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새

독립영화 <벌새>가 개봉 6주차 관객 12만 명을 동원하는 유의미한 흥행을 기록하고 있다. 1994년 여름과 가을의 서울 대치동을 배경으로 삼아, 폭력적인 세상에 대한 분노를 삭이는 14살 은희(박지후)가 처음 자기 마음을 헤아려주는 학원선생님 영지(김새벽)를 만나면서 성장하는 과정을 담은 작품이다. 같은 주 개봉한 <유열의 음악앨범> 또한 1994년의 풍경을 재현하기도 했다. <벌새>의 은희와 영지가, <유열의 음악앨범>의 미수(김고은)와 현우(정해인)가, 부산국제영화제도 없고 '씨네21'도 없던 1994년 어느 날 마주했을 법한 흥행작 10개를 곱씹어본다.

**** 각 영화의 관객수는 '서울 관객' 기준이다.


10위

너에게 나를 보낸다

10월 1일 개봉

연소자관람불가

381,578명 (서울 기준)

장선우 감독의 <너에게 나를 보낸다>는 1994년 흥행 상위 10개 작품 중 유일한 한국영화다. 즉, 그 해 가장 많은 관객을 만난 방화인 셈이다. '연소자관람불가'는 제한된 관람층 때문에 흥행에 해가 된다는 인식이 많다. 하지만 '야한' 영화를 표방한다면 오히려 호재가 된다는 걸 노리기라도 하듯, <너에게 나를 보낸다>는 스스로 포르노그라피를 표방했다. 결과는 대성공. <마누라 죽이기>, <태백산맥>, <구미호>, <게임의 법칙> 등을 누르는 성공을 거뒀다. 90년대 초를 뒤흔든 문제적 작가 장정일이 쓴 소설을 문제적 감독 장선우가 영화로 옮긴 <너에게 나를 보낸다>는 정치의 시대가 막을 내린 90년대 한국 사회가 이만큼이나 공허하다는 걸 설득하기 위해 무의미한 섹스신을 배치했지만, 대중은 그런 함의보다는 주연 배우 정선경을 대상화 한 '엉덩이가 예쁜 여자'같은 수식을 즐기기에 바빴다.


9위

스페셜리스트

11월 19일 개봉

연소자관람불가

384,981명

최고의 액션 스타 실베스터 스탤론과 최고의 섹시 스타 샤론 스톤의 만남. <스페셜리스트>의 정체성은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전직 CIA요원인 폭파 전문가가 어릴 적 쿠바계 범죄조직에 부모를 잃은 이로부터 원수를 갚아달라는 청을 받고, 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은 결국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는 분명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이야기다. 사실 여자의 의뢰는 다른 배후에 의해 의도적으로 계획된 것임이 밝혀지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사랑은 굳건하다는 반전 섞인 전개 역시 다르지 않다. 전개가 엉성하고 연출이 엉망일지언정 서울에서만 39만 명에 달하는 관객들이 <스페셜리스트>를 찾았다. 지루해질 만하면 스탤론의 화려한 액션이, 그것도 잠잠해질 만하면 스톤의 섹슈얼한 매력이 극대화 되는 순간이 등장하니 지루할 틈은 없었을 테니까.


8위

컬러 오브 나이트

9월 17일 개봉

연소자관람불가

439,391명

<컬러 오브 나이트>는 브루스 윌리스가 주연을 맡은 몇 안 되는 에로틱 스릴러다. <다이하드> 시리즈의 윌리스와 프랑스의 관능적인 로맨스 <연인>으로 한국 관객에도 얼굴을 알린 신인배우 제인 마치가 호흡을 맞췄다는 걸 어필 했다. 어릴 적 극장 한번 안 가봤던 기자의 기억 속에 두 배우의 얼굴이 맞닿은 끈적한 포스터는 깊게 남아 있는 걸로 보아, 거리에 붙어 있던 <컬러 오브 나이트>의 포스터는 뭇 대중들의 말초적인 흥미를 자극하기 충분했던 것 같다. 4천만 달러의 예산으로 제작돼 그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익을 거둔 <컬러 오브 나이트>는 풍문으로 당시 해외영화 배급 사상 최고의 가격으로 판권을 구입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다행히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에서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7위

스타게이트

12월 17일 개봉

중학생이상관람가

461,093명

1996년 한국뿐만 아니라 전세계 통틀어 최고의 흥행 성적을 기록한 <인디펜던스 데이>. 그 주역인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이자 제작자) 딘 데블린 콤비는 그로부터 4년 전 <유니버셜 솔져>와 2년 전 <스타게이트>로 이미 한국에서 쏠쏠한 재미를 봤다. SF, 이집트 고대문명, 밀리터리 총격전 등이 한데 섞인 <스타게이트>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1994년을 마무리 하는 연말 극장가를 장악했다. 극장이야말로 진기한 볼거리를 감상하기에 최적의 공간이라는 흔한 믿음을 제대로 증명하기에 더없이 적합한 영화였다.


