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원회가 차별금지법 도입을 권고한 것은 15년 전인 2006년의 일이다. 헌법 제11조 “모든 국민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는 약속이 존재하지만, 유무형의 차별이 발생했을 때 그를 처벌하거나 지도할 만한 구체적인 법안이 추가로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한국은 여전히 여성의 사회적 활동에 제약이 심각하고, 호남 인구에 대한 지역차별이 선명하게 남아있으며, 학력과 재산 정도에 따른 차별대우가 노골적인 나라였으니까. 더구나 그 무렵 한국사회는 슬슬 그 구성원이 더 이상 한국 ‘국민’으로만 제한되는 나라가 아니었다. 화이트칼라부터 블루칼라까지, 한국에 들어와서 생활하는 다양한 외국 국적자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나라로 변모하는 중이었다. 모든 ‘국민’의 평등을 보장하는 헌법 조문만으로는 부족한 부분이 분명했다.

15년이 지나도록 아직 차별금지법이 없는 것은, 성소수자들에 대한 차별을 금지한다는 조항을 법조문에서 빼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의 집요한 로비와 방해 때문이었다. 이성애만이 올바른 사랑이고 빛이고 진리고 생명인데, 차별금지법이 도입되면 자신들이 성소수자들을 비난할 권리가 사라지니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 반대의 골자였다. 한때는 ‘국가를 망하게 만드는 사교집단’으로 찍혀서 믿는 것만으로도 탄압당한 역사를 간직한 종교를 믿는다는 이들이, 자신들이 부당하게 탄압당했던 시절은 까맣게 잊고 ‘성소수자들의 권리를 보장해주면 나라가 망한다’는 이야기를 서슴없이 하고 다녔다. 그들의 표심에 눈치를 보던 정치인들은 성적 지향과 성 정체성을 제외한 ‘제한적 차별금지법’ 같은 이야기를 했는데, 차별금지법의 필요를 이야기하는 사람들 입장에선 그건 본질을 피해가는 비겁한 일이었다. 차별금지법은 15년간 7차례 입법 시도가 되었고, 7차례 실패했다.

최근 국회에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즉시 제정하라는 국민동의청원이 10만 명을 넘겼다. 국회가 운영하는 ‘국민동의청원’은 특정 법안의 입법을 요구하는 서명자가 10만 명을 넘길 시에는 해당 법안을 심사해야 한다. 동의청원이 막판 스퍼트로 10만 명을 넘긴 순간, 나는 JTBC 드라마 <선암여고 탐정단>(2014~2015)을 떠올렸다. <선암여고 탐정단> 11화에서, 수연(김소혜)은 정체불명의 학내 단체 ‘국화단’으로부터 음란영상을 찍었다고 지목당한다. 수연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보낸 영상 메시지에서 옷깃을 잡고 있는 장면만 악의적으로 편집한 사진이라며 억울함을 호소하지만, 누명을 벗기 위해 영상 메시지의 원본을 제출하거나 누구에게 보낸 영상 메시지였는지 밝히는 일은 완강히 거부한다. 영어교사 신장미(김혜나)에게 수연의 결백을 입증할 만한 증거를 조사해달라는 청탁을 받은 선암여고 탐정단은 수연을 조사하다가, 수연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상대가 같은 학교 학생 은빈(강성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남들에게 아웃팅 당할까 두려워서 그만 만나자고 말하는 은빈에게, 수연이 울면서 입을 맞추는 장면을 보게 된 것이다.

굳이 ‘모방 위험’이나 ‘유해 정보’를 따지자면, 타인의 스마트폰에서 사적인 메시지를 뒤져서 공개하고 누명을 씌우는 국화단의 행태가 유해할 것이다. 누가 봐도 명백한 범죄니까. 그런데 그 시절의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문제를 삼은 건 다른 것도 아니고 수연과 은빈의 키스 장면이었다. 여고생 둘이서 입을 맞추고 포옹을 하는 장면이 “키스신을 많이 보”는 자신들이 보기에도 “여고생들이 키스하면서 더듬는 장면을 봤을 때 이성 간 키스와 다른 자극을 받고 다른 상상을 하게 된다”(하남신 위원)면서 “올바른 가치관이 아닌”(함귀용 위원) “동성 간의 교제를 어떤 측면에서는 조장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조영기 위원)는 것이 이유였다. 의견진술을 하러 방통위에 불려온 여운혁 CP는 제작진의 의도가 “동성애를 옹호하거나 반대하려던 게 아니라, 사회가 변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의도였다. 하고자 했던 얘기는 남과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공격하는 요즘 학생들의 성향에 대한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심의위원들은 “왜 동성애 소재를 밀어붙였냐”고 캐물으며 “의견진술 하러 온 분의 생각이나 정체성을 확실히 알고 싶다.”(김성묵 부위원장)는 질문까지 던졌다. ‘네가 성소수자니까 이런 장면 넣은 거 아니냐’는 이야기일 것이다.

결국 <선암여고 탐정단>은 경고 조치를 받았다. 다른 방심위원들이 동성애라고 특별히 더 부도덕한 건 아니고 표현 수위만 문제 삼아 ‘권고’나 ‘주의’ 정도로 처리하자고 이야기를 해도, 당시 정부와 여당이 추천해서 방심위원이 된 이들은 부득불 경고 조치를 고집했다. 특히나 “혐오감을 느꼈다.”, “부도덕하다고 본다.”, “다수와 다른 정신적 장애를 앓고 있다 생각한다.”, “나는 동성연애에 적극 반대하는 입장이다.” 같은 말을 쉬지 않고 쏟아낸 함귀용 위원은 압도적이었다.

<선암여고 탐정단> 12화, 끝내 자신의 정체성을 아웃팅 당한 수연은 학교를 떠난다. 함귀용 위원, 하남신 위원, 조영기 위원, 고대석 위원, 김성묵 부위원장 같은 이들이 그 학교에도 많았겠지. 넌 나와 다르니 같이 살아갈 수 없다며 손가락질하고, 부도덕하다고, 혐오스럽다고, 정신병을 앓고 있다고, 난 너의 존재에 반대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선암여교에도 분명 있었겠지. 12화의 마지막,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수연과 은빈은, 서로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먼발치에서 서로를 바라만 본다. 때는 2015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차별금지법 제정을 권고한 지 9년이 지난 해였다. 그때 차별금지법이 있었다면, 우스꽝스러운 경고 조치도 없었을 것이고 수연도 학교를 떠날 이유가 없었을 텐데. 다가가서 은빈의 손을 잡아줄 수 있었을 텐데. 그저,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이승한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