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 가장 빼어난 일본 감독으로 손꼽히는 일본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가 2015년 발표한 317분의 초장편 <해피 아워>가 지난 12월 9일 한국에서 개봉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각색한 최신작 <드라이브 마이 카>를 공동수입한 영화사조아/트리플픽쳐스가 <해피 아워> 개봉까지 성사시킨 것. <해피 아워>와 더불어 21세기 들어 한국 극장가에 '개봉'한 긴 영화들을 소개한다.

** 2000년대 이전 개봉했던 버전과 러닝타임이 같은 '재개봉작'은 제외했다.


인랜드 엠파이어

Inland Empire, 2006

2007년 7월 26일 개봉

2시간 59분

1977년 데뷔작 <이레이저헤드> 이래 내놓는 작품마다 관객에게 상당한 쇼크를 선사했던 데이비드 린치. (이례적인 작품 <스트레이트 스토리>은 평범하고 착해서 쇼킹했다) 처음 공개된 지 15년이 흘렀지만 오늘날까지 그의 마지막 영화로 남아 있는 <인랜드 엠파이어>의 러닝타임은 179분이다. 완성된 시나리오 없이 금발의 할리우드 스타 니키(로라 던)의 불안을 펼쳐 보이는 <인랜드 엠파이어>는 단연 가장 난해하다. 불가해한 서사뿐만 아니라, 필름이 아닌 디지털, 그것도 화질이 썩 좋지 않은 카메라로 직접 촬영한 작품이라 가만히 화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고충이 대단해 체감 시간이 훨씬 길게 느껴질 것이다.


내부자들: 디 오리지널

2015년 12월 31일 개봉

3시간

윤태호의 만화 <내부자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내부자들>은 2015년 11월 19일 개봉해 4주 동안 박스오피스 1위를 지키며 600만 관객을 돌파했다. 흥행에 힘입어 <내부자들>은 그해 12월 31일, 본래 130분 러닝타임에서 50분을 덧붙인 감독판 <내부자들: 디 오리지널>로 추가 개봉했다. 주인공 안상구(이병헌)의 분량이 대폭 늘어나고 일반판에선 삭제됐던 김의성, 유재명, 황병국 등의 캐릭터들이 되살아나는 등 차이가 뚜렷했다. <내부자들: 디 오리지널>은 <내부자들>을 박스오피스 선두에서 끌어내린 <히말라야>를 바짝 추격해 차트 2, 3위를 오가며 (개봉 8일째 하루 1위를 차지했다) 200만 관객을 추가해 도합 900만 관객을 동원했다.


어벤져스: 엔드게임

Avengers: Endgame, 2019

2019년 4월 24일 개봉

3시간 1분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주연의 <아이언맨>(2007)으로 닻을 올린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이하 MCU)는 2020년대가 도래하기 전 지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영화 프랜차이즈였다. <어벤져스> 시리즈의 4편이자 MCU 통산 22번째 작품 <어벤져스: 엔드게임>(이하 <엔드게임>)은 한 시대를 마무리하며 MCU의 온갖 히어로들이 총출동해 인피니티 스톤을 모두 모아 우주 생명체 절반을 없애버린 타노스에 맞서는 여정을 담은, 2019년 영화계 최고의 이벤트였다. 여기저기 뿔뿔이 흩어진 히어로들이 모이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과거를 복원해, 타노스와 그의 대군에 맞서 싸우는 과정을 (전편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보다 32분 긴) 181분에 꾹꾹 눌러 담았다.


킹덤 오브 헤븐: 디렉터스 컷

Kingdom of Heaven, 2005

2020년 11월 11일 개봉

3시간 10분

리들리 스콧 감독의 전쟁 영화 <킹덤 오브 헤븐>(2005)은 감독판이 훨씬 좋은 대표적인 사례로 손꼽힌다. 감독의 의도보다 50여 분이나 잘려나간 일반판은 뚜렷한 주제 의식과 거대한 스케일에도 불구하고 엉성한 개연성과 밍숭맹숭한 결말로 인해 비판을 면치 못했는데, 북미 개봉 7개월 후 LA의 한 극장에서 처음 공개된 감독판은 실상 아예 다른 영화라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빼어난 만듦새를 자랑한다. 그동안 DVD나 블루레이로만 볼 수 있었던 <킹덤 오브 헤븐> 감독판은 작년 11월 11일 한국에서 정식 개봉했다.