6위

미세스 다웃 파이어

1월 22일 개봉

중학생이상관람가

468,229명

<죽은 시인의 사회>(1989)의 키팅 선생님, <후크>(1991)의 피터팬, <알라딘>(1992)의 지니까지. 로빈 윌리엄스는 한국에서도 어마어마한 인기를 구가한 할리우드 배우였다. 바로 그 로빈 윌리엄스가 중년의 여자 가정부를 행세를 하는 가족 코미디를 <나홀로 집에> 시리즈의 크리스 콜럼버스가 연출하는 건 능히 흥행이 보장되는 조합이었다. 초중반까지는 "배꼽이 빠지도록" 웃고는 마지막에 이르러 눈물을 한바가지 쏟게 만드는 코미디와 감동의 조화는 전 연령층에게 호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5위

포레스트 검프

10월 15일 개봉

중학생이상관람가

705,143명

장애를 딛고 별별 역사적 순간을 통과하며 인생 역경을 극복하는 포레스트 검프(톰 행크스)의 신드롬은 1994년 당시 영화 사상 최고의 캐릭터 목록을 갱신할 만큼 대단했다. 세계적으로 6781만 달러를 기록해 제작비 대비 12배가 넘는 흥행을 기록한 <포레스트 검프>는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누렸다. 휴먼 드라마에서 블랙코미디까지 아우르는 장르적 자유로움은 물론, 50년대에서 80년까지 포레스트 검프가 통과하는 시대에 발표된 명곡들이 흐르는 음악을 감상하는 묘미 역시 커다란 흥미를 선사했다. 1994년 미국에서는 흥행 1위, 세계 통틀어 2위를 기록한 점을 생각해보면 한국 내 성적은 살짝 미비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4위

쉰들러 리스트

3월 5일 개봉

고등학생이상관람가

847,259명

미국에서 1993년 홀리데이 시즌에 개봉한 <쉰들러 리스트>는 이듬해 3월 초에 한국 관객들과 조우했다. 홀로코스트의 참혹한 광경과 그 속의 피해자들을 살리고자 애썼던 주인공 쉰들러의 헌신에 힘입어, 3시간을 훌쩍 넘기는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관객들이 유입됐다. 지각 개봉이 호재를 불러오기도 했다. 한국에 개봉한 지 2주 후 감독상, 감독상, 각색상, 음악상 등 아카데미에서 총 7개 부문을 석권하자 더 많은 관객들이 흥행의 귀재 스티븐 스필버그가 만든 엄숙한 역사영화를 극장에서 만났다.


3위

스피드

6월 25일 개봉

고등학생이상관람가

874,225명

촬영감독 출신의 얀 드봉이 연출을 맡은 액션영화 <스피드>는 한국에서 유독 인기가 더 좋았다. 1994년 흥행 미국 8위 세계 5위를 기록했고, 우리나라에선 <고인돌 가족>, <덤 앤 더머>, <긴급 명령> 등을 큰 차이로 따돌리고 무려 3위에 올랐다. <아이다호>(1991), <폭풍 속으로>(1991), <드라큐라>(1992) 등 다양한 장르의 명작을 통해 한국 관객에게 좋은 이미지를 구축했던 키아누 리브스가 선보이는 '정통' 액션인 데다가 속도가 떨어지면 터지는 폭탄 때문에 시속 80km 이상을 유지하며 LA 시내를 달려야 만하는 스릴 넘치는 설정, CG에 크게 의존하지 않은 영상미까지. 초여름 개봉하는 액션영화의 조건은 다 갖췄다.


2위

트루 라이즈

8월 13일 개봉

고등학생이상관람가

874,664명

SF 액션의 역사를 새롭게 쓴 <터미네이터 2>(1991)의 두 주역, 제임스 카메론 감독과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돌아왔다. <트루 라이즈>는 프랑스 영화 <라 토탈>을 리메이크 했지만, 가족까지 속이며 비밀요원으로 활동하던 남자가 아내의 외도를 알게 돼 그녀의 사랑을 확인하고자 납치극을 꾸민다는 골격만 가져왔다. 소소한 코미디인 원작과 달리, 1994년 당시 영화사상 최고 액수인 1억 달러를 제작비에 쏟아부은 영화는 미국에서 중동까지 곳곳을 실컷 때려부수며 블록버스터 액션의 쾌감을 극대화 했다. 덕분에 '마지막 액션 히어로' 슈워제네거의 생명력은 연장됐다.


1위

라이온 킹

7월 2일 개봉

연소자관람가

920,948명

1994년 국내판 포스터 이미지를 구하려 했으나...

1994년은 전국 최고 기온 38.4도를 기록한 살인적인 더위를 기록한 해이기도 하다. 여름방학 시즌은 한국 극장가를 대표하는 대목이긴 하지만 1,2,3위에 오른 모든 작품이 여름 개봉작인 건 무더위가 기여(?)한 바가 클 것이다. 1위는 역시 디즈니 애니메이션 <라이온 킹>이다. <인어공주>(1989), <미녀와 야수>(1991), <알라딘> 등 디즈니 최전성기를 잇는 이 작품은 한국은 물론 세계를 재패했다. 아버지를 눈 앞에서 잃은 심바가 방황을 극복하고 정글의 왕위를 계승하는 성장담과 이를 보다 생기있게 꾸며주는 한스 짐머와 엘튼 존이 힘을 합친 영화음악은 모든 연령 관객들의 사랑을 독차지 했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