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노>

죽음도 불사하는 용감한 사람이지만, 사랑 앞에선 그저 괴로울 뿐이었다. 이 문장을 읽는 사람마다 각자 떠오르는 캐릭터나 사람이 있겠지만, 아마 그 원류를 따라가 보면 거기엔 분명 시라노가 있을 것이다. 2월 23일 개봉한 <시라노>는 120여 년간 사랑받은 시라노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다. 한국 영화 <시라노: 연애조작단> 때문에 시라노란 말은 익숙한데, 그 원류는 살짝 아리아리하다면, 아래의 설명으로 한 번 확실하게 익히자.


작가 시라노가 작품이 되기까지

프랑스 화가 재커리 하인스( Zacharie Heince)가 그린 시라노.

시라노, 본명 사비뇽 드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Savinien de Cyrano de Bergerac)는 1619년부터 1655년까지 프랑스에서 살았던 실존 인물이다. 그는 작가이자 검사(劍士)였는데 문학사나 역사에 엄청나게 큰 파장을 미친 권력가는 아니어서 20세기 중후반부터 조금씩 연구되기 시작했다. 그의 대표작인 <달나라 여행>과 <해나라 여행>(국내엔 두 편을 엮은 <다른 세상>으로 발간)은 그가 죽은 사후에 발표됐다. 스스로를 주인공으로 삼은 두 공상과학소설은 당대 작가와 후대 작가들에게 큰 영감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특이하게도 그가 어떤 식으로 죽었는지는 의견이 엇갈린다. 다른 사람에게 방문하던 중 떨어진 나무대들보에 맞아 회복하지 못한 채 사망했다, 혹은 습격을 받아 부상을 입어 사망했다고 추측되고 있다. 어느 쪽이든 그는 36살의 나이로 사촌의 집에서 숨을 거뒀다.

1901년 스톡홀름 왕립 극장에서 공연된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의 한 장면.

이 시라노가 문화적 잔향을 남긴 건 그 자신이 아닌 1897년 에드몽 로스탕이 쓴 희곡 때문이다. 에드몽 로스탕은 시라노가 생전 코에 콤플렉스를 가졌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5막극을 써내려갔다. 희곡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는 자신의 큰 코에 콤플렉스가 있는 시라노가 록산느에게 사랑을 고백하지 못한 채 친구 크리스티앙의 편지를 대필해준다는 내용을 담았다. 아름다운 언어를 쓰고, 빼어난 결투 실력을 가졌지만 콤플렉스로 차마 구애하지 못하는 시라노를 표현하고자 공연에선 코를 한껏 크게 만드는 분장을 쓴다. 5막극이라서 2시간 반가량 되는 분량이지만 시라노라는 인물의 매력과 애타는 삼각관계, 그리고 (실제 결투를 잘했다는 기록처럼) 흥미진진한 결투 장면 등을 담아 흥행한 작품이다. 이 작품의 성공으로 시라노는 오페라, 영화, 뮤지컬 등으로 지금까지 재창작되고 있다.

코를 과장한다는 건 이런 느낌(뮤지컬 <시라노> 포스터).


1900년에 제작된 영화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

이렇게 인기가 있는 작품 속 캐릭터라서 시라노를 그린 영화도 정말 많다. 어느 정도냐면 1900년에 이미 시라노가 주인공인 영화가 있었다. (참고로 영화의 탄생은 1895년이다.) 물론 당시 기술력으론 시라노의 사랑 이야기를 다 담을 수가 없어서 2분 남짓의 짧은 결투 장면만 묘사하고 있다. 그렇지만 부분적으로 색을 입혔고 왁스실린더로 사운드 싱크를 맞춰 상영했기 때문에(지금은 왁스실린더가 소실됐다) 컬러와 사운드를 모두 갖춘 최초의 기념비적 영화로 기록됐다.


