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법 없이 사는 사람들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을 보다 보면 의아해지는 점이 하나 있다. 이 영화에는 이상하게도 경찰이 등장하질 않는다. 소녀가 성폭행당하는 사건도 일어나고, 그 성폭행범이 피살당하는 사건도 일어나지만, 경찰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마을에 찾아오질 않는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일어난 일들을 알고 있지만, 그 누구도 신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마을 사람들은 잘 살아간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벨기에의 한 시골 마을에서는 (대체로 권위적이고 남근중심적이게 마련인) ‘법’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원리가 지배한다.
그것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순리? 인륜? 섭리? 그러나 뭐라 부르건 그것의 작동 방식은 우리가 알고 있는 신화들(제우스나 오딘이나 인드라 같은 남성 신이 지배자로 등장하는)보다도 더 이른 시기의 공동체에 뿌리를 두고 있음에 틀림없다. 고대 모계제 사회(실증적으로 존재했었는지의 여부와는 무관하다),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은 조지프 캠벨이 이른바 ‘신화적 비방’이라 부른 대모신의 평가절하 작업이 일어나기 이전의 세계를, 전후의 유럽으로 소환하는 영화다. 그러자 지금 우리가 속해 있는 세계는 낯설어지는데, 그 낯설음은 대체로 이런 것이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대로가 아닌, 전혀 다른 세상도 가능했다.’
봄 : 공동체의 설립
부왕이 통치하는 법과 문명, 그 이전의 세계를 모델로 삼은 이 영화는 (자연의 섭리가 그렇듯) 겨울에서 시작해 겨울에서 끝나는 순환구조를 취한다. 겨울 어느 날, 늙은 안토니아가 자신의 죽음을 준비한다(대체로 중환자실에서 죽는 우리들에게 죽음의 날을 자발적으로 맞이할 수 있는 행운은 거의 오지 않는다. 다른 죽음도 가능할 텐데……). 그리고 플래시백……. 지모신 안토니아가 (딸 다니엘과 함께) 마을에 돌아온 것은 수십 년 전 어느 날, 아직 진눈깨비가 날리는 이른 봄이었다.
안토니아가 귀향하기 전까지 마을의 지배적인 분위기는 댄 일가가 장악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올가의 카페에서 아버지 댄이 아들 피터와 함께 정신박약인 딸을 대하는 태도는 이 마을이 얼마나 가부장적인 원리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는지를 집약해서 보여준다. 아버지가 딸에게 이렇게 말한다(피터는 누이의 가슴을 움켜쥔 채 흔들어 대고 있다). “좀 덜떨어진 애지만 힘 하나는 소처럼 세지”. 그러나 안토니아, 그녀는 실로 프로이트의 ‘원초적 아버지’보다 더 오래된 지모신, 그녀가 돌아온 이상 폭군 아버지의 횡포는 그대로 유지될 수 없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안토니아에게 지모신의 풍모를 부여한 것처럼 보이는데, 가령 그녀가 넓고 아름다운 대지에 곡식 씨앗을 뿌리는 장면을 익스트림 롱숏으로 보여줄 때, 관객들의 귀에 들려오는 내레이션은 이렇다. “마을 사람들은 흉년이나 기형아를 받아들이듯이, 전능한 신을 받아들이듯이, 그들을 받아들였다”. 프로이트와 프레이저의 부왕살해 모티브를 뒤집어 놓기라도 한듯, 돌아온 지모신이 원초적 아버지에게 도전장을 내민다(그런데 부왕은 누가 낳았을까? 원초적 아버지 이전에 원초적 어머니가 있지는 않았을까?).
당연히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의 휘슬스톱 카페처럼, 안토니아의 정원 딸린 집 주위로도 공동체 하나가 설립된다. 그 일원들을 소개해 본다. 먼저 올가, 그녀는 마을의 유일한 카페 주인이자 산파이며 또한 장의사이다. 마을의 모든 아이들은 그녀의 손에서 태어나고 모든 주검은 그녀의 손으로 입관된다. 그렇다면 그녀에게서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여신의 속성을 읽어내기는 어렵지 않을 듯하다. 다음으로 크룩핑거, 괴팍한 이 노인은 철학과 문학과 수학과 예술에 관해서라면 모르는 것이 없다. 다만 염세주의자여서 쇼펜하우어를 애독하고 삶이 죽음만 못한 것이란 믿음 속에서 은둔을 고집하는데, 안토니아와 둘도 없는 친구다. 그러니까 삶의 원리와 죽음의 원리가 이 공동체의 양극에서 교류하면서 공존한다(그렇다면 오늘날처럼 삶만을 특권화하고 죽음을 교외로 내팽개치지 않는 세상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그 외에도 바보 ‘미친 입술’, 그와 결혼하게 된 예의 그 ‘디디’, 보름달이 뜨는 밤마다 늑대 소리를 내는 ‘미친 마돈나’, 그녀를 사랑하는 아래층 ‘신교도’, 파계한 신부, 그 신부의 사랑으로 열 세 명의 아이를 출산한 레타, 다니엘의 동성 연인 라라, 그리고 이들 세대의 아이들인 테레사(수학과 음악에 출중한 재능을 보이는 천재)와 시몬과 사라와 ……(유색인종이 없다는 것은 아쉽다. 내가 그 공동체에서 크룩핑거로 살았다면 싶다).