윈터 슬립

Kis Uykusu, 2014

2015년 5월 7일 개봉

3시간 16분

2014년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심사위원장 제인 캠피온과 전도연, 지아 장커, 니콜라스 윈딩 레픈, 소피아 코폴라 등 심사위원들은 터키 감독 누리 빌제 세일란의 <윈터 슬립>에 황금종려상을 바쳤다. 체호프의 단편 <아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서브플롯을 느슨하게 원작으로 삼은 <윈터 슬립>은 광대한 풍광과 현학적인 논쟁이 담긴 200시간의 촬영분을 4시간 30분으로 처음 편집하고, 결국 3시간 16분의 최종본으로서 완성했다. 칸 영화제에서 수상하고 1년이 지난 2015년 5월에 한국에 개봉했지만 8200명 가량의 관객만이 <윈터 슬립>을 찾았다.


지옥의 묵시록: 리덕스

Apocalypse Now Redux, 2001

2001년 8월 30일 개봉

3시간 19분

다음 소개할 작품 역시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다. <대부> 시리즈의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이 3년간의 프로덕션을 거쳐 완성한 야심작 <지옥의 묵시록>이다. 늘 개봉판에 만족하지 못했던 코폴라는 첫 공개 이후 22년이 흐른 2001년, 편집감독 월터 머치와 함께 매만져 49분을 확장한 '리덕스'판을 내놓았다. 프랑스인 농장 시퀀스를 한껏 길게 보여주고, 커츠 대령(말론 브란도)의 분량도 늘어났다. 2019년 개봉 40주년을 맞아 '리덕스'보다 오히려 20분 가량 덜어낸 '파이널 컷' 버전도 공개됐다.


아이리시맨

The Irishman, 2019

2019년 11월 20일 개봉

3시간 29분

문제적 인물의 흥망성쇠를 그린 영화들을 꾸준히 만들어온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필모그래피엔 러닝타임 2시간 30분이 넘는 작품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사업가 조던 벨포트의 이야기를 3시간에 걸쳐 담아낸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2013)로 건재한 연출력을 자랑한 스코세이지는 넷플릭스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웬만한 마블 영화 제작비를 웃도는 자본을 들여 완성한 <아이리시맨>으로 갱스터 영화는 스코세이지가 세상에서 가장 능숙하게 만든다는 믿음을 공고히 했다. 아일랜드 출신의 마피아 조직원에서 미국 정치계를 뒤흔드는 유력 인사로 군림하게 되는 실존인물 프랭크 시런의 50년(70대 중반의 로버트 드니로가 분장과 CG의 힘을 빌려 혼자 연기했다)에 걸친 시간들을 209분 동안 보여준다.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

大象席地而坐, 2018

2019년 11월 21일 개봉

3시간 54분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는 소설가 출신의 중국 감독 후보의 유일한 장편 영화다. 친구 아내와 불륜을 저질렀다가 그 친구의 자살을 목격하고, 학교 폭력을 말리다가 가해자를 밀어 중태에 빠트리고, 가족에게 버려져 양로원에 가고, 원조 교제 사실이 학교 전체에 알려진 4명의 인물들이 코끼리를 보러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도시 만저우리로 떠나는 이야기가 234분에 걸쳐 담겼다. 후보 감독은 이토록 긴 러닝타임을 고집하기 위해 프로듀서와 대립하던 중 스스로 목숨을 놓았다. 2018년 베를린국제영화제 포럼 부문에서 세상에 선보여, 그해 전주국제영화제를 통해 처음 한국에서 상영됐고, 전주국제영화제가 수입해 2019년 11월 정식개봉 했다.


천당의 밤과 안개

2018년 11월 29일 개봉

3시간 55분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2009년 198분 러닝타임의 극영화 <카페 느와르>를 통해 감독 신고식을 치렀다. 이 기획에 충분히 소개될 법한 길이. 하지만 그는 그로부터 8년 후 그보다 더 긴 분량의 다큐멘터리 <천당의 밤과 안개>를 발표했다. 정성일이 평론가로서 <철서구>(2003) 이후 꾸준히 주목해온 중국의 다큐멘터리 감독 왕빙이 윈난성의 정신병원에서 <광기가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2013)를 촬영하고, 또 다른 작품 <세 자매>(2012)의 관계자를 만나기 위해 중국 전역을 오가는 과정을 기록했다. 처음부터 <광기가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의 러닝타임에 맞춰보겠다는 원칙을 뒀고, 228분으로 완성된 것을 보고 그와 비슷한 235분에 편집을 마쳤다.