1925년 공개된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

희곡의 스토리를 비슷하게 본 딴 영화는 1925년에 등장했다.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는 1922년에 촬영을 마쳤으나 화면에 색을 입히는 작업(이때도 컬러필름이 있었으나 1930년대에야 보편화됐다)을 하느라 1925년에야 비로소 공개됐다. 과장한 코와 록산느에게 연심을 있으나 직접 표현하지 못하는 전개 등 희곡의 특징을 가져왔으며 실제로 희곡을 원작으로 크레딧에 명시했다. 시라노를 연기한 피에르 마니에르는 이후 장 르누아르의 영화 <게임의 규칙>에 장군으로 출연했다.


<시라노>

1950년엔 마침내 시라노가 미국으로 건너왔다. 이전 작품들이 고향 프랑스에서 제작한 작품이었다면, <시라노>는 영어로 번역된 희곡을 각색한 할리우드산이다. 그래도 주인공 시라노는 미국인이 아닌 푸에르토리코 배우 호세 페레를 기용했다. 이 작품으로 호세 페레르를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을 수상해 히스패닉계로서 최초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배우로 기록됐다.


<록산느>

미국판 시라노로 유명한 작품은 하나 더 있다. 1987년 개봉한 <록산느>다. 스티브 마틴이 시라노를, 대릴 한나가 록산느를 맡았다. 제목을 ‘시라노’가 아닌 ‘록산느’로 한 이유는 시라노를 현대 배경으로 각색했기 때문. 현대 배경으로 결투사를 업으로 할 순 없으니 시라노의 의협심에 맞게 소방서장으로 변경하는 등 세심하게 각색한 느낌이 역력하다. <록산느>는 전체적으로 스티브 마틴식 선넘지 않게 웃음을 주는 코미디가 돋보인다.


제라르 드빠르디유의 시라노(위), 쟝 뽈 벨몽도의 시라노(아래)

1990년 프랑스에선 시라노 관련 영화가 두 작품이 나왔다. 하나는 영화였고, 하나는 연극 실황을 담은 영상이었다. 두 작품 다 기억할 만한 건 프랑스 국민 배우라 할 수 있는 배우들이 시라노 역을 맡았단 것이다. 영화에선 <카미유 클로델> 로댕이나 <아이언 마스크> 포르토스로 유명한 제라르 드빠르디유가, 연극에선 <네 멋대로 해라>와 <미치광이 피에로> 등 누벨바그의 얼굴로 유명한 쟝 폴 벨몽도가 시라노를 연기했다.


영화는 아니지만 2019년 나온 NT Live(National Theatre Live)의 <시라노 드 베라주라크>도 한 번 짚고 넘어갈 만하다. 런던 플레이하우스 시어터에서 올린 공연의 실황 영상인데, 제임스 맥어보이가 시라노를 맡았다. 다른 공연과 달리 현대적인 재해석이 가미돼 낭만적인 운율이나 과장한 코는 없다. 대신 시를 대신할 운율과 마초적인 스킨헤드가 있다. 파격적인 시라노와 거침없이 랩을 뱉는 제임스 맥어보이를 보고 싶다면 반드시 봐야 할 실황 영상이다.


<시라노>

최근 개봉한 <시라노>는 그동안의 시라노들이 가졌던 콤플렉스를 다른 방향으로 전환했다. 코가 아닌 키로. <왕좌의 게임> 티리온, 마블시네마틱유니버스의 에이트리 등 매번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준 피터 딘클리지가 모든 것이 완벽하나 콤플렉스를 느낄 수밖에 없는 시라노의 심정을 명확하게 드러냈다. 딘클리지의 연기력과 중후한 목소리가 주는 매력, 코를 과장하는 다소 유치한 방법을 생각하면 훨씬 현실적이다. 이 작품은 에드몽 로스탕의 희곡이 아닌 그 희곡을 바탕으로 제작한 2018년 뮤지컬(일반적으로 알려진 프랭크 와일드혼의 뮤지컬이 아니다)을 원작으로 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고백하는 피터 딘클리지의 애절한 연기를 기대해도 좋을 듯하다.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