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날에 어떤 일들이 닥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지만, 그 순간마다 어떻게든 ‘열심히는’ 해보며 걸어 온 끝에 여기까지 온 게 아닐까?
일을 잘 한다는 건 뭘까? 14년째 이 일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어떻게 하는 게 일을 잘 하는 건지 확신이 안 서는 순간이 더 많다. 아니, 하면 할수록 모르겠다. 채널들은 점점 늘어나고 봐야 할 프로그램의 개수도 해마다 늘어만 가는데, 예측하기 힘든 트렌드를 따라가려고 하다 보면 자꾸 중요한 걸 놓치는 기분이고, 그렇다고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슈를 중점적으로 다루려고 하면 어쩐지 시대에 뒤쳐진 유물이 되는 기분이다. 클릭수가 많이 나오는 글을 써야 시장에서 살아남는데, 클릭수만 많이 나오는 글을 쓰는 건 또 영 내키지 않는, 뭘 해도 불안한 그런 마음.
“일잘알을 꿈꾸는 사람들을 위한 드라마”라는 추천을 받고 달렸던 SBS 〈스토브리그〉(2019~2020)는, 과장을 조금 섞어 말하면 과연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포르노와 같았다. 합리성과 과단성으로 어느 팀의 단장이 되든 우승을 일궈내는 우승 청부사 백승수(남궁민)가, 프로야구 만년 꼴지팀 드림즈의 단장으로 부임해 팀 내의 적폐를 도려내고 오래 된 관행과 나태를 걷어내 팀을 우승으로 이끌고 간다는 내용. 백승수는 야구팀의 존재를 영 껄끄러워하던 모기업의 지속적인 방해에도 이를 악물고 에이스를 트레이드 해오고, 선수 연봉을 대폭 깎으라는 무리한 요구에도 각종 데이터들로 선수들의 가치를 평가해 연봉 삭감을 설득해내는 데 성공하고, 병역 문제로 한국을 떠나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던 강속구 투수를 외국인 용병으로 데려왔으며, 팀 내 비리의 온상이었던 스카우트팀을 개혁했고, 급기야 팀을 해체하려는 모기업의 방해를 물리치고 팀 매각까지 해치웠다. 그렇게 바쁘게 스토브리그를 보낸 백승수는, 처음으로 자신이 맡았던 팀이 해체되지 않는 결말을 맞이하며 드림즈를 떠난다.
야구를 즐겨본다는 사람부터 야구를 하나도 모르는 사람, 나처럼 응원하던 팀 프런트가 하는 삽질에 질려 야구를 끊은 지 얼추 10년이 된 사람까지 모두가 〈스토브리그〉를 보며 열광했다. 야구를 모르는 사람은 ‘일을 잘 하는 카리스마 있는 리더’에 반했고, 야구를 즐겨보거나 봤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우리 팀 프런트에 저런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라는 절박함으로 드라마를 봤다. 하지만 작품을 다 보고 난 뒤에도 “과연 어떻게 하는 게 일을 잘 하는 것인가?” 라는 질문에는 확답을 하기가 어려웠다. 따라할 롤모델로 삼기엔 백승수 단장이 너무 앉아서 천리를 보는 전지전능한 리더라는 점도 걸렸지만, 무엇보다 백승수 단장 본인도 뚜렷한 정답을 알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으니까.
분명 구단 직원들에게 공개적으로 자신은 휴머니스트와는 일 안 한다고 말한 백승수지만, 정작 팀을 우승 근처로도 끌고 가 본 적 없는 윤성복(이얼) 감독과 재계약을 맺은 이유를 설명할 때는 “감독의 일은 관중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는 일”이라 말한다. 신인 시절의 강두기(하도권) 선수가 9회말까지 상대팀의 주전 선발과 투구 경쟁을 벌이도록 뒀다가 홈런을 얻어맞도록 내버려 둔 윤성복 감독을 보고, 팀은 졌지만 팬들에게 뜨거운 경기의 추억을 남겨준 감독이라고 평한 것이다. 선수를 트레이드하는 순간만 보면 세이버매트릭스를 기반으로 데이터 야구만을 추구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결국 여럿이 하는 일은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충분한 동기가 부여되어야 한다는 걸 이해하는 사람인 것이다.
거칠게 나누자면 세이버매트릭스 기반의 데이터 야구는 ‘해야 하는 일을 잘 해서 성과를 내는 것’일 테고, 윤성복 감독과 재계약을 맺은 건 ‘당장의 성과가 안 좋더라도 애정을 쏟을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일 테다. 그 둘을 적재적소에 구분해 번갈아 가며 적당히 잘 해야 한다는 말은 입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문제는 어느 순간이 과감하게 ‘해야 하는 일’을 할 순간이고, 어느 순간이 ‘애정을 쏟을 수 있는 일’을 해야 할 순간인지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냐는 것이리라. 아니, 사실 더 큰 문제는 그런 일을 찾는 것이겠지. 지금 시급하고 과감하게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막막하고, 애정을 쏟을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겠는 사람들이 더 많을 테니까.
“글쎄요, 해 봐야 알겠지만 뭐, 열심히는 할 겁니다. 다들 그렇지 않습니까?” 백승수 단장의 마지막 대사를 들어보면, 백승수 단장이라고 뚜렷한 답을 알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 또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자신을 받아주는 팀이라면 닥치는 대로 들어가서 일을 했고, 그때마다 각 종목의 특징과 팀의 장단점을 배우기 위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던 사람이니까. 무엇이 제 앞길에 놓여 있는지를 매번 새로 배워야 했던 사람에게, 딱 정해져 있는 성공의 공식 같은 게 있을 리가 없다. 결국 매 순간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는 그 일이 닥쳤을 때 ‘해 봐야 알’ 일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일단 ‘열심히는’ 해보는 것뿐인지도 모른다.
2021년이 시작된 지도 슬슬 2주가 지났지만,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2020년에 갇힌 것만 같다고 말한다. 언제쯤 마스크를 벗을 수 있을지, 언제쯤 예전처럼 사람을 만나고 가게를 열고 모임을 도모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어서, 올 한 해를 어떻게 꾸리면 좋을지 모든 게 미지수인 것이다.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이고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를 논하기 전에, 일단 뭘 할 수 있는지도 감이 잡히지 않는 아득한 연초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모든 연초가 그랬던 건지 모른다. 앞날에 어떤 일들이 닥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지만, 그 순간마다 어떻게든 ‘열심히는’ 해보며 걸어 온 끝에 여기까지 온 게 아닐까? 두렵고 불안하지만, 이제 이 다음 문을 열 차례다. 백단장이 그랬던 것처럼.
이승한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