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행우주 설정은 “이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욕망을 대리충족하는 판타지다.
최근 서브컬쳐 작가들이 일용할 양식처럼 써먹는 평행우주 설정의 원리를 설명하는 일은 쉽지 않다. 가장 각광받는 설정은 양자역학의 다세계 해석에 기반한 설정인데, 최선을 다해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이렇다. 양자역학을 설명하기 위해 가장 자주 동원되는 이론인 ‘슈뢰딩거의 고양이’ 실험에서, 상자를 열기 전까지 고양이의 생사는 결정되지 않는다. 관찰자가 상자를 열어 내부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고양이가 살아있을 가능성과 죽었을 가능성이 중첩된 채로 공존하고 있다. 그 결과값은 관찰자가 상자를 연 순간 결정된다.
상자를 열어보니 고양이가 살아있었다고 치자. 코펜하겐 해석에서는 관찰자가 개입한 순간 파동함수가 붕괴되어 한 점으로 수축되며 나머지 모든 가능성이 사라진다고 주장한다. 상자를 여는 순간, 고양이가 죽었을 가능성은 붕괴되고 고양이가 살아있을 가능성만 남은 셈이다. 그러나 다세계 해석에서는 관찰자가 개입한다고 해서 파동함수가 붕괴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대신 ‘관찰자인 내가 상자를 열어봤더니 고양이가 살아있는 세계’의 가능성과, ‘관찰자인 내가 상자를 열어봤더니 고양이가 죽어있는 세계’의 가능성이 동시에 실현된다. 상자를 열기 전까지는 하나였던 세계가, 상자를 열어 고양이의 생사를 확인하는 순간 두 개로 분화한다는 게 다세계 해석의 주장이다.
다시 말해 다세계 해석에서 세계는, 우리가 살면서 사소한 선택을 내릴 때마다 그 선택의 가짓수만큼 무한하게 분화한다. 점심 메뉴로 남들 따라 짬뽕을 먹은 내가 사는 세계와, 소신 있게 500원 더 비싼 볶음밥을 먹은 내가 사는 세계, 더 과감하게 “저는 도시락을 싸왔으니 혼자 먹겠습니다. 다들 점심식사 맛있게 하고 오세요”라고 질러버린 내가 사는 세계가 개별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세계들이 갈라지는 분기점은 다름 아닌, 내가 “점심 뭐 먹을래?”라는 질문에 답하는 순간이라는 이야기다.
이 설명조차 쉽지 않은 복잡한 설정을 동원해가며 상당히 많은 서브컬쳐 작가들이 도착한 자리는, 대체로 “이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욕망을 대리충족하는 판타지다. 지금 이 세계가 만족스럽지 못하고, 되돌아보면 후회 투성이인 선택들도 많았으니, 현명한 선택만 내리며 도착한 세계가 있다면 좋지 않을까? 시간여행에 비하면 타임 패러독스도 없어 인과율을 다루기도 간단하니 말이다. 그래서 로맨스 판타지를 쓰는 작가들은 “내가 첫사랑을 그렇게 떠나보내지 않고 결혼에 성공한 평행우주”를 상상하고, 민족주의 전쟁 판타지물을 쓰는 작가들은 “조선이 일찌감치 서구열강과 교류를 해 동북아시아의 맹주가 되어 일본도 점령하고 청나라도 집어삼킨 평행우주”를 상상하고, 쿠엔틴 타란티노는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에서 미군 특수부대가 히틀러를 벌집으로 만들어 죽인 평행우주를 상상했다.
OCN <트레인>이 상상하는 평행우주는, 제때 속죄하지 못한 죄책감을 안은 채 짓눌려 살던 형사 서도원(윤시윤)의 욕망을 따라간다. 12년 전, 도원은 사고사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남문철)의 장례를 치르던 중 아버지의 유품에서 목걸이를 발견한다. 아버지와 같은 날 강도살해로 세상을 떠난 한규태(김진서)는 목이 졸려 사망했는데, 현장에서 사라진 목걸이가 유력한 범행도구였다. 도원은 규태의 집에 방문했던 아버지의 수중에서 목걸이가 발견되자 본능적으로 아버지를 의심하고, 형사과장 오미숙(이항나)에게 이 사실을 밝힌다. 그러나 오 과장은 이미 용의자가 사망해 기소도 못하게 된 상황에서 그 아들인 도원에게만 세상의 비난이 쏠릴 것을 걱정해 그 사실을 숨긴다. 도원은 죄책감에 한규태의 딸 서경(경수진)을 제 혈육처럼 돌보기 시작하는데, 서경이 진실도 모른 채 자신을 향해 웃을 때마다 죄책감에 질식해간다.
진범을 잡겠다는 마음을 내려놓지 못한 서경은 검사가 되어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된 진실에 집착하고, 그럴 때마다 도원은 한탄한다. 그 때 아버지가 사고로 죽지 않고 살아서 검거된 뒤 죄값을 치렀다면, 지금쯤 나는 죄책감에 짓눌릴 일도 없고 서경이도 이렇게 인생을 허비하진 않았겠지. 하지만 서경은 집요한 수사 끝에 진범이 따로 있다는 사실까지 밝혀낸 직후 정체불명의 살인범에게 살해당한다. 삶의 의욕을 잃은 도원은 서경이 발견된 철길 옆에서 조용히 총구를 관자놀이에 가져다 댄다. 그리고 그 순간, 도원의 눈 앞에 서경이 타고 있는 열차가 지나간다. 정신없이 열차에 올라탄 도원이 도착한 곳은, 전혀 다른 우주다. 아버지는 일찌감치 살인자로 지목됐고, 서경은 검사가 아니라 형사가 되어 자신을 증오하고, 자신은 비리형사로 살아가고 있는 평행우주.
나는 의아함에 머리를 긁적거렸다. 도원이 욕망해야 했던 세계는 ‘아버지가 살인자로 지목된 세계’가 아니라, ‘서경에게 더 일찍 진실을 이야기할 기회가 있는 세계’ 아닐까? 전자는 도원이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지만, 후자는 도원이 선택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의도가 무엇이었든, 오 과장과 도원은 자신들이 가진 정보를 서경에게만 감추며 서경을 기만했다. 그들이 조금만 더 용기를 내서 바른 선택을 했더라면, 서경도 시간 낭비를 덜 했을 것이고 진범은 따로 있다는 사실도 더 일찍 알게 되었을 지 모른다. 그러니, 아버지가 살인자로 지목됐더라면 다 좋았을 것이라는 도원의 욕망은 사실 비겁한 욕망이다.
그럼에도 드라마는 도원을 ‘서경에게 더 일찍 진실을 이야기할 기회가 있는 세계’ 대신 ‘아버지가 살인자로 지목된 세계’로 보냈다. 이 세계에서, 도원은 과연 비겁하지 않고 잘못되지 않은 선택들을 내려 자신과 서경 모두를 구할 수 있을까? 좀 더 지켜봐야 알 일이지만 아마 지금까지처럼 살아서는 쉽진 않을 것이다. 비겁함으로 이룰 수 있는 정의 같은 건 없다는 걸, 원래 있던 세계에서 뼈저리게 체험하지 않았던가?
이승한 TV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