고령가 소년 살인 사건

牯嶺街少年殺人事件, 1991

2017년 11월 23일 개봉

3시간 57분

2007년 세상을 떠난 대만의 명감독 에드워드 양이 1991년 발표한 걸작 <고령가 소년 살인 사건>은 2017년 11월 한국에 최초로 개봉했다. 1961년 대만 최초의 미성년자 살인사건을 바탕으로 한 영화는, 14세 소년 샤오쓰(장첸)가 속하고 싶어하는 소공원파 두목 허니의 애인 밍(양정이)을 사랑하고 결국 소공원파를 둘러싼 싸움에 휘말리다가 결국 밍을 죽이고 마는 과정을 차근차근 풀어놓는다. 밍을 사랑하는 샤오쓰의 감정 변화보다는, 샤오쓰의 아버지로 대표되는 중국에서 대만으로 이주한 외성인에게 가해지는 정치적인 압력과 10대에게도 만연해 있던 폭력을 병치 시켜, 이 순수한 소년이 점점 시대의 그늘에 물들어 살인까지 저지르게 떠밀어버린 대만의 역사를 반추한다. 무심히 놓여 있되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볼 수 없는 상징들과 빛과 어둠을 완벽하게 통제해 담아낸 촬영을 따라가다 보면 기나긴 러닝타임이 훌쩍 지나있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확장판)

Once Upon a Time in America, 1984

2015년 4월 9일 개봉

4시간 11분

스파게티 웨스턴의 거목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유작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는 유대계 미국인 갱스터들의 우정과 아메리칸 드림을 1920년대 금주법, 1930년대 대공황, 1968년 베트남에 걸쳐 그려낸 작품이다. 이 영화는 빼어난 만듦새만큼이나 저마다 다른 판본들의 러닝타임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첫 편집본이 6시간에 달했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는 미국 첫 개봉판, 1984년 칸국제영화제 상영판, 케이블 TV 방영판, 2012년 칸국제영화제 복원판 등 수많은 버전들이 제작돼왔고, 2015년에 공개된 251분의 감독 확장판이 현재로선 가장 완전한 판본으로 인정 받고 있다. 251분 확장판은 2015년 4월 한국에도 개봉해 2만 명이 훌쩍 넘은 관객을 만났다.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 (확장판)

The Lord Of The Rings: The Return Of The King, 2003

2017년 1월 25일 개봉

4시간 23분

피터 잭슨 감독이 연출한 <반지의 제왕> 3부작은 각각 178분, 179분, 199분의 부담스러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극강의 재미를 보장하는 작품으로 정평나 있다. 개봉을 마치고 제작된 DVD엔 러닝타임이 대폭 늘어난 확장판이 수록됐는데, 2017년 초 CGV는 3부작의 확장판을 주마다 상영하는 기획을 진행했다. 대장정을 마무리하는 피날레 <왕의 귀환>은 확장판마저 <반지 원정대>(2001)와 <두 개의 탑>(2002)보다 더 많은 분량이 추가됐다. 199분에 1시간 이상이 불어나 총 263분! 개봉판과 확장판 중 어느 것이 더 좋은가에 대해선 의견이 꽤 갈린다. 피터 잭슨이 <반지의 제왕> 3부작 다음에 연출한 <킹콩>(2005)의 러닝타임 역시 3시간을 넘겼다.


해피 아워

ハッピーアワー, 2015

2021년 12월 9일 개봉

5시간 17분

2002년부터 장편, 단편, 다큐멘터리 가리지 않고 연출 경험을 쌓아온 하마구치 류스케는 2015년, 5시간 17분의 초장편 <해피 아워>를 발표했다. 2013년 하마구치가 일본 고베에서 진행한 즉흥연기 워크숍에 참가한 비전문 배우들과 함께 만든 <해피 아워>는 30대 후반 여성 네 친구들이 각자 가정과 연애에 관련한 문제에 직면하고 대처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어마어마한 러닝타임은 비단 인물들이 통과하는 시간 자체가 길다기보다, 신체 워크숍과 뒷풀이 두 시퀀스에서 서로 오가는 몸과 말의 반응에 집중하는 과정을 1시간 넘게 이어가는 등 섬세한 결단들이 쌓인 결과다. 로카르노영화제에서 네 주인공을 연기한 배우들이 다함께 여우주연상을 받으면서 하마구치에 대한 국제적인 주목도가 확 올라, 처음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아사코>가 한국에도 개봉해 좋은 성적을 거두고, 각본을 쓴 <스파이의 아내>가 베니스 그리고 새 연출작 <우연과 상상>(2021)과 <드라이브 마이 카>(2021, 이 작품 또한 러닝타임이 3시간에 육박한다)가 각각 베를린, 칸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바 있다. 지당한 탄탄대로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