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 키드먼이 자신의 얼굴에 한 여성의 분노를 덧씌웠다. 니콜 키드먼은 <디스트로이어>에서 17년 전 동료이자 연인을 잃은 에린을 위해 제멋대로 삐친 단발과 노년 분장까지 마다하지 않고 열연을 펼쳤다. <디스트로이어>의 니콜 키드먼처럼 충격적인 외모 변신을 하며 대중들의 관심을 외모가 아닌 연기력으로 돌린 여성 배우들의 사례를 소개한다.
<디 아워스>
버지니아 울프 ∥ 니콜 키드먼
니콜 키드먼은 <디스트로이어> 이전에도 특수 분장과 연기로 필모그래피의 한 획을 그었다. 2002년 제작된 <디 아워스>는 서로 다른 시대에 살고 있지만 비슷한 심리적 문제를 겪고 있는 세 여성의 이야기다. 그중 니콜 키드먼은 1923년의 버지니아 울프를 맡았다. <댈러웨이 부인>, <자기만의 방>, <올랜도> 등을 집필한 버지니아 울프는 사실 미인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디 아워스>에 니콜 키드먼이 등장했을 때 모든 관객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 곳에 버지니아 울프가 있다고.
니콜 키드먼은 버지니아 울프가 되기 위해 촬영 전 몇 시간 동안 특수 분장을 받았다. 전체적인 얼굴 인상 변화는 시각적으로 그를 탈바꿈시켜 관객들이 연기에 몰입하는 첫 단추가 됐다. 거기에 키드먼은 탁월한 연기력을 덧대 울프가 평생 안고 살았던 우울감과 심리적 공허함을 표현했다. 니콜 키드먼는 그해 미국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거머쥐며 배우로서의 영향력을 다시 입증받았다.
<몬스터>
에일린 워노스 ∥ 샤를리즈 테론
여성 배우의 변신을 논할 때 이 영화가 빠질 수 있을까? 아마 50년이 지나도 <몬스터>는 항상 거론될 것이다. 샤를리즈 테론은 데뷔 직후 다양한 장르에서 연기를 펼쳤지만 대중은 그의 연기보다 미모에 초점을 맞추기 일쑤였다. 그러니 그가 <몬스터>에서 연쇄살인마 에일린 워노스 역을 맡는다고 했을 때, 이런 결과를 예상한 관객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스틸컷이 공개되면서 <몬스터>는 단번에 기대작으로 부상했다. 사진 속엔 샤를리즈 테론 대신 푸석푸석한 머리결에 본노와 피로가 뒤섞인 표정의 여성이 서있었기 때문이다.
실존 인물, 그것도 연쇄살인마를 그린 작품이니 개봉 직후 설왕설래가 오갔지만 한 가지 사실엔 모두가 동의했다. 샤를리즈 테론이란 배우의 어마 무시한 존재감이었다. 샤를리즈 테론은 불우한 유년기 끝에 살인자가 된 에일린을 마냥 연민해야 할 사회적 피해자, 혹은 무조건적인 분노의 대상으로 연기하지 않았다. 그는 에일린이 삶에서 느낀 위기에 직면한 불안감, 끝끝내 구원을 기대했던 희망을 모두 탁월하게 그려냈다. 살을 찌우고 특수 분장을 감수한 연기는 테론에게 2004년 수많은 영화제의 여우주연상을 안겨줬다. 그리고 훗날 퓨리오사(<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로 이어질 카리스마의 막을 올렸다.
<매니페스토>
케이트 블란쳇
이 배우, 이 작품. 언급하면서도 반칙 같긴 하다. 율리안 로제펠트가 연출한 ‘매니페스토’는 13개의 영상을 동시에 재생한 전시작품이다. 이 13개의 영상을 한 편으로 다시 편집한 게 영화 <매니페스토>. 성명서, 선언문을 의미하는 <매니페스토>는 케이트 블란쳇이 13명의 캐릭터로 등장해 13개의 정치·사회·예술 분야의 선언문을 낭독하는 장면으로 이뤄진다. 명배우 케이트 블란쳇이 무려 13역을 한다니. 이것만 보고 덥석 영화를 틀었다간 큰코다친다. 현대 미술 작품답게 난해하고 어렵기 때문. 하나 분장을 통해, 그리고 언어의 억양과 속도를 통해 전혀 다른 인물처럼 느껴지는 케이트 블란쳇을 보고 있자면, 진정한 배우는 작가의 도구로써도 완벽하다는 믿음을 갖게 한다.