면면을 보면 알겠지만 이 공동체에 이름을 붙이자면 ‘타자들의 공동체’ 정도가 가장 적당할 듯하다. 레즈비언, 미혼모, 파계한 신부, 바보, 정신지체자, 광인, 이교도들이 안토니아의 집 마당에 놓인 커다란 식탁에 둘러 앉아 식사를 하는 장면은 영화에서 여러 번 등장하지만,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을 만큼 풍요롭고 평화스럽고 자유롭다. 이 공동체의 많은 문제들이 직접민주주의적으로 그 식탁 위에서 (전혀 딱딱하거나 논쟁적이지 않게) 논의되고 해결된다. 고백하건대 이것은 내가 본 것들 중 가장 민주적이고 아름다운 공동체다.
여름 : 폭발하는 사랑
대지가 푸른색으로 뒤덮이자, 자연이 그렇듯 사람들의 사랑도 시작된다. 피터에게 겁탈당하고 안토니아네로 들어와 살게 된 디디가 미친 입술과 결혼한다. 다니엘은 결혼을 피해 자발적으로 미혼모가 되어 테레사를 낳는다(아버지가 반드시 필요할까?). 테레사는 천재인데, 그 아이의 선생님 라라가 다니엘의 영원한 사랑이 된다(누구도 그들의 동성애를 백안시하지 않는다). 안토니아도 바스(그는 비유하자면 남근 없는 남성이다. 온화하고 성실한 그는 댄 일가의 남자들과 대조적이다)에게 청혼을 받지만 거절한다. 그러나 오히려 결혼이라는 제도에 묶이지 않았으므로, 둘은 영원한 연인이자 가족으로 살아간다(결혼은 사랑의 결말이 아니라 족쇄일 수도 있다. 특히 여성에게는). 레타는 신부와 사랑해 해마다 아이를 낳고(열 셋까지 낳는다), 테레사도 시몬(레타의 장남)과 우정을 쌓아간다. 우정은 곧 사랑이 된다(우정과 사랑은 구분되어야 할까?).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자명함에 수많은 질문들을 던지게 할 만큼, 이 여름의 공동체는 그렇게나 시끌벅적했는데, “곳곳에서 사랑의 열정이” 소음으로 폭발하던 어느 밤, 잠을 못 이룬 다니엘의 딸 테레사가 복도에 나와 한 말은 단 한 마디였다. “잠을 못 자겠어요!!” 여기는 성이 금기 시 되지 않고, 동성애나 신체적 장애가 어떤 편견에도 휘말리지 않으며, 미혼모가 되겠다는 딸의 계획을 어머니가 도울 뿐 아니라, 결혼이라는 제도가 오히려 어색해지는 공동체다. 천재는 그저 약간의 ‘비정상’으로 취급 받으며, 모성애(이것은 이데올로기이다) 강한 남성이 공부하는 아내 대신 육아를 담당하고, 그 모든 일들이 일어나는 와중에도 늘상 죽음이 친구처럼 곁을 지키는 공동체다. 여러 번 봐도 다시 보고 싶어지는 이 영화의 여름 장면들, 그러나 그 여름도 영원할 수는 없다.
가을 : 말의 힘으로
순리대로 가을이 온다. 가을은 미친 마돈나의 죽음과 함께 시작된다. 그녀가 죽자 그녀를 사랑했던 신교도도 세상을 뜬다(다행히 안토니아 덕분에 둘은 무덤에서 하나가 된다. 이 영화는 반종교적이기도 하다). 곧이어 늙은 가부장 댄도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가을 수확이 한창인 들판으로 남근 가진 악마, 피터가 돌아온다.
디디를 겁탈했던 그가 아직 어린 소녀인 테레사를 겁탈한 밤, 안토니아의 모습은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두렵고 영웅적이다. 라라가 지켜보는 가운데 다니엘로부터(그녀들은 당연하다는 듯 안토니아를 만류하지 않는다) 장총을 넘겨받은 그녀가 피터를 찾아 나선다. 그는 카페에서 발견된다. 역시 경찰은 오지 않는데, 알다시피 이 마을에서는 법이 아닌 다른 원리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안토니아는 피터에게 법 대신 고대에 가장 유력했던 처벌, 곧 저주를 건다. 그 저주의 내용은 이렇다.
