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1995년을 시대적 배경으로 대기업인 삼진그룹의 여직원 3명이 회사내부 비리를 고발하는 영화입니다. 회사가 비리를 은폐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법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삼진그룹의 이자영(고아성), 정유나(이솜), 심보람(박혜수)은 입사 8년차 직원인데, 생산관리 3부 소속인 자영은 최동수 대리(조현철)와 함께 생산관리 3부가 담당하고 있는 옥주공장에 외근을 나갔다가, 옥주공장의 폐수가 유출되는 현장을 목격하게 됩니다. 자영은 이 사실을 최동수 대리를 통해 과장에게 보고를 하고, 이에 따라 삼진그룹은 옥주공장과 연결된 하천의 수질검사를 외부에 의뢰하게 되는데요. 수질검사 결과 캘리포니아 환경연구소가 작성 주체로 되어있는 영문보고서에 따르면 공장에서 유출된 폐수는 페놀이고 페놀수치는 1.98이라고 확인되어, 자영과 최동수 대리는 삼진그룹을 대리하여 그 영문보고서를 토대로 옥주마을 주민들과 합의를 진행합니다. 페놀수치는 3 이하면 안전한데 영문보고서에는 페놀수치가 1.98로 기재되어 있으므로 이것을 근거로 삼진그룹은 합의금을 약 2천만원대로 하는 내용의 합의서에 옥주마을 주민들의 도장이나 무인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 영문보고서는 작성주체와 내용이 허위였는데, 캘리포니아 환경연구소라고 기재되어 있던 영문보고서에 적힌 연락처는 사실은 네브라스카에 있는 한 옥수수 농장의 전화번호였고, 삼진그룹이 수질검사를 의뢰한 곳은 국내에 있는 모 대학교의 관련 연구소였으며 대학교 연구소에서 작성한 실제 보고서에는 페놀수치가 488이라고 기재되어 있었습니다. 정리하면, 모 대학교 연구소의 수질검사를 통해 밝혀진 내용은 옥주공장에서 유출된 페놀수치는 488이라는 사실인데, 옥주마을 주민들은 캘리포니아의 환경연구소 수질검사 결과에 따르면 페놀수치는 1.98이라고 전제한 뒤 삼진그룹에서 제시한 합의금 2천만원대 합의서에 날인을 한 것입니다. 영화 후반에 밝혀지지만, 페놀수치 488에 따라 진행된 합의금은 최대 1억 3천만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옥주마을 주민들은 합의금 2천만원대 수준의 합의를 착오 등을 이유로 취소할 수 있을까요. 합의서는 먼저 민법상 전형계약의 하나인 ‘화해계약’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검토하는 것이 필요한데, 민법상 화해계약(민법 제731조)에 해당하면 원칙적으로 화해계약을 취소할 수 없으나 예외적으로 ‘화해당사자의 자격 또는 화해의 목적인 분쟁 이외의 사항’에 착오가 있으면 취소할 수 있어요. 그래서 판례는 착오의 대상이 취소요건인 ‘화해당사자의 자격 또는 화해의 목적인 분쟁 이외의 사항’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먼저 판단합니다. ‘화해당사자의 자격’은 비교적 판단이 쉬우므로 ‘화해의 목적인 분쟁 이외의 사항’에 해당하는지 여부가 주로 문제되는데, 이에 대해 판례는 ‘분쟁의 대상이 아니라 분쟁의 전제 또는 기초가 된 사항으로서, 쌍방 당사자가 예정한 것이어서 상호 양보의 내용으로 되지 않고 다툼이 없는 사실로 양해된 사항’이라고 설명합니다. 표현이 어렵지만 화해 당사자간에 의견이 갈리지 않고 합의를 하기 위한 전제가 된 사실 정도로 이해하면 돼요. 영화에서 삼진그룹이 합의금 2천만원대로 진행한 합의는 마을 주민들과 삼진그룹 사이에 페놀수치가 1.98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한 것이므로, 사후에 페놀수치가 1.98이 아니라 488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면 분쟁 이외의 사항에 대한 착오라고 볼 수 있으므로 화해계약을 취소할 수 있다고 보입니다.

