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회 부산국제영화제가 총 열흘 간의 일정을 마치고 내일(15일) 폐막한다. 지난 20여년간 아시아 최고의 영화제로 우뚝 섰던 영화제가 올해는 유독 힘에 부쳐 보였던 게 사실이다. 영화제 안팎의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진과 태풍 피해로 관광객의 발길마저 끊긴 상황. 하지만 영화제는 꿋꿋하게 제 갈길을 갔다. 영화팬들은 올해도 예년과 똑같이 열광했다. 그 길고도 짧았던 열흘 간의 일정 동안 있었던 올해의 기억할 만한 순간을 꼽아봤다.

사라진 해운대 비프 빌리지

매년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는 해운대의 하늘은 늘 맑았다. 종종 비바람이 몰아치긴 했지만, 그것도 한때였을 뿐. 영화제 열기를 식히지는 못했던 게 사실이다. 특히 해운대 비프 빌리지와 야외무대 행사 무대, 각종 부스가 차려져 있던 백사장은 축제 분위기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올해도 이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해운대 비프 빌리지 야외무대는 영화제의 상징과도 같은 행사가 열리던 곳이었다.

맑고 높은 하늘을 자랑하며 관객을 맞이했던 해운대의 하늘이 올해는 유독 흐렸다. 영화제 시작 직전에 불어닥친 태풍의 영향으로 해운대에서 아무런 행사를 할 수가 없었던 것. 모든 야외 행사는 영화의 전당으로 옮겨져 예정대로 진행되긴 했지만, 확실히 예전만큼 해운대의 활기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태풍 차바가 쓸고 지나간 해운대 백사장
올해는 비프 빌리지가 있던 자리에서 사람들이 둘러앉아 바다를 즐기고 있었다

영화의 열기는 뜨거웠다
올해의 매진작

부산영화제는 국내 영화제 가운데 티켓 구하기가 가장 어려운 영화제 중 하나다. 워낙 지금 전세계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다수의 프리미어 상영작을 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영화팬이라면 전세계에서 가장 먼저 화제작을 볼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긴 어려울 터. 그래서 올해 역시 누구보다 먼저 티켓을 구하기 위한 전쟁이 치열했다. 역시나 밤샘 줄서기도 계속됐다.

매년 인기가 많았던 영화들은 해외 영화제에서 공인(?)받은 화제작 중심이다.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칸 영화제를 통해 알려진 <나, 다니엘 블레이크>, <단지 세상의 끝>, <토니 에드만>, <패터슨>, <퍼스널 쇼퍼> 등의 영화와 작품 내외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많았던 <국가의 탄생>을 비롯해서 마니아 팬층을 유지하고 있는 <컨택트>, <오버 더 펜스> 등의 영화가 매회 매진 사례를 이뤘다. 한국영화의 경우에는 GV 행사에서 배우들을 직접 만나볼 수 있었던 <아가씨>, <더 테이블>, <두 남자> 등이 빠른 매진을 이뤘다. 무엇보다 국내외 화제작을 통틀어 올해 부산에서 가장 화제가 됐던 영화를 동서양 두 편 꼽으라면 단연 <너의 이름은>과 <라라랜드>였다. 감독 내한 행사까지 치른 <너의 이름은>에 비해 입소문만으로 기대치를 한껏 높인 <라라랜드>의 매진사례는 더 놀라웠다. 매력적인 스틸컷 하나만으로 영화를 보고 싶게 만드는 게 영화의 힘 아니던가. 12월 개봉 예정인 <라라랜드>는 돈으로 살 수 없는 홍보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티켓 구하기가 가장 어려웠던 영화 중 한 편인 <라라랜드>
뒷맛이 씁쓸한 암표

영화제 측에서 공식적으로 티켓나눔터를 운영하고 있지만, 간절하게 보고 싶은 영화표를 구할 수 없었던 관객들은 결국 중고 거래 사이트 등에서 거래되는 암표를 살 수밖에 없었다. <라라랜드> 같은 인기작 영화티켓이 특히나 구하기 어려웠던 영화라고. <신고질라>, <너의 이름은> 같은 팬층이 두터운 인기작도 마찬가지. 대부분 정가에 거래되기는 하지만 일부 인기작은 만원 단위를 훌쩍 넘어갈 정도로 웃돈을 주고 구할 수밖에 없다는 후문. 이해는 되지만 한편으로는 영화팬들의 열정을 이용하는 것 같아 아쉽기도 하다.

