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기사 카테고리

Movie & Entertainment Magazine from KOREA
>영화

좋긴 한데 뭔가…〈해피엔드〉에서 마음에 걸리는 단 한 가지 부분(들)

씨네플레이
〈해피엔드〉
〈해피엔드〉


10만 관객 돌파를 코앞에 두고 있는 <해피엔드>. 네오 소라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는 4월 30일 개봉해 현재까지 99,373명을 동원했다(5월 28일 기준). 적어진 상영관과 상영횟수에도 매일 1천 여 명이 <해피엔드>의 세계를 들여다보며 일본 사회, 더 나아가 전 세계에 팽배해진 차별과 통제의 분위기를 읽고 있다. 첫 장편이라 믿을 수 없는 만듦새와 근미래의 사회로 현대를 진단하는 시선, 캐릭터들과 찰떡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출연진 등 <해피엔드>의 장점이 한국 관객들에게도 유효하게 작용한 것이다. 그러나 무릇 명작이라고 해도 누군가에겐 흠결이 보이는 것이 예술작품의 묘미 아닌가. 씨네플레이 기자들이 <해피엔드>를 얘기할 때면 어딘가 아쉬운 구석이 하나쯤은 있었다. 그렇게 각자가 생각하는 <해피엔드>의 한계, 혹은 단점을 짚어보기로 했다. 어디까지나 개개인의 감상이란 점을 다시 한번 상기해주시길 바란다. 


 

〈해피엔드〉
〈해피엔드〉


김지연 _ 다소 단순화된 차별 메커니즘

<해피엔드>는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을 동원해 일본의 근미래를 그려낸 영화지만, 묘하게 ‘탈일본적인’ 무국적 영화로 보이기도 한다. <해피엔드>가 그리는 근미래 일본 학교의 교실에는 ‘순수’ 일본 혈통이 아닌, 흑인, 유럽계, 한국과 중국계 등의 학생들이 과반수 이상을 차지한다. 그러나 이들은 ‘순수’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자위대 입대 자격을 박탈 받는 등, 차별을 당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해피엔드>가 묘사하고 있는 이 차별이 정말 ‘그럴듯한 것’일까? 질문에 답을 내리기 위해서는 우선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나라에서는 인종에 대한 인식이 전적으로 사회·경제적 계층의 논리를 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겠다. 특히나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은 민족주의와 사대주의가 동시에 공존하는 나라고, ‘백인’을 비롯한 서양인에 대한 동경이 만연하다. 그래서 백인(혹은 종종 영어를 사용하는 흑인)은 고급 일자리를 위해 이주한 외국인이라고 여기는 반면, 그렇지 않은 외국인(동남아시아, 서남아시아 등지 출신)은 ‘자국에서 어렵게 살다가 온’ 블루칼라 노동자라는 고정관념이 생기고, 바로 이 지점에서 차별이 발생한다.

인구 증대와 노동력 확보를 위한 동아시아의 다문화는 주로 경제적 동기만을 위해 자국으로 이민한 아시아 출신의 공장 노동자, 혹은 업체를 통한 동남아시아 여성과의 결혼 사례 등이 주를 이룬다. 트럼프 행정부가 겨냥하는 ‘불법 체류 이주민’의 상당수가 일자리를 찾아 미국으로 온 중남미 출신의 히스패닉이듯이, 일본과 한국에서도 ‘다문화 반대’라는 우경화된 목소리는 특정 인종들을 겨냥한다. 블루칼라 노동자를 ‘하층민’이라고 인식하는 사회에서 ‘다문화 반대’라는 혐오는 ‘선택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해피엔드> 속, 흑인이나 유럽계 학생들이 단순히 ‘순수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차별받는다는 설정은 현실적 개연성이 떨어진다. 실제로 다문화 가정의 학생들은 사회경제적 지위와 이주 배경에 따라 차별의 정도가 달라질 가능성이 높다. <해피엔드>는 분명 우경화된 일본 사회의 문제를 예리하게 포착했지만, 현실의 차별 메커니즘을 다소 단순화한 측면 역시 존재한다.


 

〈해피엔드〉
〈해피엔드〉


추아영 _ 균열을 포착했으나, 해답 없는 <해피엔드>

네오 소라 감독의 <해피엔드>는 근미래 일본의 붕괴와 균열, 두 소년의 우정과 성장, 그리고 사회의 억압과 저항을 교차한다. 영화는 일본 사회의 전체주의와 감시 체제, 재일한국인을 비롯한 일본 내 외국인에 대한 차별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해피엔드>가 그려내는 근미래 일본의 풍경은 현재의 일본과 그리 다르지 않기에, 영화의 메시지는 한층 더 묵직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해피엔드>는 무거운 사회적 메시지와 청춘 영화의 낭만성 사이에 불협화음을 일으킨다. <해피엔드>의 결말, 사회의 부조리를 해결하는 해법이나 저항의 방식은 다소 순진하고 단선적이다. 네오 소라 감독은 “무의미한 규칙에 순응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면서 부조리한 구조 안에 머무는 두 인물의 모습으로 결말을 맺는다. 유타(쿠리하라 하야토)와 코우(히다카 유키토), 두 소년은 변화하지만, 그 변화는 구조적 억압이나 사회적 갈등을 넘어설 힘을 갖지 못한다. 그들은 결국 부조리한 구조 안에서 각자의 길로 흩어진다. <해피엔드>는 끝내 청춘 영화 특유의 낙관성과 순수성에 안전하게 머무른다.