“내게 살인할 능력이 있다면 널 죽였을 거야. 그 대신 널 영원히 저주하겠어. 조용히 해! 또 한번 내 앞에서 얼씬대면 널 저주해 죽여 버리겠어. 내 눈에 띄면 뼈가 부러지고 입에서는 오물이 쏟아질 거야. 또 다시 내 앞에 나타나면 마시는 물은 독이 될 것이고 네가 먹는 것과 숨쉬는 공기는 너의 폐를 썩게 할 것이며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할 거다. 애를 강간한 대가야”
마술적 리얼리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영화답게, 놀랍게도 안토니아의 저주는 말 그대로 실현된다(고대에는 말에도 마법적 힘이 있었다고들 한다). 피터는 마을 청년들에게 집단으로 린치를 당하고, 폭우 속에(입에서 오물을 쏟으며) 집으로 돌아오지만, 물을 마시려다 동생 얀에 의해 살해당한다. 말먹이 우물에서의 익사였다(그의 폐에는 저주에서처럼 썩은 물이 가득했으리라). 그러나 그 일 이후로 공동체는 늙는다. 겨울이다.
겨울 : 단 한 번 출 수 있는 유일한 춤
그가 겪었어야 했던 트라우마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전쟁 후로 항상 겨울만을 살았던 인물이 크룩핑거다. 이 염세적인 노인이 설파하는 교훈은 매력적인데, 그가 자주 읊어대는 쇼펜하우어의 명문들 때문만은 아니다. 아마도 그가 없었다면, 공동체는 생명력으로만 무성했으리라. 죽음을 모르는 생명들의 무성함은 되레 두려울 때가 있지 않던가! 그의 생일 파티와 함께 추운 계절이 시작된다.
자신의 생일 파티에서 그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태어나지 않는 게 최고야. 아니면 무존재가 되든지.” 그 말의 예지력 탓이었을까? 공동체는 이제 죽음의 슬픔을 겪어야 한다. 레타가 13번째 아이를 출산하다 죽는다. 그러자 파계 신부는 아이들을 데리고 도회지로 나가 사회사업가가 된다. 피터의 동생 얀도 죽는다. 그러나 얀의 어머니(디디의 어머니이기도 하다)는 그 시신을 차갑게 외면한다. 그도 가부장이었으니까. 그리고 디디의 어머니에게도 원한은 많았으니까. 미친 입술은 트랙터 사고로 죽고, 마지막으로 죽음의 예찬자 크룩핑거 자신이 죽는다. 자살이다.
만약 저 공동체에서 살 수 있다면 크룩핑거 쯤이 적당하겠다 싶은 나로서는 그의 죽음 앞에서 답해야 할 질문이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태어나서 자라고 사랑한다는 것, 즉 산다는 것은 정말 가치 있는 일인가? 종종 나는 자발적 선택 없이 우연하게 태어나 백년 가까운 삶을 영위하는 일이 쾌보다는 불쾌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내 안에 크룩핑거 있다. 그러나 크룩핑거의 반대편엔 (싸우지 않고 서로에게 조언을 구하면서) 역시나 안토니아가 있다. 지모신은 생명의 신, 그녀는 죽기 며칠 전 (영화가 끝나도 오랫동안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을) 이런 말을 증손녀 사라에게 남긴다.
안토니아 : 영원히 죽는 것은 없어. 언제나 무엇인가가 남는단다. 그리고 거기서 새로운 것이 탄생해. 인생은 그런 거야. 이유 없는 시작이지. 왠지, 어딘지 모를……. 왜냐하면 사는 게 인생이니까.
사라 : 천당은 있어요?
안토니아 : 이 춤이 우리가 출 수 있는 유일한 춤이지.
지모신 안토니아 왈, 인생이란 유일하게 한 번 추는 춤이란다. 그녀도 유물론자이니 천당이라거나 내세 같은 걸 믿지 않는다. 또 별다른 이유도 대지 못하면서 생명이란 아름다운 것이라는 관용어구를 반복하는 생태주의자도 아니다. 그녀 역시 삶의 이유 따위는 없다는 것을, 인생이란 살아감 그 자체일 뿐이라는 것을 안다(사는 것이 인생이란 말은 얼마나 동어반복적인가?). 그래서 크룩핑거는 그 무의미함을 못 이기고 죽음 편에 섰던 것일 테다.
그러나 다시 안토니아 왈, 우리가 최선을 다해 그 춤을 춘 이상 그로부터 무언가는 다시 시작된단다. 삶은 이유 없이 시작하지만, 또한 영원히 대물림되기도 하는 거란다. 춤은 어차피 끝날 테지만, 이유 없이 시작된 단 한 번의 춤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추는 것, 그것이 인생이란다. 그래서였을까? 온 힘을 다해 단 한 번의 춤을 추고 이제 죽음을 맞이하는 안토니아의 마지막 표정에서는 묘한 자부심과 만족감과 회한이 동시에 묻어난다. 내가 본 가장 장엄하고 평화로운 죽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