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때문에 만리동 고개를 자주 오가던 시절, 나는 효창공원을 자주 지나곤 했다. 삼의사가 잠들어 있고 백범김구기념관이 지척에 있는 공원이지만, 그 공원에서 독립투사들의 숭고한 혼이나 애국심을 느낀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다.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는 어린이들, 손을 잡고 산책을 하는 연인들, 목줄을 채운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동네 주민들의 걸음걸이에 그런 복잡하고 웅장한 생각이 깃들어 있을 리 없다. 독립된 조국에서 후세가 평안한 삶을 살기를 원했을 독립투사들의 바람대로, 효창공원의 밤을 채우는 건 유별난 것 없는 평범한 일상이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난 이봉창을 생각한다. 생계를 위해 소학교를 마치자마자 직업전선에 뛰어든 이봉창은, 철도청 만선철도(滿鮮鐵道) 기차운전 견습생으로 취직했다가 그곳에서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의 차별을 실감한다. 자신보다 늦게 들어와 자신이 일을 가르쳐야 했던 일본인 연결수들은 전철수로 승진해 자신보다 상관이 되었는데, 자신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승진을 못 하는 이유가 대체 뭘까 곱씹어보면, 그들은 일본인이고 자신은 조선인이라는 것 말고는 결론이 없었다.
그 분개가 독립을 향한 마음으로 이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 이봉창은 같은 시기 일어난 3·1운동에도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비폭력 평화시위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무엇을 계기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었는지에 대해선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자신이 조선인이라 차별을 당한다는 사실에 분개할지언정, 사회운동을 통해 독립을 추구한다거나 조선인이 받는 처우를 개선해야겠다는 쪽으로는 생각이 연결되지 않았다. 대신 이봉창은 자포자기의 마음으로 술과 도박에 빠져 400~500원의 빚을 진다. 단성사 특등석 입장료가 1원 50전, 전차 1구간 요금이 5전 하던 시절이다.
일본인이 아니라면 인정받지 못하는 세상, 이봉창은 일본인이 되고 싶었다. 일본인 지인이 조선인 식모를 구해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에 이봉창은 자신의 조카딸을 식모로 주선해주고, 지인에게 받은 여비를 쪼개 조카와 함께 오사카로 건너갔다. 그는 현지에서 일본인의 양자가 되었고, 조선식 이름은 부르기 어렵다는 주변인들의 권유에 ‘기노시타 쇼조’라는 일본식 이름을 썼다. 신문조서에서 이봉창은 이렇게 말했다. “내지인에 비해 우리 조선인은 문화 정도가 낮으므로 차별대우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빨리 일본 내지인의 습관을 배워 무엇이든 내지인과 똑같이 되어 내지인과 똑같은 대우를 받아야 하겠다고 생각해 수양도 하고 연구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서 빨리 ‘내지’의 문화를 습득해 어엿한 일본인이 되고 싶었던 ‘기노시타 쇼조’의 마음은 1928년 히로히토 일왕의 즉위식을 보러갔다가 유치장에 갇히며 무참히 꺾인다. “일국의 국민으로서 그 나라의 역사도 모르고 그 나라 제왕의 성안(聖顔)도 본 적이 없는 것은 참으로 스스로 부끄러운 일”이라고 여겨 일도 하루 쉬어 가며 오사카에서 교토까지 왔는데, 소지품 중 한글로 쓰여진 편지가 있었다는 이유 하나로 11일간 유치되었던 것이다. 아, 안 되는 거구나. 아무리 일본의 문화를 습득하고 일본인처럼 말하고 행동해도, 조선 민족이라면 끝까지 사람처럼 대우받지 못하는 거구나. 그 유치장 안에서, 기노시타 쇼조는 다시 이봉창이 되었다.
이봉창의 행보는 그 뒤에도 예사롭지 않다. 그는 술 마시며 사람들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했고, 흥이 나면 일본 가요를 잘 부르곤 했는데, 그 때문에 상해임시정부 사람들로부터 자주 핀잔을 들었다. 사쿠라다몬 의거를 앞둔 20여 일 동안, 이봉창은 대부분의 시간을 유흥으로 보냈다. 낮이면 커피를 마시고 영화를 보고 골프를 쳤고, 밤이면 술을 마시거나 마작을 하고 유곽을 드나들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제 신분을 위장하기 위한 의도적 행보’라고도 하고, ‘거사를 앞두고 지상에서 누리는 마지막 쾌락’이라고도 하지만, 20일 동안 오늘날의 가치로 1000만 원에 가까운 돈을 쓴 씀씀이는 확실히 놀라운 구석이 있다.
한 인생 멋지게 살아보고 싶었던 혈기방장한 청년, 신문명의 파도 앞에서 기꺼이 소비주의의 쾌락을 즐겼던 모던보이, 어서 빨리 ‘내지’로부터 문명의 세례를 받아 ‘신일본인’이 되길 바랐던 반도인. 그러니까 만약 한국이 그 주권을 잃지 않았더라면, 하다못해 일본의 식민지배가 인종주의적 차별과 구조적인 멸시로 점철되어 있는 게 아니었다면, 이봉창은 그저 폼 나게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평범한 청년의 손에 폭탄을 쥐여준 건, 신일본인 기노시타 쇼조를 독립투사 이봉창으로 거듭나게 만든 건, 그 평범한 일상을 불가능하게 만든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배의 억압과 차별이었다.
2009년, SBS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90주년 기념 단막극으로 만든 다큐드라마 <그 남자의 나라>는 그런 이봉창의 삶을 비교적 충실히 그려냈다. 완전무결의 민족적 영웅이 아니라, 어딘가 빈틈도 많고 그다지 탐탁지 않은 구석도 있었던 평범한 사내. 히로히토 즉위식을 보기 위해 설레는 표정으로 교토 시내를 뛰어다니던 이봉창, 술이 기분 좋게 취하면 일본 노래를 부르다가 임정 요원들과 싸움이 붙곤 하던 이봉창…. 배우 조희봉의 육신을 빌어 표현된 이봉창은, 건달인가 싶으면 독립투사 같고, 독립투사 같은가 싶으면 다시 일 없는 백수 같은 인상의 남자였다. 어떻게 이런 청년조차 목숨을 바쳐 폭탄을 던질 생각을 하게 된 걸까, 궁금해지게 만드는.
효창공원에 서서 지나는 사람들의 평범한 얼굴을 바라보다 보면, 난 이봉창이 오늘날의 우리를 어떻게 보고 있을지 상상하곤 한다. 독립 이후에도 한국전쟁과 극심한 가난, 군부독재 등의 지난한 역사를 거쳐온 뒤에야 간신히 평온 비슷한 것을 누리게 된 오늘날의 우리. 그래서 효창공원을 거닐면서도 거창한 역사의식이나 민족의 혼 같은 걸 굳이 느낄 이유를 못 찾는 평범한 일상의 우리. 아마, 이봉창이라면 흐뭇하게 볼 것이다. 내가 누리고 싶었던 인생이 바로 그런 거였다고, 바로 그런 삶을 위해 나는 폭탄을 던졌던 것이라고 중얼거리며.
이승한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