 


〈해피엔드〉
〈해피엔드〉


이진주_ ‘근미래’는 설정일 뿐

영화는 분명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다고 말하지만, 그 미래가 직관적으로 와닿지 않는다. <해피엔드> 속 아이들은 교실에서 반장의 주도 아래 선생님께 단체로 인사를 하고, 선생님들은 교장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며, 엄마들은 자녀의 말썽으로 학교에 불려온다. 교내의 위계, 권위, 갈등 모두 지금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나 다른 것이 있다면, 학생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설치된 AI 감시 시스템 ‘판옵티’다. 이 장치는 등장인물의 행동을 실시간으로 포착한다. 그러나 이를 제외하면, 영화는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과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물론 감독 네오 소라가 의도한 바도 이 지점일 것이다. 몇 년이 지나도 일본 사회는 본질적으로 바뀌지 않았고, 오히려 퇴보하거나 정체되었음을 보여주려 했을 가능성이 크다. 기술은 발전했지만 사람과 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는 인식 말이다. 하지만 그 인식이 영화 전반을 관통하는 설계로 작동하기보다는, ‘판옵티’이라는 설정에만 머무는 지점이 아쉽다. 감시와 통제, 효율이라는 키워드는 여전히 유효하지만, 그것이 만들어내는 감정적 낯섦은 충분히 확보되지 않는다.

 


〈해피엔드〉
〈해피엔드〉


성찬얼 _ 인물이 작가의 도구로 보이는 순간

때로는 너무 잘 만들면, 거기서 흠집이 발견된다. 오랜만에 만족스럽게 본 <해피엔드>가 그런 영화였다. 안정적인 연출, 몸에 착 맞는 옷을 입은 듯한 배우들, 저변에서부터 관객을 서서히 흔드는 음악, 가상의 미래로 현시대를 비추어 보려는 의도까지 모난 곳 하나 없이 굴러간다. 그 과정에서 내 마음에 유독 걸린 건 코우(히다카 유키토)의 태도다. 영화가 중반에 접어들 무렵, 안전이란 명목 아래 음악동아리방이 폐쇄된다. 코우는 이때 누구보다도 분노하고, 적극적으로 장비 탈취에 목소리를 낸다. 그리고 친구들과 장비를 탈취해 버려진 클럽으로 향한다. 그러나 그 직후 장면에서 코우는 후미(이노리 키라라)가 있는 모임에 가려다가 유타(쿠리하라 하야토)와 갈등을 빚고 만다.

이 장면은 <해피엔드>의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기점이라 할 수 있다. 평생 갈 것 같은 우정이 각자의 시선을 이해 못 해 그 틈새를 드러내고 만다. 나는 여기서 영화에서 튕겨 나왔다. 바로 전, 친구들과 장비를 탈취하며 깔깔 웃는 코우와 코우의 태도에 언성을 높이는 코우가 도무지 같은 인물로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코우에 대한 반응만 문제가 아니라 바로 전 장면에서 이어지는 감정선이 없으니 저 장면과 이 장면의 코우가 정말 같은 인물인지 의심이 들어버렸다. 탈취에서 모임에 가려는 그 상황까지의 감정적 흐름이 없어지자, 내게 코우의 모임에 가겠다는 목적은 인물의 자의가 아닌 작가가 말하고 싶은 상황과 인물 간의 갈등을 만들기 위해 수단처럼 느껴졌다. 그전까지 하나의 인물로 생생했던 코우에게서 몰입이 깨지자, <해피엔드>의 세계가 차갑고 정교하게 조립된 것임을 절감하고 말았다. 물론 이 뒤로도 <해피엔드>는 좋았지만, 영화 속 세계가 ‘다섯 친구가 살고 있는 일본’이 아니라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을 위해 주조한 세계’로 변해 직전까지의 감상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좋은 영화지만, 열광할 것이 내겐 보이지 않았다.

 


〈해피엔드〉
〈해피엔드〉


주성철 _ <해피엔드>라는 제목은 계산된 냉소였을까

영화에서 사소한 것 하나가 마음에 걸려 마지막 순간까지 집중하지 못하는 때가 있다. 교장의 주도로 마치 CCTV 같은 AI 감시 시스템이 학교에 가동되기 시작했을 때, 결국 선의의 피해자가 발생하고야 만다. 학교 담벼락에서 담배를 피우는 유타(쿠리하라 하야토)를 보고 오지랖 넓은 야구부 주장이 꽁초를 빼앗는데, 감시 카메라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이라 AI 감시 시스템이 인식하는 것은 유타가 아닌 최종적으로 꽁초를 쥐게 된 야구부 주장의 손이다. 그렇게 그에게 벌점 폭탄이 쏟아진다. 무려 거창하게 ‘판옵티콘’에서 이름을 따온 것 같은 ‘판옵티’ AI 감시 시스템의 오류나 허상을 이야기하기 위해 필요했던 장면이지만, 영화 내내 그 야구부 주장이 벌점으로 인해 고시엔(전국고교야구선수권 대회)에 나가지도 못하면 어떡하나 걱정됐다. 물론 그것은 지나치다면 지나친 이야기이고, 결국 그런 ‘되바라진 놈’이라고 해도 좋을 유타가 각성하여 서사의 구원자가 되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랜 토리노>(2009)에서 이웃집 몽족 소년 타오를 구원해준, 역시 되바라진 노인 월트(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보여준 ‘백인 남성 서사’의 또 다른 변형이랄까. 그처럼 근미래 일본 사회의 최상층부에 있는 순혈 일본인 남성의 선행이 아니었다면 ‘해피엔드’는 찾아오지 못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해피엔드>라는 제목은 허상이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네오 소라의 계산된 냉소였다면, ‘네오 소라는 계획이 다 있구나’라고 인정하며 별 5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