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땅콩 있어요!’ 이렇게 소리치던 극장, ‘쇼도 보고 영화도 보고’ 했던 극장, ‘암표 있어요.’ 하며 호객하던 극장, 지금은 무대 뒤로 쓸쓸히 사라진 극장에 대한 추억들입니다.
우리나라에 극장 문화가 들어 온 것은 19세기 말 개항되면서부터입니다. 인천이나 부산과 같은 개항에 하나둘 공연용 극장들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그곳을 중심으로 흥행 산업이 형성됩니다. 활동사진 즉 영화는 1903년 동대문 안에 위치한 한성전기회사 기계 창고에서 상영했었다는 것이 기록상 최초입니다. 전기회사 창고에서 상영이 이루어진 이유는 영사기 가동을 위해서는 전기가 필요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1907년으로 들어서면서 종로2가 탑골공원을 중심으로 모양새를 갖춘 활동사진 전용 극장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단성사, 연흥사, 장안사 같은 극장들이 생기면서 본격적인 영화 흥행업이 시작됩니다. 이렇게 시작된 흥행업은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 뒤 새로 들어 온 모든 극장은 일본인들에게만 주어지는 특혜가 되었고 한편에서는 조선 민중들에게 자신의 문화를 전파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합니다. 그러다 1912년 종로에 조선인 전용 활동사진 상설관이 등장하는데 그 극장이 바로 우미관입니다. 이렇게 일본인 전용, 조선인 전용으로 나누어진 이유는 변사가 일본어로 하느냐 한국어로 하느냐에 달려있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우미관의 등장으로 조선인 독자적으로 영화흥행업에 진출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됩니다. (출처: ⟪한국 근대 영화사⟫(이효인, 정종화, 한상언/돌베개/2019년)를 정리한 내용입니다.)
1942년 전국 영화관 수는 74개에 이릅니다.(출처 :조선총독부, 통계연보에서 발췌)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합니다. 수도는 함락되고, 극장도 폭격을 당하지요. 흥행 산업이 졸지에 전멸하고 맙니다. 부산이 피란수도의 역할을 하던 시절, 부산으로 피란을 온 영화인들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전쟁 통에 가족을 잃은, 고향을 잃은, 희망을 잃은 사람들의 텅 빈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카메라를 잡습니다. 그렇게 포성 속에서 8편이 제작되었고 이 영화들이 전쟁 중에 부산에서 개봉됩니다. 1951년 손전 감독의 <내가 넘은 삼팔선> 같은 경우 부산 부민관에서 상영되어 흥행에 대성공합니다.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됩니다. (출처: ⟪한국영화총서⟫(한국영화진흥조합/1972년)를 정리한 내용입니다.)
종전이 되면서 영화인들이 다시 서울로 복귀하고, 전후의 비참함을 영화를 통해 잊고자 하는 국민들로 인해 극장은 인산인해가 됩니다. 그렇게 영화가 우리 삶의 일부분이 되기 시작하면서 지역을 대표하는 극장들이 이때 지어지거나 기존 극장을 인수하면서 속속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서울 대한극장, 대구 한일극장, 부산 부산극장, 광주 광주극장, 대전 중앙극장 등등, 당시 지역 극장은 지역의 랜드마크로서 약속장소이자 만남의 광장이 됩니다. 이렇게 영화가 활기를 되찾기 시작하면서 1959년에는 한국영화제작편수가 111편까지 늘어납니다.
70년대로 들어서면 TV의 보급과 고속도로 개통 등으로 관광 및 레저 활동들이 활발해지기 시작합니다. 이 여파로 흥행시장은 타격을 받습니다. 극장들은 극복 차원에서 가수들의 리사이틀 장소로 활용하는데 일명 ‘쇼도 보고 영화도 보고’를 도입하게 됩니다. 이후 한국영화 흥행시장이 에로 영화들로 난무하자 극장들이 택한 새로운 전략은 동시상영이었습니다. 동시상영은 전국적으로 광범위하게 이루어집니다.
1980년 국민들의 밤을 통제했던 ‘12시 통금’이 해제되면서 소극장들이 건물의 지하 할 것 동네마다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붐이 일기 시작합니다. 당시 소극장 최고의 흥행영화는 <영구와 땡칠이>였다고 합니다. 이어 1985년에 이루어진‘ 5차 개정 영화법’은 그동안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통제해왔던 영화의 모든 비즈니스를 자유롭게 놓아주는 계기가 되면서 1994년 이루어진 ‘한미영화협상’ 테이블에서 그동안 국가에서 통제한 프린트(영화 상영용) 벌수 제한을 풀어주기에 이릅니다. 넘쳐나는 프린트를 소화하기 위해 단관극장들이 스크린을 늘려 복합상영관으로 탈바꿈하고 이본관·삼본관이라고 불리는 재개봉 극장들이 개봉관으로 진출하면서 개봉관이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영화도 늘고 극장도 늘다 보니 데이트 관객이 증가하였고 이것은 전체 관객 수 증가로 이어지게 됩니다.
1998년 CGV가 서울 도심에서 벗어난 쇼핑센터 내에 강변 CGV11을 개관하면서 비로소 현대적 의미의 멀티플렉스가 국내에 첫 도입됩니다. 2년 후 메가박스가 코엑스에 17개관을 개관하면서 멀티플렉스 전성시대가 도래합니다. 2014년 롯데시네마 월드타워가 21개 상영관을 열어 국내 최다 상영관 수를 경신하기도 하죠. 하지만 그 많던 (개인)극장들이 하나둘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역효과가 일어납니다. 시장의 확대, 가격 자율화, 각종 카드를 통한 할인제도, 매표 전산망, 관객 위주의 편의성 제공 등 멀티플렉스가 시장 확대에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사업을 강화하려 프랜차이즈로 엮어 새로운 사업자들의 시장 진입을 막다보니 멀티플렉스의 기류를 타려 했던 기존 극장들이 시장 진입도 채 하지도 못하고 문을 닫고 맙니다. 아무리 시장의 생리가 적자생존이라고는 하지만 공존공생이 불가능한 살벌한 시장으로 변하면서 우리의 추억마저 한갓 생존논리에 희생되고 맙니다.
1978년 문을 연 서울극장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고 합니다. 90년대 말과 2000년 초 한창 한국영화가 성장기로에 있을 그 무렵 배급 실무에서 일했던 본인에게 있어 서울극장은 좀 남다릅니다. 거기서 영화 시사회를 진행했고, 개봉 날이면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관객이 줄 서주길 간절히 바랐고, 개봉 1회 관객들에게 사은품을 주며 기뻐했고, 1000석 가까이 되는 좌석이 매진된 상태에서 진행된 배우들의 무대인사는 그야말로 장관이었고, 매표소 앞 줄선 길이로 흥행을 예측했고, 흥행이 여의치 않은 날은 안타까워하는 영화사 사장과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마지막 회까지 마음 조아리며 광장을 배회하였고, 고인이 되신 서울극장 곽정환 회장님으로 부터 남몰래 흥행 노하우도 전수받기도 했는데, 막상 서울극장이 문을 닫는다고 하니 그때가 주마등처럼 스쳐 갑니다.
‘행복했었구나!’ 뒤돌아보니 그때가 재미있었고 행복했었네요.
그동안 많이 감사했습니다. 서울극장, 안녕히 잘 가셔요! 많이 그리울 것 같습니다.
글 | 이하영
하하필름스 대표, 《영화 배급과 흥행》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