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성탄절, 찰리 채플린이 생을 다했다. 88세의 나이였다.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많다. 그가 창조한 방랑자(tramp) 캐릭터의 중산모, 폭이 넓은 배기 팬츠, 큰 구두, 콧수염, 지팡이를 알고 있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명언도 들어봤다.

두 사람 다 찰리 채플린이다. 왼쪽의 모습이 더 익숙한 건 당연하다.

‘왜 그가 위대한지를 설명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선뜻 대답하기 힘들다. 이 포스팅도 이에 대한 해답을 내놓기에는 벅차다. 지금 할 수 있는 것부터 해보려 한다. 그것은 당연하게도 찰리 채플린의 영화를 보는 것이다. 그의 대표작을 중심으로 위대한 배우, 감독, 제작자 찰리 채플린의 업적을 돌아보자.

1923년 <파리의 여인>
찰리 채플린의 첫 장편 연출작은 1921년에 발표한 <키드>다. 자전적인 이야기인 <키드> 이후 그는 <파리의 여인>을 내놓았다. <파리의 여인>은 찰리 채플린 본인이 등장하지 않는 영화인 점이 색다르다. 또 그의 초기작 가운데 유일하게 흥행에 실패한 작품이기도 하다. 찰리 채플린의 연인이었던 에드나 펄비안스를 여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유럽 여행 중 경험한 상류사회의 허위의식을 꼬집은 작품으로 찰리 채플린이 유독 애정을 피력한 영화라고 한다. 죽기 1년 전 1976년 직접 영화음악을 작곡해 재상영하기도 했다. ▶<파리의 여인> 바로보기

1931년 <시티 라이트>
유성영화가 등장하기 시작했지만 무성영화의 스타였던 찰리 채플린은 주위의 만류에도 무성영화 <시티 라이트>를 제작했다. 결과는 반전이었다. 엄청난 흥행과 호평을 이끌었다. <시티 라이트>는 찰리 채플린의 무성영화 미학의 정점이라고 평가된다. 대공항 시기, 방랑자 찰리가 꽃을 파는 눈먼 소녀를 도와주는 내용의 <시티 라이트>는 찰리 채플린의 환상적인 팬터마임 연기를 볼 수 있다. 특히 경찰과의 추격전 권투시합 장면은 이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도 쉽게 떠올릴 만큼 유명하다.

1936년 <모던 타임즈>
찰리 채플린의 가장 유명한 영화 <모던 타임즈>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방랑자 캐릭터를 연기한 마지막 영화다. 컨베이어 벨트의 부품이 되어버린 주인공을 담은 <모던 타임즈>는 지금 봐도 여전히 고민할 거리를 제공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노동자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찰리 채플린은 1931년부터 18개월 전 세계를 여행하며 실업, 대공황 등을 목격했다. 자본주의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이 영화를 통해 찰리 채플린은 공산주의자 낙인이 찍혔다.

1940년 <위대한 독재자>
찰리 채플린과 아돌프 히틀러는 닮았다. 콧수염이 특히 닮았다. <위대한 독재자>는 아돌프 히틀러와 닮은 찰리 채플린이 1인2역으로 유대인 이발사 찰리와 독재자 힌켈을 연기했다. 나치즘에 대한 풍자와 조롱을 담아낸 작품으로 2차 세계대전을 예언한 영화로도 언급된다. 파시즘에 대항하며 평화의 메시지를 던지는 영화의 마지막 연설 장면은 영화사에서 지워지지 않을 명장면이다. <위대한 독재자>는 찰리 채플린의 첫 유성영화이기도 하다.

