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는 4년 전에 끝났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함께 왈츠를 추던 연인이 서로에게 손가락질을 한 끝에 제각기 혼자 되는 비극이 어디에선가 반복해서 벌어지고 있을 것만 같다.
모든 고난과 시련을 함께 헤쳐온 파트너가 있는데, 내가 살아서 다음 단계로 올라가려면 상대의 손을 놓아야 한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상대의 손을 있는 힘껏 뿌리쳐 상대가 떨어지기를 바라야 한다. <오징어 게임> 이야기가 아니다. 2017년 KBS에서 방영된 <드라마스페셜>의 한 에피소드, <혼자 추는 왈츠> 이야기다. <오징어 게임>과 다른 게 있다면, <혼자 추는 왈츠>는 어느 무인도에서 펼쳐지는 가상의 데스게임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취업준비생들의 취업전선이 배경이라는 것 정도가 되겠다.
한 명문대학교의 본캠퍼스 학생 민선(문가영)과 지방캠퍼스 학생 건희(여회현)는 만난 지 3000일을 넘긴 커플이다. 처음 마주치던 순간부터 “지방캠 주제에”라는 언사로 시작된 사이가 매번 매끄러웠던 건 아니지만, 두 사람이 한 조가 되어야 시험을 볼 수 있는 교양과목 ‘왈츠’ 시험을 위해 호흡을 맞춘 것을 계기로 지금까지 긴 시간을 함께 손을 맞잡고 걸어왔다. 그러나 굳게 닫힌 취업문을 두드리며 끊임없이 졸업을 유예하고 휴학 기간을 늘리는 동안, 8년을 넘게 만난 커플은 불안에 영혼이 잠식된다.
계약직들의 정규직 전환 확대를 위해 대신 인턴사원 정규직 채용 규모를 줄인다는 소식에, 민선을 포함한 명문대 출신 인턴사원들은 지방대 출신 계약직 선배들을 비난하기 시작한다. 스펙으로만 따지면 우리가 더 우위인데 계약직으로 들어왔으면서 왜 우리 몫을 빼앗아가는가? 나는 정말 죽을 힘을 다해서 명문대에 들어갔는데, 여기 들어가기 위해 고향에 있는 부모님이 내 뒷바라지를 얼마나 해줬는데, 왜 그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지방대 출신 계약직 선배들이 새치기를 하는가? 당장 자신의 발밑이 불안해지자, 마음속 깊이 숨겨두었던 우월감이 억울함이 되어 튀어나온 것이다.
절박해진 민선은 정규직 채용 면접 자리에서 임신과 출산을 이유로 여성 구직자를 꺼리는 면접관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자신은 결혼도 안 할 거고 혹시 애가 생겨도 지울 것이라고 말하지만, 면접관은 비릿하게 웃으며 ‘인성이 중요하다’는 말과 함께 민선을 떨어뜨린다. 대체 어쩌자는 건가? 결혼도 하고 애도 낳을 거라고 하면 이래서 여자 직원은 못 쓴다고 떨어뜨릴 거면서?
