했다. 특히 초반 결혼식 장면을 통해 긴 일생의 의미를 단숨에 보여줄 때 흐르는 곡은 픽사 애니메이션 <>에서 마이클 지아치노가 들려줬던 큐보다 10년 먼저 앞선 것으로 탁월한 감동을 자아낸다. 탁월한 센스를 여지없이 증명하는 케 세라 세라나 야노 아키코의 밝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엔딩 곡도 빼놓을 수 없다.

<이웃집 야마다군> '케 세라 세라'

가구야 공주 이야기
(2013)

음악: 히사이시 조 (久石譲)

<가구야 공주 이야기>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구전설화 타케토리 모노가타리를 원작으로 삼은 작품으로, 대나무 순에서 태어나 순식간에 아름다운 여인으로 성장한 신비로운 가구야 공주의 사랑에 대해 다루고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은퇴(지금은 번복되었지만)작인 <바람이 분다>와 동시 개봉할 예정이었지만, 작업이 전체적으로 늦어지며 결국 2013년 말에 공개됐다. 워낙에 느린 작업 속도로 악명(!)이 높던 타카하타였기에, 8년이 넘는 시간이 투입해 지브리 사상 가장 높은 제작비인 51억엔으로 완성됐다. 전작인 <이웃집 야마다군>에 이어 더욱 진일보한 수묵화 풍의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며 우아한 매력과 정제된 완성도를 자랑한다. 애초 음악으로 내정된 건 일본의 거장 감독 구로사와 아키라와 후기 작업을 같이했던 이케베 신이치로였지만, 개봉이 지연되며 히사이시 조로 교체됐다.

히사이시 조(왼쪽)와 타카하타 이사오

현재의 히사이시 조를 있게 만든 일등공신이라 할 수 있는 타카하타였지만 정작 작업을 같이 해온 적은 없었는데, 무려 25년의 세월이 흘러 이 작품에서 음악을 맡을 수 있었다. 그는 히사이시가 2010년에 작업한 이상일 감독의 <악인> 음악을 듣고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히사이시는 작업을 하며 타카하타에게 1.등장인물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2.상황에 붙이지 않으며, 3.관객의 마음을 부축이지 않는다는 조건을 걸었다. 그런 점에서 역동적이고 드라마틱했던 미야자키와의 호흡과 달리 타카하타와의 작업에선 섬세하고 심도 깊은 사운드를 선사하고 있다. 일본 고유의 전통적인 악곡와 오케스트레이션을 결합하고, 차갑도록 시리지만 아름다운 피아노가 이끄는 미려한 선율은 여백이 가득한 영상과 어우러지며 진한 감동과 눈물을 자아내게 만든다. 승려이자 싱어송라이터인 니카이도 카즈미에게 의뢰한 주제곡은 이 구전설화가 가진 신비스런 매력을 잘 살려냈다.

<가구야 공주 이야기> OST 라이브

사운드트랙스 / 영화음악 애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