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히 ‘로코퀸’이라 할 만하다. <상두야 학교가자>, <건빵선생과 별사탕>, <파스타>, <최고의 사랑>, <괜찮아, 사랑이야> 등 공효진이 건드린 드라마 중에 실패한 작품은 없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브라운관의 로코퀸으로 일컫지만, 영화 출연작 리스트에서 볼 수 있는 공효진의 캐릭터가 사실 더 흥미롭다. 1인 가구 여성이 겪는 현실 공포를 보여준 <도어락> 개봉에 부쳐 배우 공효진이 활약한 영화 속 캐릭터들을 짚어봤다.
공효진의 데뷔작.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는 흥행 면에선 실패했지만 탄탄한 드라마와 완성도로 호평받은 한국 공포영화의 수작이다. 신인 배우들의 등용문으로 불리던 <여고괴담>시리즈에서 여고생 지원 역할로 활약한 공효진. 특유의 자연스러움으로 몰입도를 높이는 그녀의 연기력은 데뷔작에서부터 입증됐다. 현실에 꼭 있을법한 ‘톰보이’ 이미지의 말괄량이 여고생 역할, 신인 공효진은 놀랍도록 사실적인 연기로 소화했다. 신체검사 시간 가슴둘레에 좌절하고, 남학생을 놓고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교사들의 억압적인 태도에 반항하는 영락없는 여고생의 그녀가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에 담겨있다.
1980년대 불량 학생들의 유쾌한 성장담. 류승범의 일품 ‘양아치’ 연기로도 정평이 난 <품행 제로>에서 공효진은 중필(류승범)을 짝사랑하는 오공주파 ‘짱’ 나영이 된다. 언제나 껌을 잘근잘근 씹고 계시는 나영은 깡 하나로 여고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지만, 정작 중필의 마음은 얻지 못한다. 한편, 중필이 짝사랑하는 모범생 민희(임은경)는 나영의 질투에 불을 지핀다. 그러나 나영은 깡만큼 의리도 대단한 캐릭터였다. 만만찮게 당돌한 민희와 각자의 방식대로 경쟁을 벌이게 된 나영은 중필을 위해 남자들의 싸움에도 당당히 도전장을 내민다.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로 데뷔한 김태용 감독이 다시 공효진을 찾았다. 울퉁불퉁한 모양을 그리며 새로운 가족의 형태를 제시한 영화 <가족의 탄생>. 사실 이 영화에 빛나지 않는 캐릭터는 하나도 없다. 각양각색의 개성을 입은 식구들 가운데 공효진의 자리는, 사랑에 죽고 못 사는 철부지 엄마 매자(김혜옥) 덕에 현실감각을 너무 빨리 깨친 딸 선경이다. 제 힘으로 뚝뚝 커온 그녀에겐 아직도 취업이며 연애며 바람 잘 날 없는데. 그 와중 내 삶을 침범하며 민폐만 끼치는 엄마는 원수처럼 느껴진다. 어떤 영화에서건 공효진은 이질감 없는 캐릭터를 표현해왔지만, <가족의 탄생>만큼 그녀의 고집스러운 눈빛과 무장해제한 울음을 담아낸 영화는 없었다.
<미쓰 홍당무>의 양미숙(공효진)만큼 희한한 여성 캐릭터도 드물다. 시도 때도 없이 얼굴이 빨개지는 안면홍조증의 양미숙은 러시아어 교사다. 독특한 비주얼과 맞먹는 미숙한 사회성으로 그녀는 어디서나 비호감 취급을 당한다. 세상의 모든 콤플렉스가 집약된 듯한 그녀는 서 선생님(이종혁)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착각까지 한다. 공효진에게 양미숙은 부담스러운 과제였다. 이경미 감독은 도무지 정이 가질 않는 이 캐릭터에 공효진이 사랑스러움을 불어넣어 주길 바랐다. 고심 끝에 있는 그대로의 양미숙을 받아들이기로 한 공효진의 결정은 숱한 부적응자들을 위한 위로의 영화로 <미쓰 홍당무>를 기억하게 했다. 이 영화로 그녀는 제7회 대한민국 영화대상 여우주연상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로코퀸의 저력은 영화라고 다르지 않았다. <러브픽션>의 희진은 공효진 외에 다른 배우를 상상하기 힘든 캐릭터였다. 거기에 지질한 남자의 면면을 똑똑히 짚어가듯 연기하던 배우 하정우와의 호흡은 덤. 영화 수입을 하는 프로페셔널 희진은 누구나 부러워하는 여성이다. 완벽한 여인을 찾아 헤맨 소설가 주월(하정우)이 첫눈에 반한 그녀. 하지만 알면 알수록 이해하기 어려운 그녀의 독특한 구석들을 발견한 주월의 마음이 점차 식어간다. 주월의 머릿속에 홀로 쌓은 ‘완벽한 그녀’라는 탑, 그 탑을 서서히 무너뜨려가는 어려운 여자 희진. 공효진의 필모그래피에서 로맨틱 코미디 <러브픽션>의 재기 발랄한 유머는 독보적이다.
가족 드라마와 공효진의 조합은 믿을만한 공식으로 두어도 될 것 같다. <파이란>,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연출한 송해성 감독의 <고령화 가족>. 속된 말로 자식농사를 망친 엄마(윤여정)는 한없이 너그럽다. 폭력조직에 몸담았던 첫째 한모(윤제문)는 하는 일 없이 엄마에게 빈대 붙어살고, 쥐도 새도 모르게 망한 영화감독 인모(박해일)는 밀린 월세를 감당 못해 엄마의 집에 왔다. 두 번째 이혼과 동시에 새 남자친구를 인사시킨 미연(공효진)은 되바라진 딸(진지희)과 함께다. 서로의 답답한 인생에 온갖 막말을 퍼붓다가도 내 식구 건드리는 인간은 절대 못 참는 이 가족. 공효진이 연기한 미연은 오빠들의 거침없는 기세에 눌리는 법이 없이 매사에 당당하다. 한방의 화살을 곱절의 말 폭격으로 되받는 미연을 미워할 수 없는 건 그녀 역시 너른 등과 단단한 우애가 무기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미씽: 사라진 여자>는 사라진 아이를 찾는 엄마의 이야기지만 여타 실종 소재 영화와는 조금 달랐다. 을(乙) 중의 을이라는 홍보대행사 직원 지선(엄지원)은 남편과는 이혼 절차를 밟는 중이고, 홀로 아이를 키워내느라 정신이 없다. 아이를 제 아이처럼 돌봐주는 중국인 보모 한매(공효진)를 신뢰하게 된 지선. 어느 날 한매와 딸 다은(서하늬)이 함께 사라져 버렸고 이를 추적하는 지선에 의해 한매의 과거가 하나씩 드러난다. 그러나 <미씽: 사라진 여자>는 불행의 드라마를 복수의 드라마로 전복시키며 이방인에 가해질 차별적 시선을 차단한다. 단순한 가해자는 아녔던 복잡한 캐릭터 한매를 연기한 공효진은 한국말이 서툰 중국인의 발음 표현에도 심혈을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