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노>의 스포일러 투성이인 글입니다. 아직 <추노>를 보지 못한 분이 계시다면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살아서 좋은 세상 만들어야지. 그래야 다시는 우리 같은 사람 나오지 않지

소현세자의 삼남이자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인 석견(김진우)을 데리고 도망치던 송태하(오지호)는, 청나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한참을 달리다가 주저앉아 말한다. 이 땅에 진 빚이 너무 많아서 차마 청으로 가지 못 하겠노라고. 수많은 시청자들이 이 대목에서 화를 참지 못하고 분노했다. 일찍도 결심한다. 이 땅에 진 빚이 많아 갚고 싶다는 마음은 갸륵한데, 네가 그 마음을 조금만 일찍 먹었어도 너한테 길 열어주겠다고 대길이(장혁)가 개죽음 당하지 않아도 됐잖아!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 뜻을 따르겠다고 말하는 혜원(이다해)과 송태하가 부둥켜안고 우는 모습은, KBS <추노>의 마지막 회를 보던 이들의 마음 속에 세상 더 없이 복잡한 장면으로 남았다.

시간이 지나 다시 본 마지막회는 조금 다르게 읽히기도 했다. 석견을 해하기 위해 인조(김갑수)가 보낸 살수들과 맞서 싸우느라 여기저기 찔리고 베여 피투성이가 된 태하를 부축하며 오열하는 혜원에게, 대길이는 자신도 피칠갑이 된 채 말한다. 어여 데려가라고. 살아야 좋은 세상도 만들고, 그래야 다시는 우리 같은 사람이 안 나온다고. 대길이 목숨을 걸고 길을 열어준 이유에는 분명 혜원을 향해 평생 품고 있었던 절절한 마음도 있었겠으나, 그만큼이나 송태하에게 거는 기대도 있었던 셈이다. 왜 이렇게까지 자신을 막는 거냐고 묻는 황철웅(이종혁)에게도 대길은 말한다. 저기 저 놈이, 이 지랄 같은 세상을 바꾸겠다고 하지 않냐고.

과거 혜원이 ‘언년’이란 이름을 지닌 노비로 살던 시절, 대길도 비슷한 꿈을 꿨다. 언년이에게 가는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서, 언년이가 헤진 옷을 입고 추운 겨울 시린 강물에 손을 담그며 빨래를 해야 하는 게 싫고, 뭇 사람들이 언년이를 함부로 대하는 게 싫었다. 양반집 도령인 대길은 벼슬길에 올라 높은 자리에 가서 양민과 노비 사이의 차별을 철폐하는 꿈을 꿨다. 그러나 꿈은 멀고 현실은 언제나 가까웠다. 언년이와 큰놈이(조재완)가 집에 불을 지르고 도망간 뒤, 몰락한 가문에서 홀로 살아남은 대길은 세상에 희망을 잃고 도망노비를 잡으러 다니는 추노꾼이 되었다. 그랬으니 대길의 눈에는 태하가 신기했을 것이다. 자신이 이미 한 차례 실패한 자리에서, 노비로 전락한 신분으로도 새로운 세상을 열어보겠다고 말하는 태하의 말들이 신기했겠지.

그래서 대길이는 그 자리에 서서 싸우다 죽는 쪽을 택한다. 송태하가 도대체 어떻게 새로운 세상을 열겠다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열어 보겠다니까. 송태하가 조선에 남겠다고 했던 결정 또한 마찬가지의 이유 아니었을까. 청나라로 가는 배에 타면 석견도 살릴 수 있고, 찔리고 베인 상처도 치료 받고, 더 이상 쫓기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청으로 가면 조선은 어떻게 바꾸지? 내가 세상을 바꾸겠다는 말 한 마디에 희망을 걸고 제 목숨을 버려가며 자신을 지켜준 이들에게 진 빚은 어떻게 갚지? 청의 입김으로 조선의 내정에 개입해 볼 수는 있어도, 그것만으로 고통받는 노비와 백정과 천 것들의 삶이 바뀌진 않을 것이다. 그건 장원급제 해서 먼훗날 높은 벼슬에 오르면 세상을 바꾸겠다던 어린 대길이의 꿈만큼이나 멀고 막연한 것이니까. 그래서 조선에 남기로 했던 건지 모른다. 지금 고통받는 이들의 곁에 서서, 앞으로 올 사람들이 살아갈 세상은 더 나아질 수 있도록 노력하기 위해. 대길이가 목숨을 걸고 지켜 준 목숨이니, 살아서 더 좋은 세상 만드는 데 써야 할 것 아닌가.

지난 9월 21일은 제1회 ‘청년의 날’이었다. 갈수록 줄어드는 일자리와 어두워지는 전망, 하락하는 삶의 질 앞에서 고통받는 청년들을 구제하기 위해 6년의 논의 끝에 마련된 ‘청년기본법’ 제정을 기념하고, 청년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높이기 위해 지정된 기념일이다. 첫 해의 기념식에서 그간 소외당했던 청년들에게 마이크를 주는 대신 BTS나 임동혁처럼 일이 압도적으로 잘 풀린 예외적인 청년들을 무대에 세운 것으로 이래저래 설화가 있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나은 것 같다. 뭐라도 있으면, 고쳐가고 보완해가며 활용할 수 있으니까. 법이 규정하는 청년의 연령대 정의는 ‘만 19세 이상 34세 이하’. 각 지자체마다 청년 인구 수가 다르고 평균 연령이 다른 탓에 지자체 사정에 따라 탄력적으로 규정할 것을 권고하고 있지만, 서울에 살고 있는 나에겐 해당사항이 없으리라. 난 이제 얄짤없이 ‘비청년’인 어른이다.

오늘날의 청년들이 처한 현실을 인조 연간 조선의 노비들과 비교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래도 몇 가지는 안다. 지속적이고 고른 성장을 약속할 수 없는 환경이라는 것을. 경쟁은 더 심해질 것이고, 안정적인 일자리를 가지지 못하는 청년들이 더 늘어날 것이며, 어쩌면 그들은 그들의 선배 세대들이 누렸던 수준의 삶의 질에 도달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 그런 세상을 바꾸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느냐 묻는다면 나도 또렷한 수는 모른다. 그래도 더 치열하게 고민하는 걸 멈추진 않을 셈이다. 송태하의 말처럼, 이 땅에 진 빚이 나 또한 많은 사람이니까. 이제 더는 청년이 아닌 내겐, 내 뒤에 올 이들을 위해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해야 할 의무가 있으니까.


이승한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