1942년 <황금광 시대>
신발을 요리하는 방랑자 찰리가 먼저 떠오르는 <황금광 시대>는 물신만능주의를 비판한 찰리 채플린의 후기 대표작이다. 금광을 찾아 알래스카로 떠난 찰리와 살인범, 채굴꾼의 쫓고 쫓기는 서스펜스가 돋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알래스카 산악 지역의 세트와 미니어처 모형을 제작해서 구현한 특수효과와 편집도 볼거리다. ▶<황금광 시대> 바로보기

1957년 <뉴욕의 왕>
<뉴욕의 왕>은 채플린이 주연을 맡은 마지막 작품이다. 당시 찰리 채플린은 매카시즘 광풍으로 미국에서 추방된 상태였다. <뉴욕의 왕>에는 그런 매카시즘에 대한 반감이 드러난다. 유럽의 작은 국가에서 민중 봉기가 일어나고 쫓겨난 왕(찰리 채플린)이 뉴욕에 가서 공산주의자로 고발당하는 내용이다. 미국에 대한 반감이 드러나기 때문에 <뉴욕의 왕>은 제작된 지 16년이 지나서야 북미에서 개봉했다. 10분가량이 편집된 버전이었다. ▶<뉴욕의 왕> 바로보기



찰리 채플린의 간단한 연보
1889 4월 영국 런던 출생
1890 아버지 가출
1896 어머니 정신분열 증세로 입원
1901 아버지 알코올 의존증으로 인한 사망

찰리 채플린은 어린 시절 매우 가난하게 자랐다. 9살이 되기 전 보육에 두 차례 보내졌다. 이 시기의 이야기가 <키드>에 반영되어 있다.

1910 카노 극단 전미 순회 공연
1913 키스톤 영화사와 주급 150달러 계약
1914 첫 주연 장편 <생계> 개봉, <베니스의 어린이 자동차 경주>에서 첫 방랑자 캐릭터 등장

찰리 채플린은 1910년 카노 극단의 미국 순회 공연 이후 2년 뒤 1912년 미국으로 향했다. 영화제작자 맥 세넷의 눈에 들어 키스톤 영화사의 배우로 계약하며 방랑자 캐릭터를 만들었다.

1916 뮤추얼 영화사와 주급 1만 달러 보너스 15만 달러 계약
1918 16세 여배우 밀드레드 해리스와 결혼. 메리 픽포드,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D.W. 그리피스와 유나이티드 아티스츠 설립. 첫 아들 노먼 채플린이 사흘 만에 사망.
1923 <파리의 여인> 흥행 실패. 폴라 네그리와 약혼 발표 뒤 파혼
1924 <황금광시대> 촬영 중 임신한 16살 배우 리타 그레이와 결혼
1931 <시티 라이트>에 채플린이 직접 부르는 노래 삽입
1936 <모던 타임즈>에서 방랑자 찰리 마지막 등장. 여주인공 플레트 고다르와 세 번째 결혼.

찰리 채플린은 평생 4번 결혼했고 11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는 10대 배우들과의 스캔들을 자주 일으켰다. 영화의 위대함과는 달리 사생활은 문제가 많았다.

1939 미국 의회 반미활동위원회 조사 착수
1940 <위대한 독재자> 개봉
1946 <살인광시대> 개봉
1952 <라임라이트> 런던 첫 시사 결정, 채플린 일가는 출국 뒤 미국 입국 비자 말소
1953 스위스로 이주
1957 <뉴욕의 왕> 영국에서 제작
1964 자서전 <나의 인생> 출간
1971 칸영화제 특별상, 평생 공로로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
1972 아카데미 공로상 수상
1975 엘리자베스 2세, 채플린에게 기사 작위 수여
1977 88세로 영면
1978 재산을 노린 채플린의 시신 탈취가 있었으나 시신을 회수했음

찰리 채플린은 1972년 아카데미 공로상을 받을 때 20년 만에 미국을 방문했다. 그는 자신을 추방한 미국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대신 다음과 같은 수상 소감을 말했다. 관객들은 12분 동안 기립박수를 보냈다.

“불행해하면 인생이 널 비웃을 것이고 행복해하면 인생이 웃음지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면 인생은 너에게 경의를 표할 것이다. 다들 웃으세요, 웃으며 즐거움을 찾으세요.”

1992년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찰리 채플린을 연기한 <채플린>이 개봉했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두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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