중소기업 영업사원으로 입사한 건희라고 상황이 다르진 않다. 원청업체로 출장을 갔던 날, ‘하청업체 직원들에게서 땀냄새가 난다’는 원청업체 직원들의 쑥덕거림에 건희는 모멸감을 느낀다. 이 회사에 있으면 내내 이런 취급을 받으며 다른 미래 같은 건 꿈꾸지 못할 것 같은데, 심지어 이 회사 안에서 건희가 받는 취급은 더 안 좋다. 자신이 다니는 지방캠퍼스가 정부지정 부실대학으로 선정되었다는 뉴스를 들은 선임은, 건희에게 “너 회사 옮기려면 빨리 옮겨야겠다. 너네 학교 평판 더 안 좋아지기 전에”라 말하며 이죽거린다.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헤아려줄 여유가 없는 상황, 원룸을 빼서 고시원으로 들어간 민선은 고향에 계신 부모님의 적당히 하고 내려오라는 채근에 “내년에도 떨어지면 콱 죽어버릴 거니 걱정 말라”고 소리치는데, 홧김에 한 말이지만 정말 그만큼 절박하다. 아버지가 운영하던 가게가 망한 탓에 지출은 줄이고 집안 생계에는 보탬이 되어야 하는 건희 또한 번듯한 대기업에 들어가는 일이 절박하다. 마음이 가난해 여유가 없어지면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할퀴는 법이다. 만난 지 3000일이 되던 날, 취업전선에서 경험하는 굴욕과 불안을 참지 못했던 민선과 건희는 그만 서로에게 모진 말을 남기고는 헤어진다. 그리고 아주 질 나쁜 농담처럼, 헤어진 연인은 한 대기업 신입사원 공채 면접장에서 만난다.
단 두 명을 뽑는 부서에 응시한 두 사람은, 이번에도 불합격을 예견하고는 코너에 몰려서 서로에게 미안했던 감정들을 토해낸다. 미안하다고, 상황이 나아지면 다시 좋아질 수 있을 줄 알았다고. 내가 내 자격지심이 너무 끔찍해서 도망간 거라고, 나도 누군가를 진심으로 동정해 본 적이 없는데 너의 상황을 생각하면 가슴이 너무 아프다고,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뭐냐고. 그리고 그때, 두 사람 모두에게 합격 통지가 날아온다. 이 얼마나 다행인가. 고난을 겪으며 멀어지기도 했지만 끝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연인은, 둘 다 사이좋게 같은 회사에 합격하며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라고 해피엔딩을 꿈꾸며 출근 일자를 기다리던 민선과 건희에게, 또다시 질 나쁜 농담 같은 연락이 도착한다.
이 부서의 최종 채용 인원은 두 명이 아니라 한 명이라고.
두 분 다 내일 최종 면접을 보러 회사를 방문하시라고.
그렇게 지금껏 모든 난관을 함께 헤쳐왔던 민선과 건희는 이제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선 상대를 제쳐야 하는 적이 된다. 두 사람은 다시, 살아남아야 한다는 본능에 서로에게 양보를 요구한다. 남자 나이 스물여덟은 많은 게 아니니 아직 기회가 있을 거라고. 아니, 내가 취업해서 널 책임지겠다고. 그러다가 너랑 헤어지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되는 거냐고. 간신히 번복된 커플의 이별은, 다시 시작된 의자뺏기 놀이 속에서 한 번 더 치러진다. 더 초라하고 더 졸렬하게. 모두에게 아프게.
기업의 인재 채용은 나름의 합리성에 기반하고 있을 것이다. 올해에는 어느 규모로 채용을 하는 게 최선인지, 그렇다면 최고의 인재를 찾는 기준은 무엇인지, 수많은 인사 담당관들이 고민 끝에 세워 둔 합리적인 채용 매뉴얼이 존재할 것이다. 그 어떤 누구도 대단한 악의나 가학적인 의도를 가지고 취업준비생들을 괴롭히진 않을 테다. 그럼에도 이와 같은 결과가 나오는 건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까? 왜 수많은 젊은이들이 제 존재의 불안 때문에 서로를 향해 너는 나보다 상황이 낫지 않냐고, 너는 나보다 노력을 덜 하지 않았냐고, 너는 나보다 학벌이 안 좋지 않냐고 손가락질을 하며 상대를 할퀴고 제 영혼도 갉아먹는 상황에 몰리게 된 걸까? 드라마는 4년 전에 끝났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함께 왈츠를 추던 연인이 서로에게 손가락질을 한 끝에 제각기 혼자 되는 비극이 어디에선가 반복해서 벌어지고 있을 것만 같다. 뚜렷하게 탓할 VIP도 게임 호스트도 프론트맨도 없는 이 세계에서.
이승한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