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의 세계>

‘소피의 세계’를 여는 것은 수영(김새벽)의 목소리다. 창밖으로 희끄무레하게 눈이 쌓인 인왕산이 내다보이는 어느 겨울날, 수영은 인터넷에서 우연히 소피(아나 루지에로)의 블로그를 발견한다. 여행한 나라별로 사진과 글을 정리해놓은 블로그에는 소피가 서울에서 나흘간 머물렀던 재작년 가을의 기록도 담겨 있다.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그녀가 뭐라고 썼는지 궁금해서 하나씩 읽어보기로 했다.” 당황과 설렘이 동시에 묻어나는 수영의 목소리가 잦아들면, 영화는 2020년 10월 23일로 돌아간다. 이제 창문 저편에 보이는 인왕산에는 흰 눈이 쌓이는 대신 단풍이 곱게 물들어 있고, 테이블에 턱을 괸 채 노트북을 들여다보던 수영의 자리엔 소피가 앉아 있다.

<소피의 세계>

소피는 이곳에 오기 전까지 그저 여러 일이 있었다고 할 뿐, 어떤 사정으로 여행을 떠났는지 정확히 말해주지는 않는다. 다만, 소피가 북촌에 위치한 수영과 종구(곽민규) 부부의 집을 숙소로 정한 이유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소피는 한 남자와 만나기를 기대한다. 주호(김우겸)에 관한 유일한 실마리는 그가 고모와 함께 북촌에서 중고책방을 운영한다는 사실이다. 수영이 건넨 지도와 가이드북을 길잡이 삼아 소피는 낯선 동네를 탐방한다. 첫째 날은 지도를 따라 한쪽 끝에서 끝까지 둘러보고, 둘째 날은 지도에 없는 곳까지 조금 더 걸어본다. 헌책을 파는 가게는 어디에도 없고 주호 또한 눈앞에 나타나지 않지만, 소피는 여행자 특유의 느긋한 걸음걸이로 북촌 구경을 지속한다.

<소피의 세계>

때때로 소피는 길가에 멈춰서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는다. 새가 쪼아 먹어 움푹 팬 열매처럼 별 뜻 없는 것들, 건물 현관에 붙은 쪽지처럼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것들이 소피의 사진첩에 차곡차곡 저장된다. 북촌을 배회하는 이방인 소피는 유별난 산책자이고, 예민한 관찰자다. 누군가의 생활공간을 임시 거처로 삼은 소피는 앞만 보고 걷는 사람들 틈에서 줄곧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수영과 종구의 일상 또한 소피를 거치면서 평소와는 사뭇 다른 질감으로 채색된다. 2년이 흐른 후, 소피의 블로그를 읽어 내려가던 수영은 “아무도 모른 채 지나간 줄 알았던 하루”를 기억해낸다. 이사 문제로 불거진 종구와의 갈등, 지난한 싸움 끝에 터져 나온 외침, 그리고 흐느끼며 서로 끌어안았던 순간까지 고스란히 떠오른다.

이처럼 영화는 소피의 일기와 수영의 회상을 오가며 나흘을 재구성한다. 소피의 눈에만 들어왔던 풍경과 소피가 없는 곳에서 벌어졌던 사건이 느슨하게 엮이고, 소피가 포착한 단면에 수영이 맥락과 감상을 덧대는 식이다. 소피의 세계는 소피 본인의 의지로만 이뤄지지 않는다. 그 안에서는 소피가 관여하지 못한,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소피에게 영향을 미치는 선택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소피가 그토록 기다렸던 우연 또한 다른 이에게 먼저 찾아온다. 수영과 종구는 호프집에서 주호 부부의 다툼을 목격하고, 소피에게 줄 선물을 고민하던 조(문혜인)의 눈에는 헌책방이 들어온다. 인물들은 어떤 의도 없이 마주치거나, 시간의 간격을 두고 같은 장소를 다르게 경험하면서 한 세계를 채워 나간다.

여행 마지막 날, 소피는 수영 부부와 함께 인왕산에 간다. 셋은 집안에서 창문을 통해 바라보곤 했던 그곳에 올라 이번에는 시선을 반대로 겨눈다. 방금까지 머물렀던 집이 점처럼 모습을 드러내자, 세 사람은 같은 쪽을 향해 손가락을 뻗으며 감탄한다. 그때 <소피의 세계>는 관계에 관한 자그마한 진실을 가리킨다. 동시에 존재하지만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집과 산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거리는 필연적이다. 한 세상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이따금 위치를 달리해야 하며, 산꼭대기에서 조망하듯 바라볼 때 비로소 애틋해지는 마음도 있다. 헤어짐을 앞둔 소피와 수영, 종구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사진을 찍는다. 고맙다는 간결한 말에 진심을 담으며 상대에게 미소 지어 보인다. 서로 다른 마음은, 그들 간의 거리는 그렇게 잠시나마 좁혀진다.


리버스 reversemedia.co.kr

글 차인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