집 떠나와 열차 타고♪ 배우들의 삭발
<내일의 안녕> 페넬로페 크루즈
<브이 포 벤데타> 나탈리 포트만
<마이 시스터즈 키퍼> 카메론 디아즈
<지. 아이. 제인> 데미 무어
머리카락은 소중하다. ‘머리빨’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러나 이 배우들은 영화를 위해 과감하게 삭발했을 뿐만 아니라 삭발 장면을 사용하는 것도 허용했다. 이 분야의 선봉장이라면 <지. 아이. 제인>의 데미 무어. 극중 미군 특수부대 ‘네이비 씰’ 훈련을 받게 된 조단 오닐 중위 역을 맡은 데미 무어는 군인답게 머리를 밀어버린 모습으로 기존의 도발적인 여성 이미지를 전복했다.
나탈리 포트만은 <브이 포 벤데타>에서 에비 해몬드 역으로 캐스팅됐다. <브이 포 벤데타>는 원작의 명성, 주연 배우 교체 등으로 화제를 모았는데, 나탈리 포트만의 삭발 또한 이목을 집중시킨 이유 중 하나였다. 전체주의 사회의 수용소에 수감되면서 머리가 밀리는 장면. 나탈리 포트만은 실제로 머리가 잘리면서 터지는 울분을 참는 연기를 선보여야 했다. 일부 팬들은 포트만이 삭발하는 게 정말 억울해서 실제로 우는 거 아닐까 농을 던지기도.
<마이 시스터즈 키퍼>는 카메론 디아즈의 필모그래피 중 ‘최초’인 영화다. 첫째, 자녀가 있는 엄마 역할이 처음이었고 둘째, 삭발도 처음이었다. 극중 백혈병으로 머리가 빠지는 케이트(소피아 바실리바)를 위해 엄마 사라 또한 머리를 밀어버린다. 카메론 디아즈가 이미 <존 말코비치>에서의 완전 민낯처럼 <마이 시스터즈 키퍼>에서 삭발한 모습은 ‘로맨틱 코미디의 여왕’이란 칭호 이상으로 연기에 열의를 가졌음을 관객들에게 다시 한 번 보여줬다.
페넬로페 크루즈는 연기력 하나로 스페인 영화계에서 할리우드에 입성했다. 그래서인지 <내일의 안녕> 속 그의 파격적인 삭발은 의외로 화제에 오르지 않았다. 그가 연기한 마그다는 갑작스럽게 유방암 말기를 판정받은 상황. 마그다는 절망에 빠져 남은 삶을 낭비하는 대신, 최대한 만끽하리라고 다짐한다. 그 과정에서 스스로 머리를 미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마그다의 강인한 의지와 페넬로페 크루즈의 퀭한 큰 눈이 미묘한 감성을 이끌어낸다.
<앤젤스 인 아메리카>
한나 피트 / 에델 로젠버그 / 랍비 ∥ 메릴 스트립
메릴 스트립의 필모그래피에서 ’변신’하지 않는 영화를 찾는 게 더 어렵긴 하다. 백발의 편집장(<악마는 프라다를 보았다>), 마가렛 대처 수상(<철의 여인>), 플로렌스 젠킨스(<플로렌스>) 등등 그는 외모의 변화조차 고스란히 자신의 피부로 흡수하는 연기력의 소유자니까. 하지만 TV 드라마 <엔젤스 인 아메리카>에서의 열연은 가히 충격적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1인 3역을 소화했다. 대배우 메릴 스트립이 1인 3역 하는 게 놀랍냐고? 그 세 캐릭터 중 라비의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놀랄 수밖에. 길고 뻣뻣해 보이는 수염 사이로 미국에 대한 연설을 쏟아내는 랍비. 구부정한 자세로 어깨를 들썩거리며 말을 내뱉는 랍비의 모습에서 메릴 스트립의 그림자조차 읽어내지 못할 것이다.
헬레나 본햄 카터
&
틸다 스윈튼
소개하지 않으면 질타를 받을 만큼 변신의 귀재로 알려진 두 배우로 마무리한다. 헬레나 본햄 카터는 <혹성탈출>(2001)의 유인원 아리를 시작으로 <빅 피쉬> 마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붉은 여왕, <해리 포터> 시리즈 벨라트릭스 등등 특이한 캐릭터를 자주 받았다. 좀 이상한(?) 모습으로 나오지 않으면 어색할 정도. 그의 대표작이었던 <전망 좋은 방>의 스틸컷을 보고 이 배우가 그 배우냐며 놀라는 일도 부지기수.
헬레나 본햄 카터의 최근 출연작들이 점잖아지면서 그 뒤를 이은 건 틸다 스윈튼.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마담 D.가 대표적이고 <설국열차> 메이슨, <옥자> 루시·낸시 자매, <서스페리아> 블랑 등이 있다. 엄청 충격적인 수준은 아니지만 <리미츠 오브 컨트롤>,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데드 돈 다이> 등 짐 자무쉬 영화 속 틸다 스윈튼도 화려한 비주얼을 보여준다.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