한편 합의가 민법상 전형계약인 ‘화해계약’이 아니라고 볼 수도 있는데요. 민법에서 정하고 있는 화해계약이란, ‘당사자가 상호 양보하여 당사자 간의 분쟁을 종지할 것을 약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당사자가 상호 양보하여 분쟁을 끝내려고 합의하는 것이 화해계약인데, 영화에서는 옥주마을 주민들이 삼진그룹을 상대로 폐수유출에 따른 불법행위 책임을 물으면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한 사실이 없고, 사전에 마을주민과 삼진그룹 사이에 어떤 분쟁이 있었다고 보이지 않아요. 예를 들어 주민들은 합의금 5천만원을 주장했는데 삼진그룹은 위자료 명목으로 1천만원만 주겠다고 다투고 있었고, 그 다툼을 끝내기 위해서 쌍방이 양보하여 합의금 2천만원대 수준으로 합의서를 작상하였다면 쌍방이 상호 양보하였으므로 민법에서 말하는 화해계약이라고 볼 여지가 높은 것이죠. 그러나 영화에서는 옥주마을 주민들이 삼진그룹과 합의금 액수나 페놀수치를 가지고 다툰 사실이 없고 삼진그룹이 일방적으로 제시한 페놀수치를 믿고 합의서에 날인을 하였으므로 민법상 화해계약에 이르지 않은 일반적인 법률행위라고 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경우에도 착오를 이유로 취소할 수 있는데, 이때는 민법 제109조에 따라 ‘법률행위 내용의 중요부분에 착오’가 있어야 취소할 수 있고, 중과실이 없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합의금 2천만원대 수준인 합의서에 날인을 한 의사표시를 취소하기 위해서는 1) 법률행위 내용의 착오이고, 2) 합의 당사자와 일반인 입장에서 그러한 착오가 없었더라면 그 의사표시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인정될 정도로 중요부분의 착오여야 하고, 3) 의사표시자의 중과실이 없어야 합니다. 영화에서 옥주마을 주민들은 페놀수치가 1.98이 아니라 488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합의금을 최대 1억 3천만원까지 받을 수 있는데도 고작 합의금 2천만원대 수준에서 합의를 하지 않았을 것이고 옥주마을 주민이 아닌 일반인의 입장에서도 그 수준에서는 합의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페놀수치를 착오한 것은 중요부분의 착오에 해당하고, 옥주마을 주민들이 페놀수치를 착오한 것에 어떠한 과실이 있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따라서 옥주마을 주민들은 합의금 2천만원대로 합의한 의사표시를 착오를 이유로 취소할 수 있다고 보입니다. 주의할 것은 이 규정에 따른 취소는 추인할 수 있는 때부터 3년, 법률행위를 한 날로부터 10년 내에 행사해야 하고 이것은 제척기간이므로, 마을 주민들은 합의서에 날인한 날로부터 10년 내에는 취소권을 꼭 행사해야 합니다.

영화 후반부에 삼진그룹의 페놀유출과 보고서 조작 사실이 드러나면서, 삼진그룹 회장의 아들인 오태영 상무(백현진)가 호텔방에 있다가 경찰한테 체포를 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때 경찰이 구속영장을 제시하는데, 원칙적으로 체포영장이 맞겠죠. 그리고 영화에 나오는 구속영장을 보면, 제목이 ‘구속영장’, 영장번호 ‘1995-3542’, 사건번호 ‘1995고단4359’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러나 위 내용은 틀린 것으로, 현재 오태영 상무는 ‘수질 및 수생태계 보전에 관한 법률’위반 혐의로 수사를 받는 ‘피의자’ 단계에 있고, 수사를 통해 범죄혐의가 있다고 판단되어 검찰에서 기소를 해야 ‘피고인’이 됩니다. 사건번호 ‘1995고단4359’는 기소된 이후 법원에서 재판을 받을 때 부여되는 사건번호 형식이므로, 수사단계인 구속영장에 법원단계에서 나오는 사건번호가 기재된 것은 맞지 않습니다.

일상에서 분쟁 당사자간에 소송 전 또는 소송 중에도 합의가 많이 이루어지는데,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을 통해 ‘합의’의 성격과 취소방법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글 | 고봉주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