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해 부산국제영화제 기간
해운대 해변의 시원한 바닷바람과
함께 열리던 대담 프로그램
'오픈토크'.

올해는 안타깝게도
태풍 차바의 여파로 인해
영화의전당으로 장소를 옮겨
두레라움 광장에서
열리게 됐습니다.

올해 오픈토크
첫 번째 주인공은 바로!
배우 이병헌.

사진 씨네21BIFF데일리사진팀 장서준



수해로 인해 장소가
변경됐기 때문일까요,
다소 차분한 분위기의 행사는
지난해 전도연, 유아인의
오픈토크처럼 팬들의
떠들썩한 애정고백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두레라움 광장은
이병헌을 가까이에서
만나기 위해 모여든 인파로
여전히 그득그득했습니다.

한국영화기자협회의
4명의 기자가 던지는
질문에 또박또박한 말로
멋진 대답을 전하던
이병헌의 오픈토크
후기를 전합니다.




작년 개봉한 <내부자들>은
모두의 기대를 뛰어넘은 흥행과
인상 깊은 캐릭터 안상구의 존재로
단숨에 이병헌의 대표작이 됐죠.
<내부자들>은 지금껏
이병헌이 선보인 영화 가운데
가장 많은 애드립이 담긴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날 오픈토크는 이와 관련한
대답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보통은 현장에서 리허설을 하거나 동선을 맞춰가다 보면 분명 어딘가 어색하거나 모자른 부분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신이 매끄럽게 흘러가기 위해서 만들어내는 경우들이 좀 많죠. 애드립을 선호하는 편은 아니에요. 그게 자칫 잘못해서 감독이 의도한 신의 색깔이나 공기를 바꿔버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평소와 달리 <내부자들>에서 애드립이 많이 들어간 건, 영화 속 모든 캐릭터가 다 세고, 사건도 굉장히 숨막히게 흘러가는 와중에 안상구라는 캐릭터가 쉼표 같은 역할을 해줬으면 좋겠다는 우민호 감독의 말 때문이었어요. 그리고 유독 현장에서 순간순간 바꿔야 하는 상황이 많아서 다른 영화들보다 애드립이 많았죠. 안상구가 지내는 모텔 목욕탕이 통유리라는 설정은 시나리오를 처음 읽을 때부터 제가 느꼈던 바를 제안해서 이뤄지게 된 경우예요. 이미 설계된 애드립인 셈이죠.
<내부자들>의 안상구

  스포츠서울 남혜연 기자는
<내부자들> 하면 잊을 수 없는
바로 그 대사
"모히또 가서 몰디브 한잔 하자"
보여주길 요청했습니다.
한 30초 가량을 머뭇대던
그는 대사를 이어가다가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덧붙였습니다.

이 대사의 경우가 신의 공기를 망칠 수 있는 위험한 애드립이에요. 왜냐하면 그 신은 우장훈(조승우)과 안상구가 멱살 잡고 싸우는 신이거든요. 거기에서 제가 장난처럼 애드립 해봤는데, 사람들이 좋아하고 감독님도 그걸로 가자고 해서 스스로 혼선이 생겼어요. 웃음은 웃음대로, 그 신이 가고자 하는 감정은 고스란히 보여줘서 다행이었죠.

<달콤한 인생>의 선우와
<내부자들>의 상구는
모두 누군가에게 버림받고
복수를 하는 역할입니다.
사법적인 제도의 틀 안에서
통쾌한 복수를 하는
안상구라는 캐릭터를
구축하는 과정 역시
들어보지 않을 수 없었죠.

<달콤한 인생>이 주관적인 복수를 향해 치닫는 영화라면, <내부자들>의 복수는 모두를 위한, 공공의 적을 처단하기 위한, 모든 관객들이 통쾌함을 느끼게 하는 종류의 복수예요. 그래서 영화를 촬영하기 전, 안상구를 좀더 친근한 느낌의 캐릭터를 만들어가자고 했죠. 허술하고 우스꽝스러운 친구 같은 느낌으로요. 그런 사람이 복수를 하기 때문에, 관객들이 감정이입을 훨씬 쉽게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내 마음의 풍금> 선생님 / <번지점프를 하다> 서인우

<레드: 더 레전드>,
<터미네이터 제네시스>
<협녀, 칼의 기억>, <밀정>
<매그니피센트 7> 등
요즘엔 도통
'부드러운' 이병헌을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90년대에서 2000년대로
넘어오는 시기 이병헌은
<해피 투게더>의 서태풍
<내 마음의 풍금>의 선생님
<번지점프를 하다>의 서인우
처럼 맑은 얼굴의 남자도
곧잘 소화해냈는데 말이죠.
그런 모습을 다시금
보고 싶은 대중들도
많을 텐데 말이죠.
이에 대해 이병헌은
의외의 답변을 내놓았습니다.

사회적인 분위기 따라 영화의 장르도 많이 달라지는 거 같아요. 범죄영화들이 많아지면 그만큼 많은 문제점들이 있는 것이고, 그런 범죄영화가 현실을 반영한 영화라고 생각해 더 많은 사람들이 찾게 되는 것일 거예요.

