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뉴스가 있습니다. “한국영화 OOO,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 류의 소식 말이죠. 근래엔 <아저씨>, <마돈나>가 이런 뉴스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점점 시간이 갈수록 기사 헤드라인을 볼 때마다 “우와 이 작품이 리메이크된다니!” 하며 기대를 품기보다는 “진짜 만들어지긴 하는 거야?” 하며 심드렁한 반응을 뱉게 되더군요. 무수하게 떠돌던 소식이 무색하게도 이제껏 제작을 마친 작품은 몇 안 되기 때문이죠. 오늘은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된 대표작 5편을 살펴보겠습니다.


<시월애>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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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크 하우스>
(The Lake House, 2006)

<시월애>는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된 최초의 작품입니다. <그대 안의 블루>(1992), <네온 속으로 노을지다>(1995) 등 세련된 영상미가 돋보이는 멜로영화들을 만든 이현승 감독의 세 번째 영화죠. <스피드>의 콤비 키아누 리브스와 산드라 블럭이 출연한 리메이크작 <레이크 하우스>는 원작 속 시간을 넘나드는 우체통을 활용하는 판타지 장치를 적극 활용했습니다. 누군가 두 작품을 이렇게 빗대더군요. “<시월애>가 흰죽이라면 <레이크 하우스>는 (이것저것 많이 넣은) 영양죽이라고요. <시월애>는 우체통으로 사랑을 키워가는 판타지보다 강화도 석모도의 갯벌에서 촬영된 아름다운 풍경과 두 주인공(전지현, 이정재)을 감싸는 적막한 분위기로 더 좋은 반응을 얻었던 작품이기 때문일 겁니다. 갯벌이 아닌 일리노이주 쿡 카운티의 메이플 호숫가에서 촬영한 <레이크 하우스>는 담백한 원작과 달리 예쁘고 화려한 느낌을 강조해 제작비 대비 3배 정도의 수익을 냈습니다.
   


<거울 속으로>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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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러>
(Mirrors, 2008)

캐릭터, 스토리, 공포에 연결점이 없다.” 김성호 감독의 호러 <거울 속으로>의 리메이크작 <미러>를 연출한 알렉산드르 아야가 원작을 두고 한 지적입니다. 피와 뼈가 사방으로 튀는 <엑스텐션>(2003)으로 데뷔한 아야에겐 거울에 관한 개념에만 목매며 장르영화의 쾌감에는 영 어설펐던 <거울 속으로>가 꽤나 답답했을 겁니다. 다른 장치보다 거울만을 이용해 관객을 소름끼치게 만들어야 핸디캡 역시 뚜렷한 단점이었죠. 아야는 이를 정면돌파해 자신의 가장 큰 장기인 신체훼손의 쾌감을 쏟아냄으로써 원작의 한계를 넘어섰습니다. 특히 귀신에 씐 여동생이 스스로 자기 입을 찢어발겨 자살하는 장면은 확연하게 기억할 만합니다.
   


<엽기적인 그녀>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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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쎄시 걸>
(My Sassy Girl, 2008)

다들 동의할진 모르겠지만 <엽기적인 그녀>가 성공할 수 있었던 건 배우들이 선보인 연기의 공이 가장 컸다고 생각합니다. PC통신에서 이미 굉장한 조회수를 올린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지만, 주인공 견우와 직녀를 연기한 차태현과 전지현의 매력이 없었다면 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로맨틱코미디는 성립하지 못했겠죠. <마이 쎄시 걸>의 패착은 거기서 비롯됩니다. <내겐 너무 아찔한 그녀>(2004)로 한창 주가를 올렸던 엘리샤 커스버트가 전지현에 해당하는 조단 역을 맡았지만, 여주인공 특유의 엽기적인모습은 어딘가 억지러워 보일 뿐이었습니다. 4차원이라기보단 차라리 술주정뱅이로만 보인 게 사실이니까요. 조단 옆에서 전전긍긍하면서도 마음으로 그녀를 감싸야 하는 찰리 역의 제시 브래포드도 영 밋밋하기만 했죠. <마이 쎄시 걸>은 북미에서 극장 개봉도 하지 못한 채 곧장 DVD 시장으로 직행했습니다.
   


<장화, 홍련>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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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와 알렉스: 두 자매 이야기>
(The Uninvited, 2009)

한국의 고전 <장화홍련전>을 모티브로 삼은 원작 때문일까요? <안나와 알렉스: 두 자매 이야기>를 보면 <장화, 홍련>이 꽤나 한국적인 작품이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장화, 홍련><안나와 알렉스>는 지금까지 제작된 할리우드 리메이크 사례 가운데 가장 동떨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외딴 곳에 사는 침울한 원작의 자매는 미국의 평범한 10대 소녀가 됐고, ‘귀신 들린 집이라는 공간은 그저 가족의 비밀이 감춰진 공간으로 바뀌었습니다. 귀신이 천천히 관객을 옥죄는 호러보다는 관객의 두뇌를 시험하는 스릴러에 가까워 보입니다. 원작과의 큰 차이 덕분인지, 북미 시장에선 꽤 뚜렷한 성과가 있었습니다. 저예산 작품으로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4162만 달러를 벌어,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된 한국영화 가운데 가장 높은 수익률을 기록했습니다.
   


<올드보이>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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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보이>
(Oldboy, 2013)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된 작품 가운데 가장 기대를 모은 작품은 아무래도 <올드보이>가 아닐까요?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는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작품이라 국제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 중 하나고, 리메이크작 연출자 자리에 <똑바로 살아라>(1989)<말콤 X>(1992) 같은 걸작을 만든 스파이크 리 감독이 기용됐기 때문이죠. 그런데 결과는 굉장히 실망스러웠습니다. 스파이크 리는 원작의 전반적인 서사를 충실히 따르려고 합니다. 하지만 다른 점도 분명 있죠. 그 유명한 장도리 롱테이크를 쪼개서 찍었다거나, 중간중간 들어가는 나레이션과 유머들을 배제했다는 점입니다. 대신 스파이크 리는 잔인함을 더 강조했습니다. 박찬욱 감독이 복수라는 개념에 천착해 그 의미에 대해 질문했다면, 리메이크는 복수를 감행하는 스펙터클을 부풀리는 데 집중합니다. , 안타깝지만 그 결과는 원작이 지닌 장르영화의 독특한 에너지 같은 건 완전히 휘발된 채 그저 평범한 복수극으로 초라하게 완성됐습니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