올해의 주목받은 감독들

부산영화제에서 주목받은 영화들은 그 기운에 힘입어 극장 개봉으로까지 이어져야 좋을 것이다. 씨네플레이도 직접 영화를 찾아보면서 고르고 골라 조현훈 감독의 <꿈의 제인>, 이동은 감독의 <환절기>, 신준 감독의 <용순>, 손태겸 감독의 <아기와 나>, 남연우 감독의 <분장> 다섯 편의 주목할 영화를 엄선했다. 아마도 이 영화들이 내년 극장가에서 화제가 될 독립영화임이 틀림없다. 이 영화를 연출한 감독과 배우를 기억했다가 내년 즈음에 극장 개봉을 하게 되면 꼭 많은 응원을 보내주길. 한국영화계의 젊은 얼굴들이다. 

올해는 인증샷이 대세

해운대 야외 무대 행사장 대신 올해 영화제 행사는 대부분 영화의 전당 두레라움 광장에서 진행됐다. 덕분에 영화제 관객들은 영화의 전당 앞에 모이기만 하면 다양한 행사를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호사를 누렸다. 한 가지 재미있었던 점은 올해의 게스트 대부분 관객들의 분위기를 잘 느낄 수 있는 인증샷을 찍었다는 사실. 특히 손하트 인사는 해외 영화인들도 마치 한국식 전통 인사처럼 인식하는 분위기다. <블리드 포 디스>의 마일스 텔러나 애론 에크하트 등 할리우드 스타들도 인증샷은 물론, 손하트 인사도 팬들에게 남겨주고 떠났다.

<사랑과 욕망의 짐노페디> 팀
<커피 메이트> 팀
<춘몽> 팀
<죽여주는 여자> 윤여정, 윤계상
<비밀은 없다> 손예진

<비밀은 없다>로 부산을 찾은 배우 손예진의 오픈토크는 팬과 배우의 관계를 새삼 돌아보게 하는 자리였다. 손예진은 질문을 하겠다며 손을 든 한 관객을 소개했는데 무려 12년 동안이나 옆에서 지켜봐온 자신의 팬이라고 고마움을 전했다. 자신의 거의 모든 행사에 찾아다닌다면서. 한류스타다운 인기이면서 동시에 영화제에서만 느낄 수 있는 훈훈한 광경이었다. 

<블리드 포 디스> GV 행사에서 인증샷을 찍겠다고 바닥에 앉은 배우들.

올해 영화제 초청작이었던 벤 영거 감독의 <블리드 포 디스> GV 행사에서 보여줬던 마일스 텔러의 털털한 매력은 관객들에게 큰 선물이었다. 무대에 등장할 때부터 춤을 추며 등장한 그는 다소 엉뚱한 질문에도 성실하게 답해주었고 2층까지 가득찬 관객들의 모습을 인상적으로 바라봤다. 자신의 답변을 통역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이러면 앉아서 기다리겠다면서 바닥에 주저 앉아 토크를 진행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관객들이 환호했다.

마일즈 텔러의 'I love you'
그들의 마지막 인사법
조용했던 해운대 밤거리

10월부터 시행된 김영란법, 즉 부정청탁방지법의 여파는 부산 해운대를 조용하게 만들었다. 영화인들의 술자리는 급격하게 줄었고 각종 배급사 파티도 취소됐다. 그나마 열린 한국독립영화인의 밤 행사에서도 특히나 기자들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는 후문. 영화제 참석 보이콧을 철회하지 않은 몇몇 단체들도 부산을 찾지 않아 전반적으로 영화인 참여자 수가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때문에 영화제 관객들에게는 해운대 시장 골목이나 포장마차촌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술마시고 있는 영화배우들을 만나던 재미도 줄었다. 몇 년 전 해운대 백사장에서 기타를 치며 혼자 즉석 공연을 하던 배우 장근석의 모습같은 즐거운 풍경은 올해 없었다.  

내일은 영화의 해가 뜬다

크고작은 송사에도 불구하고 영화제는 무사히 마칠 것이다. 물론 내년에도 계속되리라. 비록 영화인들의 참여는 저조했지만 해외 영화인들의 참여는 부족함이 없었고, 일반 관객은 느끼기 어려운 필름 마켓 이나 피칭 행사 현장은 활기를 띄었다. 부산국제영화제는 아시아 영화 교류의 장으로 올해도 잘 기능했다. 물론 관객들의 열기도 예년과 다를 바 없이 뜨거웠다. 영화제를 둘러싼 일들이 정리되면 빠르게 정상화될 것이다. 이렇게 멋진 영화의 전당이 아직 건재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전당의 낮과 밤

씨네플레이 에디터 가로등거미
사진 씨네21 BIFF 데일리 사진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