예전에는 멜로든 휴먼드라마든 코미디든, 아주 다양한 장르들이 사랑받던 시절이 있었던 거 같아요. 휴먼드라마 같은 따뜻한 이야기나 많이많이 웃을 수 있는 코미디 영화들이, 시나리오들이 많이 나오는 그런 시절이 왔으면 좋겠어요. 굳이 따지자면, 앞으로 개봉할 <싱글라이더>가 그런 정서가 짙은, 아주 가슴 아린 영화입니다.

배우들이 그런 말 많이 하죠.
"내 영화를 볼 땐 도저히
객관적이 될 수 없다."
어떤 배우는 "2~3년이 지나서야
내 역할만이 아닌
작품 전체를 볼 수 있다"
고 말하기도 하는데요.
배우 이병헌은 어떨까요?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힘은 아직 없는 거 같아요. 아직도 영화를 보면 자꾸 제가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나봐요. 저때 왜 저렇게 어설펐지, 하게 되죠. <공동경비구역 JSA>가 개봉할 때 극장에서 그걸 30~40번은 본 적이 있어요. 처음으로 흥행 배우가 된 기쁨 때문에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 정도로 많이 보니까 그때서야 영화처럼 보이더라고요.
<공동경비구역 JSA>의 이수혁

이병헌은 현재 활동하는
한국배우 가운데
가장 활동 반경이 넓은 배우죠.
국내뿐만 아니라
할리우드에 진출해
인지도를 확확 늘려가고 있습니다.
한국 최고의 배우에
만족하지 않고
더 큰 세계를 바라보는
이병헌의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아버지가 굉장한 영화광이셨어요. 저를 TV를 볼 수 있는 나이부터 TV 앞에 앉혀놓고 주말의 명화 같은 걸 보여주면서 저 배우는 누구고, 저 영화는 앞으로 스토리가 어떻게 되고, 감독이 누구고... 그런 분이 만약에 내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것들을 아신다면 얼마나 자랑스러워하고 계실까. 이 생각을 하면 짜릿해요. 제가 하는 일이 많은 사람을 앞에 두고 하는 일이지만, 늘 우리 아버지한테 보여주고 싶은 생각이 제일 커요. 그런 것들이 저를 자꾸 새로운 곳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지.아이.조 - 전쟁의 서막> 스톰 쉐도우


이병헌의 할리우드 러쉬는
2009년 <지.아이.조 - 전쟁의 서막>
으로부터 시작합니다.
1억7500만 달러라는
거대 예산이 투입된 영화에
출연한 것만으로도 기쁜 일이지만
당시엔 '아시아 배우의 악역'이라는
공식에 갇히게 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 섞인
목소리도 있었던 게 사실이죠.
그는 당시를 어떻게 기억할까요?

작품을 온전히 제대로 판단하는 거에 걸림돌이 될 만큼 심사숙고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러다 보니 정말 좋은 작품을 놓치게 되기도 했죠. 한 작품을 두고 그렇게 고민하는 제가 <지.아이.조 - 전쟁의 서막>을 택했을 때도 곧 다시 되돌리고 싶을 만큼 너무 많은 생각이 떠나질 않았어요. 이제는 작품을 하면서 내가 즐겁게 읽었고, 하고 싶다면, "안하고 후회하는 것보다 하고 후회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어요.

제 인생에서 가장 떨렸던 날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시상자로 올랐을 때, 첫 번째 할리우드 작품인 <지.아이.조 - 전쟁의 서막> 리딩 하던 날이에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 만큼 긴장을 했었는데, 이제는 그런 순간이 다가오든, 어떤 배우가 말을 걸든, 감독한테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든 "아니 뭐 있어, 내가 영어를 못하는 게 죄야?" 이런 식으로 무대뽀로, 틀린 영어든 맞는 영어든 무턱대고 일단 한번 덤벼보는 식으로 바뀌는 거 같아요. 그게 저한테도 결과적으로 좋은 일이 될 거예요.

기자단의 마지막 질문은
"신인시절부터 지금까지,
이병헌의 인생 작품은 무엇"
이냐고 묻는 말이었습니다.
1992년 출세작 <내일은 사랑> 이후
쉬지 않고 꾸준히 작품활동을
이어온 이병헌이 가장
깊게 마음에 품는 작품은 무엇일까요?
정답은 바로 이것.

작품 하나하나가 각기 다른 이유로 제일 소중한데, 굳이 따지자면 <달콤한 인생>이 아닐까 해요. 작품에 대한 애정도 있지만, 그 영화로 인해서 할리우드를 경험하게 되기도 하고, 외국 영화 업계에 있는 사람들한테 저를 알리는 계기가 된 작품이기 때문에 고마움은 늘 가슴 속에 있죠.

이병헌은 근면한 배우입니다.
올해만 한국 영화 시장에
3편의 신작을 내놓건만
앞으로도
건국 이래 최대 규모의
사기판을 그린
<마스터>,
김훈 작가 원작과
김윤석과의 협연이 돋보이는
<남한산성>
위기의 남자가 가족을 만나기 위해
호주로 찾아가서 벌어지는 이야기의
<싱글라이더>
머잖에 공개될 예정입니다.
과연 그의 필모그래피는
어디까지 뻗어나갈 수 있을까요?


씨네플레이 에디터 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